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고 아름다운 집이 주는 숨막히는 공포감을 그린 소설 [더 걸 비포].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며 한여자의 죽음과 위험한듯 매혹적인 건축가이자 집주인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눈을 뗄수없게 만든다. 안락함과 따뜻함을 주는 집이라는 공간이 한순간 안전함을 거부하고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된다면 그것만큼 공포스런 것이 있을까? 소설속 집은 철저한 보안과 샤워하는 물의 온도까지 자동으로 조절되며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깔끔한 인테리어를 자랑하지만 이곳엔 사람의 온기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거기다 지나치게 완벽한 집과는 다른,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길 바라는 불완전한 사람들과의 기거가 서늘한 긴장감마저 감돌게 한다. 주인공 제인은 적은 예산으로 집을 구해보지만 생각보다 쉽지않다. 그런 그녀에게 행운처럼 만나게 된 집인 '원 폴 게이트 스트리트'는 미니멀한 세련미를 갖춘 아름다운 집이다. 하지만 각종 200여개의 금지조항과 정리정돈부터 생활방식까지 관여하는 까다로운 임대계약 조건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집주인이 세입자를 승인하는 마지막 조항은 정해진 룰도 규칙도 없이 오로지 면접을 통해 이루어진다. 태어나자마 아이를 잃은 아픔을 가진 제인은 고통스런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기위해 임대 신청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통해 아름다운집에 살게되는데, 사이먼이란 남자와의 만남으로 전에 살던 세입자 '에마'라는 여자의 죽음을 알게된다. 건축가이자 잘생긴 집주인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진 제인. 강박증이 심하고 비밀투성인 그와의 연애가 달콤하면서도 두려운 그녀는 불안감과 호기심에 자기와 비슷한 외모인 에마의 죽음을 파헤친다. 과연 제인이 마주할 진실은 무엇일지. 오로지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속에서 한남자를 사이에 둔 과거의 에마와 현재의 제인의 불안한 심리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낸다. 사랑뿐 아니라 삶까지 통제받고 싶은 피학적성향자 에마는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며 진실한 사랑에 안주할수 없는 여자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죄책감과 자기증오로 편집증이나 다름없는 극도의 완벽주의자가 되어버린 에드워드. 사산된 아이를 낳은 충격과 상실감으로 안타까운 모성애만 남은 제인과 돌려받지 못한 사랑때문에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사이먼까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그들의 만남은 예견된 비극이 아닐런지. 소설초반부터 한곳에 머물렀던 시선탓인지 생각지도 못한 반전과 점점 긴박해져 가는 상황은 스릴러 소설의 묘미를 한껏 보여준다. 영화까지 제작될 예정이라 하니 스크린 가득 탄탄한 스토리와 인물들의 내면연기를 어떻게 표현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올여름 제일 재밌게 읽은 심리스릴러 소설인듯 싶다. 마침내 우리가 각자의 과거가 남긴 잡동사니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소지품이 아니라 머릿속에 넣어두고 다니는 것들 말이에요. 이 사실을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에 살면서 깨닫게 되었어요. 성에 찰 때까지 주변을 반들반들 광을 내고 텅 비울 수는 있어요. 하지만 내면이 잡동사니로 뒤죽박죽이라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우리는 그걸 찾고 있는게 아닐까요? 우리 머릿속의 난장판을 보살펴줄 사람 말이에요. (490p)
백야행을 읽으며 일본추리소설의 매력을 알게 해준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다. 그가 전해준 탄탄한 스토리와 쫀쫀한 긴장감과 반전까지 추리 소설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열심히 읽고있다. 추리소설은 사건을 풀어나가는 재미도 있는만큼 등장인물들간의 연관성과 또 단서를 쫓아 독자대신 움직여주는 인물들에게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으면 반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11문자 살인사건]은 [백야행]이나 [용의자x의 헌신]같은 소설보다는 완성도가 떨어진 작품이 아닐까싶은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추리소설가 '나'는 편집자이자 친구인 후유코의 소개로 알게된 가와즈 마사유키와 사귀는 사이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말한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마사유키. 