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안녕, 긴 잠이여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라 료’의 『안녕 긴 잠이여』의 사전지식이 하나도 없었다.

2013년에 출간되어 개정판으로 다시 만나게 됐다는 것 밖에는...

일본 작가들의 작품과 많이 만날 기회가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보다...

『안녕 긴 잠이여』는 ‘하드보일드’ 작품이라고 알고 있다.

‘하드보일드’가 무엇인지 갸우뚱하며 나무위키를 찾아봤다.

《문학 장르 혹은 스타일. 영어로 hard-boiled. 일본에서는 비정파(非情派)라고 번역한다. 비슷한 단어로 느와르가 있다.

원래는 '(달걀이) 완숙되는'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지만 '비정·냉혹'이라는 의미의 문학 용어로 변했다. 사전에서는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 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 비극적인 사건을 건조하고 진지한 분위기로 묘사하는 작품을 ‘하드보일드’라고 부른다. 자극적인 갈등, 감정 묘사가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나무위키 발췌-》

‘느와르’(Noir:범죄나 사회적 윤리에 반(反)하는 소재를 사용해 어두운 분위기를 부각시키는 작품군을 칭하는 장르) 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와자키’와 만났다.


혼자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는 사와자키는 400일의 은둔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온다.

오래전 발생한 여성의 죽음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너무나 기이하게 맡게 되고, 주변 인물들과 당시의 상황들을 알아보며 ‘자살’로 판명된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 시대의 정치나 권력 등 구조적 문제로 인해 은폐되고 사건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며 탐정으로서의 ‘사와자키’가 각성한다.

시크함을 넘어 너무나 차갑고 삭막하기까지 한 ‘사와자키’라는 인물이 은근한 매력으로 책을 읽으며 푹 빠지게 됐다.

고독해 보이고 냉철한 판단, 모든 상황을 다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와자키’의 발걸음에 나도 모르게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길게 늘이거나 꾸밈을 많이 넣지 않는 ‘하라 료’ 작가의 문체가 그의 성격을 더욱 잘 나타내고 빠지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은...

이야기의 결말까지 너무나 이해할 수 있는 문장력에 존경을 표한다.


많은 페이지 수에 실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술술 읽힌다.’라는 말이 찰떡같았던 『안녕 긴 잠이여』로 ‘사와자키 시리즈’를 더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게 됐다.

이번 책을 계기로 새로운 작가님과 작품을 만나게 되었는데 작가님이 이미 고인이 되셨다는 정보에 많은 아쉬움과 감사함을 말하고 싶다.

지금과는 다른 시간 속의 이야기이지만 그 시대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푹 빠져서 너무나 재미있게 읽게 되고, 늦었지만 작가님의 작품을 알게 되어 뿌듯한 마음마저 가득하다.


P11

겨울이 끝나갈 무렵,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거의 사백 일 만에 도쿄로 돌아왔다. 빗속을 아홉 시간 이상 쉬지 않고 달린 블루버드를 니시 신주쿠에 있는 사무실 주차장에 세우고, 편히 죽지 못한 시체처럼 뻣뻣한 몸으로 차에서 내렸다.

이슬비 내리는 밤의 귀환이지만 이 도시는 그런 감상에 젖기에 너무나도 비열했다. 잠가놓지 않는 우편함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니는 좁고 낡은 건물 계단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올라가 한낮에도 결코 햇빛이 들지 않는 2층 복도 안쪽 사무실에 이르자, 일 년 이상 떠나 있던 생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몸을 휩쌌다. 출입문에 페인트로 써놓은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라는 글자의 색이 문득 바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예전부터 그랬지만 그간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P390

“그런 타입의 젊은이는 당신처럼 꼼꼼하게 돌봐주는 나이든 남자와 친해지면 스스로 그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아. 그가 당신을 두고 떠났다는 건 머지않아 당신이 그를 두고 여기를 떠날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겠지.”

“그럴 리가.” 마스다가 묘하게 힘주어 부정했다.

