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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이야기 ㅣ 비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초등학교 여름방학이면 시골 외갓집에 꼭 내려가곤 했다.
『여름비 이야기』는 고등학생이던 사촌 언니와 함께 잠을 자면서 언니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졸라대던 그때가 생각나게 해주었다.
제대로 볼 수 없으면서도 소리만으로, 느낌만으로 알 수 있는 공포감이 최고였던 ‘전설의 고향’을 좋아하던 꼬맹이였던 나는 사촌 언니의 무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던 그 시간을 기다리고 좋아했다.
요즘은 범죄와 관련된 여러 프로그램이 많이 있어서 지금도 여전히 재미있게 잘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일찍부터 만나게 되었고, 추리와 서스펜스, 공포가 가득한 소설을 많이 읽곤 한다.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알게 되면서 여러 작가의 많은 이야기를 읽으며 ‘홈즈’나 ‘포와르’가 나오는 것보다 더 공감하고 찾게 되는 것 같다.
‘기시 유스케’ 작가의 작품도 그렇게 만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에게 읽히거나 알려진 몇몇 책을 읽어보았다. (아직 만나지 못한 책들이 많이 있기는 하다)
『여름비 이야기』는 일단 표지부터 너무나 눈에 확 들어온다.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커다란 눈동자.
그 눈동자 주위의 얼굴은 실핏줄이 다 터져버린 듯 붉다.
무엇인가 기대하고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게 만드는데 충분한 시작이었다.
「5월의 어둠」, 「보쿠토 기담」, 「버섯」의 소제목으로 세 가지 이야기가 묶여있다.
‘하이쿠’ 시집의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스승을 찾게 된 제자와의 대화나 익숙하지는 않기에 오히려 주인공들이 찾고 있는 의미를 나도 함께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5월의 어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스님의 저주인지 염려인지 모를 경고를 받고 난 후 너무나도 기묘한 꿈(악몽)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나오는 「보쿠토 기담」의 꿈속 배경은 눈에 그려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이다.
앞마당에 버섯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집안까지 점령하며 자라나는 버섯들이 말도 안 되는 곳으로 번져가는 상황들에서 생각지 못하고 예상할 수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의 묘미를 주는 「버섯」.
손에 땀을 쥐게 하거나 긴장감과 박진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마지막 줄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놀라움으로 생각이 깊어지기도 했다.
많은 작품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밋밋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기도...
약간 고개를 갸웃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고도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호(好)’~!!
넘쳐나는 미디어에 살고 있는 요즘 여전히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들으며 꿈을 키웠던 시대를 살았던 나이기에, 책을 읽으며 머리와 가슴으로 그리며 더 많이 공감하고 교감의 행복이 더 좋아서라고 말할 수 있다.
『여름비 이야기』를 읽고 나서 알게 된 『가을비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P61
“한심하게도 지금은 내가 지은 시조차 거의 기억할 수 없는 지경이지.”
나오는 단어를 선택하면서 신중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나이를 먹으며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그렇게 되는 건 아니네. 난 아직 육십대야. 그런데 잘난척하면서 하이쿠를 해석하는 도중에 내가 한 말을 잊어버리다니. 아까 자네 어머니 시가 실린 잡지를 찾고 있었을 때도, 도중에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잊어버렸다네.” 그는 나오를 향해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에게는 이 세상이 밝은 낮이겠지. 하지만 난 캄캄한 어둠 속을, 손전등 하나만 들고 걷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네. 이 시의 작가와 똑같지. 오늘은 자네가 와준 덕분에 기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상태가 좋았는데, 결국 마각을 드러내고 말았군.”
“선생님…….”
나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P161
카페 안에 흐르던 <비로드의 달>이란 노래가 끝났다. 존 크로포드처럼 머리를 짧게 자를 여급이 축음기에 새 SP 레코드를 걸었다.
와타나베 하마코 (20세기 중반 일본의 대표적인 여가수)의 <잊으면 싫어요>란 노래다.
“……결국 검은 나비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아.”
그러곤 요시타케가 입을 다물자 미쓰코는 흥미가 솟구친 것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너무너무 낭만적인 얘기에요. 그 검은 나비는 요시씨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