성의 미학 (보급판 문고본)
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진중권이 구상하고, 아내 미와 교코가 집필하고, 진중권이 다시 한글로 번역하였다. 번역하면서 문체가 다소 '진중권스러움'을 띠게 되었지만, 확실히 기존의 진중권의 글과는 다른 느낌이다. 글을 쓴 주체가 한국 진보주의 독설가이자 미학자인 진중권이 아니라 영문학을 전공하고 미학을 공부한 일본인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는 것은 글의 해석에도 영향을 준다. 더구나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썼다는 것도 이 글의 성격상 매우 중요하다.

전체적 글의 구성과 분류는 난삽한 감이 없지 않지만 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진중권이 머리말에 쓰듯, "포로노그래피가 배를 채우기 위한 패스트푸드라면, 애로틱 예술은 잘 차려진 정찬"인지도 모른다. 물론 포로노그래피와 예술의 경계는 무너진지 오래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 찬양하는 다수의 작품들이 결국은 과거의 '플레이보이지'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기술적 문제로 한 점 한 점 제작하는데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그나마 가진 자들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과거(그리고 오늘날도 다분히) 화가들도, 주문가들도, 화상들도, 딜러들도, 컬렉터들도, 갤러리 주인들도 대부분 남자인 세상에서 그림 속에 반영되고 투사되는 현실이나 대상도 결국 남성들의 시각과 관점, 입장과 가치를 대변할 뿐이다. 그러한 예술은 어쩌면 한낱 '여성을 육체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대상화하고 물질화하는 남성들의 변명'일 뿐인지도 모른다. 미술관에 가면 전라의 여성미가 황홀하면서도 불편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도발적인 그림과 흥미진진한 에피소드 속에서도 우리가 놓치지 말고 귀를 기울여야 할 부분도 바로 이 점이다. 단지 '보여지는 것'만 보지 말 것. 그것을 '보여주는 자'들이 왜 그것을 '보여주는 지'를 파고들 것. 가령, 작가도 본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빼어난 미모로 남자를 잡아먹는 괴물과 같은 존재. 19세기 말은 여성해방운동이 주요한 사회 현상으로 대두하던 시기였다. 그 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새로운 유형의 여성, 즉 남성의 놀이개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의식을 획득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심이 '팜므 파탈'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아울러 심리학적 요인도 아름다운 괴물의 탄생에 기여했을 게다. 정신분석학에서는 흔히 '바기나 덴타타', 즉 이빨이 달린 여성의 성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남성들의 무의식에 깔린 거세공포의 상징이다. 그런 의미에서 '팜므 파탈'은 가부장 사회의 권위가 도전받던 시절 남성들이 느꼈던 사회적 거세공포를 구현한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의 역사가 어느덧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상에서 남성들에게 허용된 것에 비해 여성들이 누리는 권리는 아직 충분히 보장되지 못한 상태다. 그러니 그 아득한 100년 전에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면 얼마나 냈겠는가? 그들이 권리를 요구하면 또 얼마나 요구했겠는가? 그러하거늘 여성들이 자기 권익을 주장하고 나서자마자 여성을 '팜므 파탈'이라는 요물의 형상으로 만들어 유행시키며 다분히 과장된 공포에 엄살을 떠는 남자들의 호들갑이란. (본문 230쪽) 


그렇다고 이 책이 살벌한 페미니스트 책이라고 오해하지는 말라. 윗 인용의 마지막 문장처럼 '남자들의 엄살과 호들갑'에 가볍게 콧 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오히려 <성의 미학>은 부제 <서양미술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에 집중한다. 소재와 주제별로 그림을 분류하여 에피소드를 설명하면서 작품의 의도대로 그림의 주문자 또는 관찰자, 나아가 이 책의 독자를 '흥분'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공개된 공간에서 책을 볼 때 다소 민망한 시선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도발적인 그림들도 꽤 있다. 전라의 미소년이나 여신이 아니라도 그림 속에 숨겨진 '에로티시즘'을 발견하는 도상학도 흥미진진하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사변적인 이 글 덕분에 그림을 감상하고 읽는 시선이 한 층 깊어진 기분이다. 이미 읽었던 진중권의 미학서 <미학오디세이> 1, 2,  3권, <춤추는 죽음> 1, 2권, <앙겔루스 노부스>도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복습의 시간을 가져야 겠다.


다음 미술관행이 기다려진다.

 

 

2008년 9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