내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방금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자기를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쪽에 넣으려고 했어. 그렇지만 당신은 사실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모르는 거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분류 방법을 들먹이며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 드는 게 아닌가. 진짜로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은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써가며 고민하지 않아. 그 노숙자처럼 위험한 곳이라고 느끼면 재빨리 몸을 피할 뿐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의 타임슬립
최구실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의 타임슬립』은 표지부터 남달랐다.

《시간을 건너 시작된 현대판 인어공주 이야기》라는 띠지의 문구까지 마음을 몽글거리게 만들기 충분했기에 읽기 전부터 설레는 마음이었다.

코로나 시기가 배경으로 나오는 부분이 내게도, 현실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마음으로 책을 읽는 내내 감정이입이 많이 되기도 했다.


최구실 작가님의 『남의 타임슬립』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인어공주가 아닌 ‘남’이라는 소년의 등장으로 모든 일상이 바뀌게 된 ‘은우’와의 이야기다.

취객과의 소동으로 인해 파출소로 가게 된 ‘은우’와 친구들이 그곳에서 겁먹은 눈으로 ‘은우’를 바라보는 ‘류남’의 사촌 누나를 자처하며 데리고 나오며 만남의 시작을 한다.

100년 뒤 미래에서 수학여행을 왔다가 길을 잃었다는 소년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내칠 수 없는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 한 집에 살게 된다.

며칠간의 유예였던 ‘류남’과의 어색한 동거하게 되고, 코로나 팬데믹에 하나밖에 없는 ‘은우’의 조카 ‘하나’가 위험한 순간을 겪게 될 때 도움을 주는 ‘남’.

2년 후에는 코로나가 끝날 것이라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와중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남’.

‘남’이 사라진 후에 그의 말처럼 코로나는 종식되고, 사라진 ‘남’을 잊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은우’에게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나타난 ‘남’.


판타지와 같은 이야기이지만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서 누군가 ‘남’이처럼 ‘현재를 오며 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라는 꿈같은 생각에 빠지게 만들던 『남의 타임슬립』은 나도 모르게 미소 짓기도 하고, 둘의 헤어짐의 시간이 안타까워 마음을 졸이기도 하며 너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이나 영화에서의 《타임슬립》 이야기를 워낙에 좋아하기 때문에 더 푹 빠져서 읽었나 보다.


「“사랑해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해도요.”

미래를 말한 대가이자, 예정된 이별의 시작이었다.」


P101

“누나, 이제 머지않았어요. 팬데믹은 2023년에 끝날거니까요.”

“……남아?”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한겨울 나뭇가지를 닮은 남은우의 손가락을 타고 꽃망울처럼 물거품이 피어올랐다. 그 거품을 이루는 요소 중 가장 반짝이던 남의 두 눈망울은 여전히 은우에게 고정된 채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점차 사라졌다. 모든 채도가 메말랐던 은우의 거실을 섬광이 훑고 지나갔다. 그 광경에 놀란 은우가 울음을 뚝 멈추었다.

류남은 남은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건 움켜쥘 수조차 없는 물거품이었다.


P255

“만에 하나 누나 말처럼 제가 사라지지 않고 큰 사건을 막는다고 해도, 앞으로 그런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날 거에요. 그때마다 우리는 이별을 감수하고 모든 일을 막으려 다녀야 할까요?”

남은우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그 영화 속 남자를 떠올렸다. 이미 제 소멸을 감수하고 하나를 구한 남이었다. 만약 또 물거품이 된다면 기약 없는 기다림만이 은우를 괴롭힐 테다. 남은 은우의 얼굴에 드러나는 갈등을 읽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남은우였다. 남은 비겁하게도, 살며시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누나. 전 그런 걸 막으러 온 사람이 아니에요.”

남은 고개를 떨구었다.

