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던 작품인 [냉정과 열정사이]를 통해 처음 알게된 에쿠니 가오리. 러브스토리에 유난히 공감하기 힘든탓에 처음읽어본 그녀의 소설한권으로 다음작품을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못했다. 그만큼 내겐 관심밖의 작가였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그린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본 지인의 추천으로 다시 만나게 된 에쿠니 가오리. 소담에서 출간된 [별사탕 내리는 밤]의 그녀가 그려낸 사랑은 매우 인상적이다. 외국에서 성장한 두자매 사와코와 미카엘라는 이민2세로 일본인이다. 어린시절 서로의 연인을 공유하기로 약속한 두자매는 일본유학시절 다쓰야라는 한 남자와의 만남으로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다쓰야를 공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와코는 그와 결혼을 하며 일본에서 살게되고 동생 미카에라 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채 아르헨티나로 떠나 미혼모로 살고있다. 사와코와 다쓰야의 결혼이야기로 시작되는 소설은 여느 금슬 좋은 부부같지만 평범한 삶의 모습은 아닌듯하다. 아내인 사와코가 아닌 여러명의 여자친구가 있는 다쓰야. 다른여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는 단순히 스포츠운동같은 것이라는 다쓰야와 그런 남편을 이해하는 사와코. 소설속 등장인물들의 사랑은 모두 불륜의 모습을 하고있지만 어느 누구하나 불편한 시선을 주지 않는다. 사와코는 지금껏 젊은 사람이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젊다는 건 어리다는 것이고, 젊음을 잃을까 겁내는 것을 꼴사납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큼 위태로운,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벌거벗은 소녀처럼 무방비한 조카를 보고 있자니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한 남자가 자신의 전부라고 믿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아젤렌은 심지어 완벽한 애정이나 완벽한 관계 같은 것도 존재한다고 믿을 것이다. 그런 젊음을 부러워한다는 건 가슴 저밀 만한 일이었다. 슬픔으로 그리고 아마도 위로와 동정으로. -419p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남자를 신뢰할수 없었던 사와코와 미카엘라. 서로의 연인을 공유하겠다는 어린시절 그들의 약속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바램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별사탕 내리는 밤]은 막장드라마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미화시킨듯한 느낌이다. 이야기의 중심소재는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의 관계속에선 또 빠질수 없는 불륜이야기. 내가 너무 구닥다리 결혼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불륜이야기는 극으로 치닫는 일반적인 갈등을 연출하기보단 너무도 쿨한 인물들의 반응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형부와 처제사이인 다쓰야와 미카엘라의 관계는 이해하기가 쉽지않다. 연인을 공유한다는 충격적인 소재때문인지 에쿠니 가오리만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성때문인지 소설은 가독성이 정말 좋다. 사랑의 모습이 한가지는 아니겠지만 별사탕처럼 달콤한 사랑의 맛이라고 느껴지진 않는 그들의 이야기. 각자의 선택에 후회는 없을지, 그들이 정말 행복할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던 [별사탕이 내리던 밤]이었다.
발뮤다 더팟과 토스터기에 한동안 꽂혀있던적이 있었다. 더팟의 심플하면서 세련된 디자인과 죽은빵도 살린다는 토스터기의 매력은 입소문을 타면서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이 형성될 정도로 인기있는 제품이다. 주부의 로망이라 하는 발뮤다의 창업자이자 사장인 테라오 겐. 그의 신간 에세이 [가자,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은 한 기업가의 성공스토리와 진솔한 삶을 담은 책이다. 발뮤다란 제품의 이미지와 걸맞는 깔끔하고 심플 한 표지. 제목을 보면서 여행에세이일까 생각했지만 저자의 녹록치않았던 인생이야기가 담겨있다. 개인적으로 위인들의 이야기나 자서전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테라오 겐의 이번 신간은 일본의 가전업계의 애플이라 불린다는 발뮤다의 창업자란 단순한 호기심에 책을 읽기시작했지만 그의 살아온 여정에 눈길을 뗄수가 없었다. 테라오 겐은 유년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방황을 했다고 한다. 열일곱살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년간 해외를 여행하던 테라오 겐의 학창시절은 평범하진 않은듯 하다. 저자인 테라오 겐이 만든 발뮤다는 월셋집에서 1인기업으로 시작했다. 2007년 금융위기에 주문이 줄기 시작했으며 애써 만들어낸 제품들도 팔리지않아 파산위기를 맞게되는 발뮤다. 잠을 줄이며 차세대 선풍기인 그린팬을 만들어 우여곡절끝에 히트를 치게 한 그의 집념과 열정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자본도 없고 디자인이나 경영 전자기술까지 배운적이 없기에 분명 쉽지는 않았을터. 책속엔 필사의 노력으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했던 그의 꿈을 향한 조언들이 담겨있다.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가진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건 틀린 생각이다. 