친구 후유코와 함께 죽은 애인의 수첩속 일정을 따라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우연히 알게된 1년전 요트여행이 난파된 사건에 다가갈수록 연관된 사람들이 살해된다. 그리고 서서히 들어나는 충격적인 비밀들. 난파된 요트여행에서 살아난 11명의 그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현실의 사건은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지. 선과 악의 경계가 애매하잖아. 그래서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지만 명확한 결론은 불가능해. 항상 커다란 무언가의 일부분일 뿐이야. 그런 점에서 소설은 완성된 구조를 지니고 있잖아. 소설은 하나의 구조물이지. 그리고 추리소설은 그 구조물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분야 아니야?(17p) 이소설엔 살인에 대한 책임을 그어느 누구도 짓지않고 마무리가 된다. 온전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는 사건. 선과악에 대한 모호한 경계와 관점에 따라 바뀌는 살인에 대한 타당성을 이야기한다. 저마다의 이유로 살인을 하고 살인을 은폐하며 침묵을 강요한 그들은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끝없이 자신에게 반문하며 살게 될것이다. 열린결말로 독자들에게 역지사지라는 질문을 던져주며 끝을 맺은 [11문자 살인사건]은 정통추리소설의 맛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설임에 틀림없다. 가독성도 좋아 책을 잡자마자 완독하기까지 손을 놓을수 없었다. 하지만 초기작품이라 그런건지 온전히 공감할수 없는 살인동기와 어설픈 설정들이 조금은 아쉬웠던 시간이었다.
예전에 방송을 통해 [비밀은 없다]란 영화를 봤던적이 있다. 영화관련 프로그램이라 전체적인 간략한 줄거리와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여주는데 딸의 실종을 둘러싼 충격적 진실을 그려낸 스릴러 영화다. 그런 영화와 다른 분위기의 밝은 이미지의 감독을 보면서 살짝 의외라는 생각도 했었던것 같다. 평범한 이름. 동명이인인가 싶었던 영화감독 이경미란 이름에 문득 그때 생각이 나서 어떤 글을 쓰는지 어떤 생각과 어떤 삶을 사는지 궁금해졌다. 아르테에서 출간된 [잘돼가? 무엇이든]이란 책은 에세이집이다. 글을 통해 보게 된 이경미란 사람은 참 자유로우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사람인듯 하다. 아니, 평범한 사람의 내면을 솔직히 보여주는 사람이라 할까? 책속 글들은 이경미 작가의 유머로 시종일관 유쾌하기만 하다. 영화촬영과 시나리오를 쓰면서 겪었던 에피소드와 엉뚱발랄한 가족들과의 대화, 13세 연하의 외국인 남편과의 만남과 결혼이야기가 동글동글 귀여운 미소의 그녀를 생각하니 연신 웃음이 난다. 물론 유쾌한 사연만 담겨진 책은 아니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취업한 회사는 왕복 네시간 거리로 월급조차 쓸수 없던 바쁜시간들. 거기다 3년내내 상사의 성희롱까지 겪었던 그녀가 회사를 관두고 뒤늦게 영화과에 진학하며 감독으로 데뷔하던 사연들까지 녹록치 않았던 순간들도 그려진다. 무엇보다 책속 가족들과의 대화와 에피소드를 통해 꿈을 쫓는 힘든여정속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가족들의 사랑이 엉뚱하고 유쾌한 그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싶다. 그녀 혼자 끄적이던 15년의 진솔한 기록들을 담은 책은 계획되지 않는 인생에 대한 작은 위로가 될수 있을것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지사 세상 이치는 무엇일까,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문제로 뼈 빠지게 고민하면 뭐하나. 먼지만 한 실 하나가 20년을 단절시키는데. '새 삶'에 방점 찍고 애써 긍정적인 해석은 하지 말자. 아무리 봐도 인생 그냥 복불복이다. (85p)
80년대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역사란 시험을 위한 암기과목으로만 여겼었다.(우리때는 역사가 아니라 국사라 했다) 간혹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사담이나 떠도는 야사를 얘기해주시는 선생님들 덕에 지루하지 않은 수업시간도 있었지만 방대한 양을 암기해야만 했기에 반갑지 않은 과목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성인이 된 뒤에도 사극 드라마나 영화, 또는 역사만화나 소설로 접할 뿐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도 없었다. 그런 내게 다산 초당에서 출간된 [조선왕조실록 1]편을 읽게되었는데 책을 읽기전 예전에 아이들과 함께 보았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만화책의 장점인 가독성과 빠른 전개들로 재미있게 읽었기에 이덕일작가의 조선왕조실록은 어떨지 궁금했었다. 