“누나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러드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3
요 네스뵈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르웨이의 소설가이자 경제학자이며 저널리스트에 밴드의 보컬이기도 한 ‘요 네스뵈(Jo Nesbø)’의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를 「블러드 문 (Blodmåne)」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많은 시리즈가 있는데 어떻게 이제야 만나게 되었을까 싶을 만큼 우리 집 짝꿍님도 잘 알고 있는 작가의 작품을 나는 왜 몰랐을까 싶은 마음이었으니...

실은 처음 책과 만나면서 662쪽에 달하는 ‘벽돌 책’임을 확인하면서 겁을 집어먹으며 읽기 시작한 것은 ‘안 비밀’로 치겠다.

「블러드 문 (Blodmåne)」 은 이전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의 배경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 전에 인물이나 그 인물이 어느 작품에 등장했는지까지 너무나 친절하게 설명된 부분이 있어서 천천히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다.

(적응되기까지 여러 번 앞장으로 넘어가는 약간의 수고가 있기는 하다.)

특히 한국계 형사(입양된 것 같다) ‘성민’이 나오기에 반가운 마음도 더 한다.


일련의 사건들과 상처받은 마음으로 노르웨이를 떠나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해리 홀레’는 부동산 재벌 ‘마르쿠스 뢰드’의 파티에 참석했던 두 여성의 실종이나 시체로 발견되는 일로 인한 사건 해결을 위해 ‘뢰드’에게 고용된다.

고용될 수밖에 없는 ‘사고(?)’가 일어난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전설과도 같은 ‘해리’의 복귀 아닌 복귀로 이전 동료들이나 주위 사람들과 새로운 팀을 꾸려 범인을 쫓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스릴러 작품을 읽게 되면 ‘범인 찾기’를 하게 되는데 「블러드 문 (Blodmåne)」은 단순한 범인 찾기보다는 인간의 내면과 여러 인물의 이야기에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범인이 누구일까 보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더 집중하게 되고, 예측하기 어려운 마지막 이야기와 생각지 못한 인물로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시리즈로 만들어지는 드라마나 영화로 볼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소망의 마음마저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엄청난 쪽수로 겁을 먹긴 했지만, 이 전의 작품들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찾는 중이다.

읽는 내내 단 한 번의 지루함도 없이 집중해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작가님이나 번역자님의 필력에 감탄하며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여러 시리즈가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작품으로 계속 이어가기를 바란다.


P37

그게 사랑일까? 왜 아니겠는가? 그저, 생각하면 너무 우울한 내용이라서?

자갈 깔린 도로 쪽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의 푸른 불빛이 보였다.

카트리네는 해리 홀레를 생각했다. 지난 4월 그가 살아 있다는 흔적을 포착했다. 캘리포니아의 베니스 해변 사진이 담긴 엽서였는데, 로스앤젤레스 소인이 찍혀 있었다. 바다 깊이 숨어 있는 잠수함에서 쏘는 수중음파탐지기 신호처럼 느껴졌다. 엽서의 내용은 짧았다. “돈 좀 보내.” 농담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았다. 그 이후로는 아무 소식이 없다.

완벽한 침묵. 그녀의 머릿속에서 끝까지 부르지 않았던 자장가의 마지막 구절이 흐르고 있었다.

‘블루맨, 블루맨, 대답해. 익숙한 소리로 음메 하고 울어. 아직 안 돼 블루맨, 네 아이를 위해 죽을 수 있니?’


P564

“그러니까 의문의 이거야.” 해리가 말했다. “풋내기를 찾아내려면 어디서 시작해야 하지?”

트룰수가 꿀꿀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 트룰스?”

트룰스는 투덜투덜 꾸물대더니 겨우 말했다. “만일 그놈이 그린 코카인을 손에 넣었다면, 압수한 다음 분석하러 보내기 전까지 갖고 있던 사람들을 확인해야 해. 결국 공항과 증거물 보관소지. 그러니까 맞아, 나랑 가르데르모엔에서 경찰청으로 운반한 사람들이야. 하지만 증거물 보관소에서 과학수사과까지 수송한 사람들도 포함돼.”