아무리 내게 불리한 상황이라 해도 역전할 기회는 늘 있다. 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할 수 있을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 전부를 걸었을 때에야 비롯 역전할 수 있었다.” (P287) 책장을 덮으며 한편으론 이토록 억척스러운 테라오 겐의 가족은 어땠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잠도 거의 못잘정도로 바쁜 아빠와 남편의 부재로 가족들은 힘들어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진솔한 가족들 이야기와 발뮤다제품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더 있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살을 꿈꿔본적이 있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있었다고 대답할것이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뚜렷한 이유도 없고 누구때문인지도 모를 그때의 자살에대한 터무니없는 계획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허무주의에 빠진 철없던 시절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두단어가 유난히 눈에 띄는 소설한권을 만났다. 행복한 자살이라는 엉뚱한 제목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표지와 함께 어떤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소담에서 출간된 [행복한 자살되세요, 해피 뉴이어]는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는 고독한 40대독신녀인 실비의 이야기다. 투병중이던 아빠마저 돌아가시고 혼자남은 실비는 친한 친구인 베로니크의 권유로 심리치료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자신의 무의미한 삶을 크리스마스에 스스로 마감할 계획을 세우지만 심리치료사인 프랑크가 내준 숙제덕분에 평소의 자신이 해보지 못한 경험들을 하게 되는 실비. 그녀는 계획대로 크리스마스에 자살하게 될까? 무관심의 중심에 서 있는 나. 나처럼 평범하고 솔직한 사람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여성인권단체 페멘(Femem)의 일원으로 모노프리에 가는 거라면 몰라도, 내게 포위망을 뚫고 나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다. 나에게 부족한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링에 올라갈 준비가 된 복서처럼 나는 심호흡을 한다. 나는 이 내면의 싸움을 위한 정신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도둑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싶은 자살하려는 여자다. - 41p 진정한 '나'를 알기위한 시간속에서 자신에게 풍기는 고독의 냄새를 알게되고 실비는 자살하겠다는 마음을 한 노숙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접게된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과 해보지 못한 경험을 통해 조금씩 자신의 틀을 깨는 실비를 보며 조금씩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자신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놀라운 변화를 보이는 실비의 모습이 분명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듯하다. 이혼후 모든 의욕이 없어진 실비의 친구 베로니크처럼말이다. 삶은 소중하다. 언젠가 누구에게나 다가올 죽음이지만 살아있는 시간만큼은 나를 사랑하며 살아야한다. 거기서부터 행복은 시작되는것이 아닐까. 짧은 이야기지만 자살이라는 소재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소설이다. 소설 안에는 감동과 웃음, 따뜻함까지 담겨있어 꼭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해본다. 태양이 빛난다. 나는 하늘과 구름을 바라본다. 아름답다. 마음이 누그러진다. 더 자주 하늘을 봐야겠다. 가슴이 뭉클하고 행복에 젖은 나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간다. 한가로이 거닐면서 내 주위의 사람들을 쳐다보고 싶다. 파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이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을. -161p
작년 한해 읽은 책중 인상깊게 남았던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소설인 [내가 죽어야 하는 밤]. 꽤 두꺼운 분량의 책속엔 독특한 소재와 상상력이 가득했던 이야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사이코 스릴러 대명사라 불리는 피체크의 다른 전작들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이라는 소설 한권으로 다음작품이 기대가 되는 작가다. 그래서인지 그의 신간인 [노아]의 출간소식을 들었을때 유난히 반가웠나보다. 소설의 주인공 '노아'는 총상을 입은채 쓰러져있다 부랑자인 오스카에게 치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모든 기억을 잃은 노아. 오스카와 함께 베를린 거리를 떠돌며 지하세계에서 살게된 그는 우연히 신문지면에 실린 그림 한점을 보며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게 된다. 그림의 원작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신문사의 셀린과 통화를 하게되면서 노아, 셀린, 오스카까지 세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늙은 남자의 목소리, 노아의 얼굴이 박힌 다른 이름의 여권 세개, 그들을 노리는 킬러. 