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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평점 :

‘하라 료’의 『안녕 긴 잠이여』의 사전지식이 하나도 없었다.
2013년에 출간되어 개정판으로 다시 만나게 됐다는 것 밖에는...
일본 작가들의 작품과 많이 만날 기회가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보다...
『안녕 긴 잠이여』는 ‘하드보일드’ 작품이라고 알고 있다.
‘하드보일드’가 무엇인지 갸우뚱하며 나무위키를 찾아봤다.
《문학 장르 혹은 스타일. 영어로 hard-boiled. 일본에서는 비정파(非情派)라고 번역한다. 비슷한 단어로 느와르가 있다.
원래는 '(달걀이) 완숙되는'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지만 '비정·냉혹'이라는 의미의 문학 용어로 변했다. 사전에서는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 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 비극적인 사건을 건조하고 진지한 분위기로 묘사하는 작품을 ‘하드보일드’라고 부른다. 자극적인 갈등, 감정 묘사가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나무위키 발췌-》
‘느와르’(Noir:범죄나 사회적 윤리에 반(反)하는 소재를 사용해 어두운 분위기를 부각시키는 작품군을 칭하는 장르) 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와자키’와 만났다.
혼자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는 사와자키는 400일의 은둔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온다.
오래전 발생한 여성의 죽음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너무나 기이하게 맡게 되고, 주변 인물들과 당시의 상황들을 알아보며 ‘자살’로 판명된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 시대의 정치나 권력 등 구조적 문제로 인해 은폐되고 사건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며 탐정으로서의 ‘사와자키’가 각성한다.
시크함을 넘어 너무나 차갑고 삭막하기까지 한 ‘사와자키’라는 인물이 은근한 매력으로 책을 읽으며 푹 빠지게 됐다.
고독해 보이고 냉철한 판단, 모든 상황을 다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와자키’의 발걸음에 나도 모르게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길게 늘이거나 꾸밈을 많이 넣지 않는 ‘하라 료’ 작가의 문체가 그의 성격을 더욱 잘 나타내고 빠지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은...
이야기의 결말까지 너무나 이해할 수 있는 문장력에 존경을 표한다.
많은 페이지 수에 실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술술 읽힌다.’라는 말이 찰떡같았던 『안녕 긴 잠이여』로 ‘사와자키 시리즈’를 더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게 됐다.
이번 책을 계기로 새로운 작가님과 작품을 만나게 되었는데 작가님이 이미 고인이 되셨다는 정보에 많은 아쉬움과 감사함을 말하고 싶다.
지금과는 다른 시간 속의 이야기이지만 그 시대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푹 빠져서 너무나 재미있게 읽게 되고, 늦었지만 작가님의 작품을 알게 되어 뿌듯한 마음마저 가득하다.
P11
겨울이 끝나갈 무렵,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거의 사백 일 만에 도쿄로 돌아왔다. 빗속을 아홉 시간 이상 쉬지 않고 달린 블루버드를 니시 신주쿠에 있는 사무실 주차장에 세우고, 편히 죽지 못한 시체처럼 뻣뻣한 몸으로 차에서 내렸다.
이슬비 내리는 밤의 귀환이지만 이 도시는 그런 감상에 젖기에 너무나도 비열했다. 잠가놓지 않는 우편함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니는 좁고 낡은 건물 계단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올라가 한낮에도 결코 햇빛이 들지 않는 2층 복도 안쪽 사무실에 이르자, 일 년 이상 떠나 있던 생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몸을 휩쌌다. 출입문에 페인트로 써놓은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라는 글자의 색이 문득 바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예전부터 그랬지만 그간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P390
“그런 타입의 젊은이는 당신처럼 꼼꼼하게 돌봐주는 나이든 남자와 친해지면 스스로 그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아. 그가 당신을 두고 떠났다는 건 머지않아 당신이 그를 두고 여기를 떠날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겠지.”
“그럴 리가.” 마스다가 묘하게 힘주어 부정했다.
내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방금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자기를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쪽에 넣으려고 했어. 그렇지만 당신은 사실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모르는 거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분류 방법을 들먹이며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 드는 게 아닌가. 진짜로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은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써가며 고민하지 않아. 그 노숙자처럼 위험한 곳이라고 느끼면 재빨리 몸을 피할 뿐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