“잠깐만.” 외위스테인이 말했다. “그때 압수한 그린 코카인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유일한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잖아.”

“트룰스 말이 맞아.” 해리가 말했다. “어쨌든 뻔한 곳부터 찾아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확한 관계도 알 수 없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어서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는지 처음엔 알지 못한다.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에서 살고 있는 ‘미티’의 정체가 궁금하고 그녀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친구라는, 이모라고 부르는 ‘베델’과는 진짜 어떤 관계일까....

‘미티’와 ‘베델’의 삶과 관계의 의문 부호를 마침표로 찍기도 전에 ‘미티’마저 궁금증으로 가득한 새 이웃 ‘레나’와 레나의 남자 친구(동거인) ‘서배스천’까지 등장한다.

『네가 누구든』의 주요 인물들이다.

10년째 함께 살고 있는 ‘미티’와 ‘베델’의 원래 이웃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여름 별장이나 공유되고 있는 집들로 인해 새로운 세입자들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온통 유리로 되어 있는 옆집으로 ‘레나’ 커플이 이사를 오고 ‘미티’는 새 이웃에 대한 궁금증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매끄러운 피부와 늘씬한 몸매,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인 ‘레나’ 또한 남자 친구를 만나기 이전의 삶이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이들의 극적인 만남으로 ‘친구’가 되어가는 듯하지만 둘의 관계도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


상처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과거를 갖고 있는 이들 속에 일흔아홉의 ‘베델’의 삶은 왠지 모를 낭만이 느껴진다.

어쩌면 생면부지일 수 있는 ‘미티’와의 인연, ‘미티’ 엄마인 ‘퍼트리샤’와 인연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까지 내게는 낭만이다.

『네가 누구든』의 여자인 등장인물들을 보면, 자신의 삶은 현재만이 아닌 과거, 미래까지 모두가 ‘나’여야 하는 정체성을 찾고 있다고 느껴진다.

어울림이 느껴지지 않는 이들이 만나고, 함께 하고, 같은 마음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의리」와는 다른 「연대감」의 만들어진 「우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들의 앞날이 선명하지는 않아도 환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졌기에 영화화가 확정되었다는 이야기가 더 반가웠다고 하고 싶다.

열리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미티’와 ‘레나’의 모습을 바라고 있다.

응원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소망해 본다.


P15

오늘은 미티와 베델이 동거한 지 십 년째 되는 날이다. 미티의 인생의 거의 삼분의 일을 함께 산 것이다. 그들의 기념일이 진정한 이정표로 느껴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베델의 나이가 일흔아홉이고 생애 대부분이 미티가 태어나기도 전에 흘러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들이 함께한 세월은 너무도 짧고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동거 십 주년을 기념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중략] 결국 미티는 베델이 이런 의식에 의미를 두든 말든, 감사의 뜻으로 케이크는 사 가기로 결심한다. 이번에는 당근 케이크다.

그녀는 진열장 유리를 손가락으로 누른다. “저거요.”

직원이 작은 디저트를 꺼내 상자에 담는다. “케이크에 뭐라고 안 써요?” 미티는 베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잠깐 고민한다. 

「날 구해줘서 고마워. 날 계속 데리고 있는 건 하나도 안 고마워.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P288

엄마가 미티, 세상에 대한 너의 관점은 전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라고 말했단 사실을, 오래전에 끝난 일들을 곱씹는 미티를 엄마가 얼마나 못 견뎌 했는지를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해줄 것이다. 엄마가 틀렸다고.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녀의 마음은 주변 사람들이 끊임없이 문가를 말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재생되는 편집 영상 같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미티 자신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녀의 말을 인용하는 사람도 없다.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이 한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교 여름방학이면 시골 외갓집에 꼭 내려가곤 했다.

『여름비 이야기』는 고등학생이던 사촌 언니와 함께 잠을 자면서 언니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졸라대던 그때가 생각나게 해주었다.