노아의 정체는 무엇이며 잃어버린 기억 너머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그 이름에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는 어떤 식으로든 불려야 했다. ‘노아(Noah)’라는 알파벳 네 글자가 그의 오른쪽 손바닥에 굵은 펜촉으로 그은 듯한 글씨로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가 깨어났던 지옥의 한 모퉁이처럼 그 이름은 그에게 낯설었다. 신분증도 돈도 주머니에 없었고, 기억도 고통의 바다에 빠뜨리고 없었다. - 28p 소설속 저자가 그리는 세계는 그야말로 혼돈의 세계다. 마닐라 독감이라는 전염병이 전세계로 번져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공항은 폐쇄되어버리고 이상기후현상과 기아등 종말을 그린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전염병을 치료할 백신은 존재한다. 거대 제약회사의 재파이어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속.낙후된 개발도상국에 먼저 약을 제공하기로 발표한날 총을 맞게 된다. 노아는 위험에 빠진 세상을 구할수 있을지.. [노아]는 언제가는 멀지 않은 미래에 닥치게 될지 모르는 암울하고 부정적인 디스토피아 세계를 소설속에 그리며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았다. 소설을 읽을수록 노아라는 의문의 인물을 통해 어떤 결말을 만들어낼지 궁금증에 눈을 뗄수가 없었고 기대했던 만큼 만족스러웠던 소설이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안녕, 드뷔시]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한 소녀가 자신의 꿈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속엔 화재와 살인사건이라는 추리와 미스터리까지 가미가 된 이야기는 내가 읽어본 시치리의 소설중 최고의 소설이 아닐까싶을 정도로 푹 빠져 읽은듯하다. 또한 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해가는 형사나 탐정이라는 기존에 흔히들 봐왔던 인물이 아닌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란 설정도 독특하면서 흥미로웠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열다섯소녀인 고즈키 하루카. 화재로 할아버지와 사촌인 루시아를 잃고 자신역시 전신화상을 입은채 살아남게된다. 피부이식과 성형까지 오랜시간 재활과 치료를 받으며 미사키 요스케라는 선생님께 피아노레슨을 받는 하루키.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할 정도로 불편한 몸과 예전같지 않은 손가락때문에 힘겨운 시간들이지만 음악학교 대표로 콩쿠르를 준비하며 피아니스트의 꿈을 다시 꾸게된다. 그러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많은 유산을 받게 되면서 신체적인 위협을 가하는 작은 사건들이 생겨나고 결국 엄마인 에쓰코가 의문의 사고로 죽게된다. 영롱한 음 하나에 달빛 한 줄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음이 빛이 되어 마음속에 비쳐 든다. 눈꺼풀이 절로 감기더니 이내 정경이 떠올라 또 한 번 놀랐다. 미사키 씨에 따르면 드뷔시는 음과 영상의 관계를 중시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었다. 달빛이 호수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교교한 달빛 아래 한 쌍의 남녀가 한가로이 왈츠를 춘다. 시간마저 느릿느릿 흘러가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 위로 퇴락한 고성이 또렷이 떠오른다. -234p 화재이후 삶이 달라진 하루카는 좌절하지 않는다. 절망에 빠져 실의에 빠져 살수도 있는 그녀였지만 피아노를 통해 위로와 살고자하는 힘을 얻는 하루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다리와 개구리처럼 흉칙한 목소리, 전신화상으로 변해버린 외모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들속에서도 음악을 향한 집념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그런 그녀에게 천재적인 재능으로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인 미사키 요스케라는 인물은 구원자이면서 멘토같은 존재다. 또 한편으로는 유명검사의 아들이자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 뒤 피아니스트가 된 미사키 요스케가 주축이 되어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매력적인 캐릭터라 할수있다. 무엇보다 미사키 요스케와 하루카의 대화를 통해 가슴에 콕 박히는 따뜻한 위로와 따끔한 조언등 작가의 주옥같은 글들이 너무 좋았다. 나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걸 갈망했다. 연이어 가족을 떠나보내고 피부와 목소리를 잃었다. 몸의 자유마저 빼앗겼다. 잃은 것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재활이 끝나도 팔다리에는 장애가 남을 것이다. 그래서 잃은 것 대신 새로운 뭔가가 갖고 싶었다.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 나한테만 허락되는 재산이 갖고 싶었다. 그것이 피아노였다. -358p 콩쿠르를 준비하며 화재라는 사건으로 부서진 삶을 다시금 이어가는 하루카의 성장소설같기도 하고 살인사건과 생각지도 못한 반전을 주는 미스터리소설의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 [안녕, 드뷔시]. 애정하는 작가 시치리의 소설을 읽는건 역시 즐거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