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에 두 번 속았다.

 

우선은 보통 단행본 두께에 속았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예사롭지 않은 종이 두께에 놀라게 된다.

게다가 책의 반이 그림인데, 거기다 인덱스 등 빼고나면 읽어야 할 텍스트는 100페이지라도 될까?

혹시나 오해할까봐 그러는데, 이건 칭찬이다.

현대 예술에 대해 아주 가볍게(?) 후딱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장점이니까.

게다가 같은 이야기를 줄창 반복 하고 있는데, 더 길어졌다면 차마 다 읽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책에 대한 언론이나 독자(?) 리뷰에 속았다.

분명 유쾌하고 재미있고, 웃기다고 그랬는데....

'거침없는 풍자'라는 부제에서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 보다.

밑줄 그으려고 색연필까지 들고 비장하게 <피카소의 달콤한 풍자>를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딱 한 번인가 피식~하고 웃었다. (너무 비장하게 읽었나?)

 

어쩌면 풍자와 해학을 읽는 나의 지적 수준이 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대 예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화가(비평가)의 잘못인가, 관람객의 잘못인가?

이 책에서는 물론 전자의 농락이라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작가(또는 번역)의 잘못인가, 독자(나)의 잘못인가?

이 경우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탓이라고 '겸양'을 떨어야 겠다.

(사실, 어느 쪽의 잘못도 아닌 동시에 모두의 잘못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게릴라 걸의 <서양미술사>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이 웃었던가.

http://blog.naver.com/jinirock78/35725524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을 읽으면서는 무릎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하도 옳거니!하며 무릎을 쳐대서) 

 

풍자와 해학은 '언어유희'와 문체, 은유와 상징으로 어우러진 알레고리가 핵심아닌가?

그냥 간단히 말해 '말장난'이 묘미인데, 이 책은 그런 쫀득함이 없다.

오히려 읽는 동안 눈에 거슬리는 비문과 부적절한 단어 선택 때문에 저자의 진의를 가려 읽기가 어려웠다. 

나의 알레고리 해석력이 딸리는 것인지, 예의 번역문체가 갖는 고질적 한계인지...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즐거웠다.

특히 키숀의 예술 취향은 나와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피카소의 블루시대를 높이 평가하거나, 달리나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잭슨 폴락이나 앤디 워홀 등을 '우습게' 보는 것도 같다. ㅎㅎ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현대미술의 팬이라고 하는 것 역시.

 

따라서 이 글은 내가 별로 '웃지' 못한 점만 제외하면, 많은 부분에서 공감가는 글이었다.

특히 그의 '예술관'은 나의 '예술관'과도 일맥상통한다.

나 역시 소수의 엘리트나 비평가만을 위한 예술,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따위는 믿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 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가는 것이다. 168쪽

 

 

현대미술과 그 추종자들(비평가와 수집가)을 안데르센 동화의 '벌거 벗은 임금님과 아첨꾼'들에 비유한 것도 정말 탁월했다. 현대미술은 일반 대중들이 '벌거 벗은 임금' 진실을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고, 대신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사실, 그것이 문제의 발달인 것이다. 도대체 '예술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말이다.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터무니없는 예술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천문학적인 가격에 있다. 97쪽

 

그림 한 장에 수백만 마르크를 지불하는 것은 예술과 문화의 본질적인 가치평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작품 하나하나에 터무니없이 돈을 처바르고, 그 작가들을 신격화하며 그들을 알 수도 없는 말로 칭송하는 것은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후략) - 장크 갈렌에서 보낸 독자 편지 중,  97쪽

 

 

그럼에도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면 이 문제 역시 그리 간단치가 않다.

현대 예술을 '쓰레기 더미'로 전락시킨 일부 현대예술가와 비평가들도 문제지만, 

반면 무엇을 '쓰레기 더미'로 볼 것인가하는 기준에 있어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자도 '인정'하고 있듯이 그의 예술 관점은 다분히 '보수적'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의 '취향'과 '관점'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만약 시장이나 담당 관리가 그런 일(엉터리 현대미술을 구입하는 일)을 하기 위해 내 돈 지갑에 손만 대지 않느다면, 나로서는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엉터리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엉터리 조각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발 저 높으신 비평가 양반들만은 그 하찮은 물건들을 가지고 내 신경을 건드리지 말기 바란다. 특히 건강상의 이유에서. 118쪽

 

 

결국 '취향'의 문제나 '관점'의 문제로 상대성과 다양성 철학에 빠져버리면 이도저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 그런점에서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자기 뜻을 주장한 그의 용기가 가상하고 멋지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그림을 그릴 권리가 있는 화가나, 그것을 원하는대로 비평할 권리가 있는 비평가나,

그것을 자기 돈 주고 얼마든지 살 권리가 있는 수집가들처럼

저자 키숀 역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암튼,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여러모로 공감과 아쉬움, '애증'이 교차하는 씁쓸한 글이었다.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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