제대로 볼 수 없으면서도 소리만으로, 느낌만으로 알 수 있는 공포감이 최고였던 ‘전설의 고향’을 좋아하던 꼬맹이였던 나는 사촌 언니의 무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던 그 시간을 기다리고 좋아했다.

요즘은 범죄와 관련된 여러 프로그램이 많이 있어서 지금도 여전히 재미있게 잘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일찍부터 만나게 되었고, 추리와 서스펜스, 공포가 가득한 소설을 많이 읽곤 한다.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알게 되면서 여러 작가의 많은 이야기를 읽으며 ‘홈즈’나 ‘포와르’가 나오는 것보다 더 공감하고 찾게 되는 것 같다.

‘기시 유스케’ 작가의 작품도 그렇게 만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에게 읽히거나 알려진 몇몇 책을 읽어보았다. (아직 만나지 못한 책들이 많이 있기는 하다)

『여름비 이야기』는 일단 표지부터 너무나 눈에 확 들어온다.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커다란 눈동자.

그 눈동자 주위의 얼굴은 실핏줄이 다 터져버린 듯 붉다.

무엇인가 기대하고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게 만드는데 충분한 시작이었다.


「5월의 어둠」, 「보쿠토 기담」, 「버섯」의 소제목으로 세 가지 이야기가 묶여있다.

‘하이쿠’ 시집의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스승을 찾게 된 제자와의 대화나 익숙하지는 않기에 오히려 주인공들이 찾고 있는 의미를 나도 함께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5월의 어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스님의 저주인지 염려인지 모를 경고를 받고 난 후 너무나도 기묘한 꿈(악몽)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나오는 「보쿠토 기담」의 꿈속 배경은 눈에 그려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이다.

앞마당에 버섯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집안까지 점령하며 자라나는 버섯들이 말도 안 되는 곳으로 번져가는 상황들에서 생각지 못하고 예상할 수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의 묘미를 주는 「버섯」.


손에 땀을 쥐게 하거나 긴장감과 박진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마지막 줄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놀라움으로 생각이 깊어지기도 했다.

많은 작품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밋밋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기도...

약간 고개를 갸웃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고도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호(好)’~!!

넘쳐나는 미디어에 살고 있는 요즘 여전히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들으며 꿈을 키웠던 시대를 살았던 나이기에, 책을 읽으며 머리와 가슴으로 그리며 더 많이 공감하고 교감의 행복이 더 좋아서라고 말할 수 있다.


『여름비 이야기』를 읽고 나서 알게 된 『가을비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P61

“한심하게도 지금은 내가 지은 시조차 거의 기억할 수 없는 지경이지.”

나오는 단어를 선택하면서 신중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나이를 먹으며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그렇게 되는 건 아니네. 난 아직 육십대야. 그런데 잘난척하면서 하이쿠를 해석하는 도중에 내가 한 말을 잊어버리다니. 아까 자네 어머니 시가 실린 잡지를 찾고 있었을 때도, 도중에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잊어버렸다네.” 그는 나오를 향해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에게는 이 세상이 밝은 낮이겠지. 하지만 난 캄캄한 어둠 속을, 손전등 하나만 들고 걷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네. 이 시의 작가와 똑같지. 오늘은 자네가 와준 덕분에 기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상태가 좋았는데, 결국 마각을 드러내고 말았군.”

“선생님…….”

나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P161

카페 안에 흐르던 <비로드의 달>이란 노래가 끝났다. 존 크로포드처럼 머리를 짧게 자를 여급이 축음기에 새 SP 레코드를 걸었다.

와타나베 하마코 (20세기 중반 일본의 대표적인 여가수)의 <잊으면 싫어요>란 노래다. 

“……결국 검은 나비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아.”

그러곤 요시타케가 입을 다물자 미쓰코는 흥미가 솟구친 것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너무너무 낭만적인 얘기에요. 그 검은 나비는 요시씨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