태조이성계로 부터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 역사적 사실을 담은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나라의 위대한 기록 유산이라 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 조선. 위화도 회군을 통해 쿠데타을 일으키며 혁명의 대업을 이룬 조선의 첫번째 왕인 이성계의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의 포문을 연다. 친원파 권문세력이 권력을 휘두르고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궁핍해졌던 고려말 후기. 변방의 무장인 이성계는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도전의 도움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한다. 무엇보다 조선의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룬 이성계집안의 역사에 가려져 고려시대 개혁군주라 불리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와 왕건의 후예로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또한 이성계의 경솔한 세자 책봉과 정도전과의 대립이 낳은 2차례의 왕자의 난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많이 쓰이고 있는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비극적인 역사다. 만화나 소설처럼 가독성이 뛰어나다고는 할순 없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옛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역사란 여러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낸다. 권력을 위해 부모형제까지 죽이는 잔혹한 피의 역사들과 명분과 실리를 위한 정쟁등. 은폐와 왜곡되지않게 현대적 관점으로 풀어보는것도 의미가 있을것이라 생각된다. 500년 과거의 역사를 통해 오늘을 비춰보고 미래를 이야기할수 있도록 꼭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은행나무에서 출간된 박영작가의 [불온한 숨]은 38살의 은퇴를 앞둔 무용가인 제인의 이야기이다. 200페이지 조금 넘는 책속엔 춤을 추는 여인의 성공과 명예와 욕망과 상처로 얼룩진 기억들이 가득하다. 자신의 딸인 레나마저 헬퍼인 크리스티나에게 맡기고 돌아온 프리마돈나를 꿈꾸며 재기를 꿈꾸는 제인. 그런 그녀에게 세계적인 안무가 텐이 다가오면서 기억하고싶지 않던 그날을 떠올리게 되고 제인은 텐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살던 제인은 영국여자의 죽은딸과 닮았다는 이유로 입양되었고 죽은 아이의 삶을 이어서 살아가게 된다. 그로인해 발레를 하게된 제인은 파양될까 두려워 최고가 되기위한 피나는 연습과 노력을 해왔다. 어린딸 레나의 손길도 무시한채 자신만의 방에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서야 편안하게 쉴수 있고 스스로 존재할수 없음에 자신을 사랑할수 없는 그녀.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 자신을 옭아매는 제인이라는 틀을 깨고 나오기 위한 과거의 그날. 그춤. 그리고 두사람은 이제 곁에 없다. 자유를 향한 숨은 불온한 숨으로 기억속 어딘가에 묻혀있을 뿐. "나는 네가 왜 우릴 찾아왔는지 알아. 너는 늘 완벽에 가깝게 춤을 추고 있었지만 누군가 뜬 주물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지. 나는 이상하게도 너의 숨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어. 너는 숨을 쉬고 싶었을 거야." (141p) 오직 복수를 위해 성공해야만 했던 텐. 그는 늘 알수없는 갈증으로 속이 타는듯 하다. 돌이킬수 없는 과거로의 잘못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의 죄책감은 복수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향해 칼을 겨눈다. 자신을 용서할수 없음에 괴로워하는 텐. 몸에 새겨진 흉터와 질투와 욕망이 새겨놓은 깊은 상처로 그는 외롭고 또 아프다. 소설속 인물들은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제인과 텐, 부모의 사랑을 받지못해 삐뚤어지는 레나, 자신의 친동생을 사랑하게된 크리스티나, 사랑하는 아내인 제인의 도피처밖에 될수없는 진까지 지독한 외로움과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 안타깝다. 어느 한사람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않는다. 그렇기에 춤, 복수, 사랑하는 사람이나 헬퍼등 무엇인가에 집착함으로 외로움을 달래려한다. 그들이 기억속 어딘가에 묻어놓았던 불온한 숨을 토해놓는 순간 서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짧지만 강렬했던 소설이다. 하지만 깊은 여운이 오랫동안 남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