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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9년 1월
평점 :
사람들은 더 이상 뭔가를 알기 위해
시간을 쓰지 않아. 그들은 가게에서 전부 만들어진 것들을 사지. 하지만
친구들을 파는 곳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친구를 가질 수 없어. 만약 네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이렴!
어린아이들부터 성인 모두
한, 두 번은 읽어보고, 인용한 내용을 들어보았을 생택쥐베리 <어린왕자>
고전 문학 중에서도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작품 중 하나이지만 간혹 출판사나 번역가의 해석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의 문구를 들어볼 때가 있다.
이건 <어린왕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한글소설이라도 읽는 독자에 따라 생각하는 의미가 달라지듯 번역가에 따라 소설의 내용이 흥미롭거나 지루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고전문학이나 해외소설을 읽을 때면 여러 출판사 중에서도 번역가의 이름을 눈여겨보게 된다.
아이들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보면 쉬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왕자>
역시 그에 해당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하다고 답할 것이다.
작품의 첫 장에는 '코끼리를 삼켜버린 보아뱀'을 모자라는 상징적인 물건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 때 상황을 설명하는 문장은 짧고 간단하다.
Pourquoi un chapeau ferait-il peur?
우리의 번역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자가 뭐가 무서워?"
「아니, 모자가 왜 무서워?」
우리가 번역서를 보면서 크게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한 문장만 떼어 놓고 보면 말끔히 잘된 번역 같은데 전체를 읽고 나면 뭐가
뭔지 명료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은 이런 부분들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글은 조사 하나로도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데 동사 시제의 경우라면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모자가 어째서 두렵게(peur) 할 거라는 거지?"
원서를 모르거나 번역본이
다양하지 않은 작품을 읽을 때는 그 해석이 맞다고 생각하며 읽을 수 밖에 없지만 가끔 정말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책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어휘력의
번역본은 책 속의 오묘한 세계에 빠져드는 맛을 없애버려 좀 더 다양한 번역본이 있었으면... 원서를
더 잘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물론 작가의 문장 그대로를 반영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원래의 느낌 그대로를 생생하게 읽고 싶다는 것이 욕심인 것일까?
<어린왕자>는 신비스러운 배경 속 명언과 같은 문체로 많은 번역본이 나와있고, 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볼 수 있지만 한글소설로 나온 고전문학, 명작이라고 칭찬하는 작품들은 아직도 번역의
늪에서 어려워서 고전문학인가? 명작은 원래 이렇게 읽기 어려운 것인가?
높은 벽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정서 작가이자 번역가의 작품은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 혹은 학계에 새로운 충격과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85학번 영수를 아시나요?> 이전에 번역가로 좀 더 친근한 이정서 작가는 이번 작품 이 전에
<이방인>, <위대한 개츠비>,
<노인과 바다>의 기존 번역 속 오역과 표절 등을 지적하며 이슈가 되기도 했다.
간혹 원서를 읽고 번역본을
읽은 사람들이 "두 작품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말할 때가 있는데 이 점은 번역을 하는 방법에서 문제가 있다고들 한다. 단어의 의미만을 해석해서 새로운 문장을 만들거나 할 때에는 특히나 이런 오류가 많이 생겨난다.
반면 이정서 작가는 기존의
작품 속 서술구조를 지켜가며 시간 개념과 존칭 개념을 바로 잡아 독자들이 헷갈려하던 부분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영어 뿐만
아니라 불어까지 번역을 통해 이번 <어린왕자>의
작품을 완성한 터라 책의 퀄리티는 더욱 상승한 느낌
이왕이면 그동안 독서장르의
꼭대기에서 좋은 작품인데 좋게 읽히지 못했던 고전작품들에게 번역의 생명을 더욱 더 불어 넣어주셨음 하는 바람이다.
<어린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는 작품만의 신비한 삽화와 불어(생텍쥐페리는 프랑스 작가이다.), 영역(생텍쥐페리가 미국에 머무는동안 같이 작업한 것으로 알려진
캐서린 우즈의 역본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작품이다.)을 Note 페이지에서
동시에 비교해가며 한글로 가장 알맞는 뜻을 전할 수있도록 설명하고 있는데
단순히 번역된 문장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역이 생기게 된 이유, 이 문장이 이렇게 해석되어야 하는 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어 작품을 분석하며 독서하는 재미가 더해져있다.
사실 Note만 있었다면 어려웠을 것도 같은데 사이사이 어릴 때 읽던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 받을 수 있는 삽화 덕분에
아 이 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지 추억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에는 높임말과 낮음말을 사용하는 차이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어릴 때 읽었던 책이나 기존의 대표적인
번역서는 낮춤말로 번역을 하는 반면 이정서 작가가 번역한 <어린왕자>는
생텍쥐페리가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헌사를 고려해 높임말로 전달을 하고 있어 무언가 내가 어른이 되어 존중받는 느낌으로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놀라운 것은 생텍쥐베리의
헌정사 자체가 높임말로 어린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음에도 기존의 번역본에서는 낮춤말로 전달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작가가 어른과 아이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왜 낮춤말로 번역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어른이 어린왕자에게 바오밥나무가 무엇인지 얼마나 큰지 설명하는 부분인데 원래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교훈이나 감동이 사라져버린 부분을 접하게
된 것이다.
C'est next! Mais pourquoi veux-tu que tes mountons mangent les petits
baobabs?
"그렇구나! 하지먼 너는 왜 양이 작은 바오바브나무를 먹길 원하니?"
Ben! Voyons!
"아이참,
생각해 봐!"
<기존 번역서 중에서>
"커다란 바오밥나무도 자라기 전에 조그맣게
돋나아지?"
"그렇긴 하지. 하지만 왜 양아 작은 바오밥나무를 먹겠어?"
<어린왕자>로 보는 번역의 세계 중
사실 이 장면은 바오바브나무의
크기를 모르는 어린왕자에게 그 크기를 설명하는 장면이 아니라 거대한 나무도 작은 떨기나무로 시작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일깨워 주기 위한 장면으로 (어른도 원래는 작은 아이였다는 작품의 주제를 언급한 것이다.) 어른인
나는 보통 어른과 달라서 자신이 아이에게 한 수 배운 것을 인정한다는 'C'est exact!(그렇구나!)' 말을 하는 반면
영역이나 기존 번역에서는
아이에게 한 수 배웠다는 내용이 아닌 아이의 생각을 무시하는듯한 표현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물론 무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책에서는 아이에게 배웠음을 인정할 수 없는 어른의 고집이라고 한다) 번역가의 가치관이 반영됨으로써 하나의 대화가 다른 교훈과 의미를 전달한다는게 놀라울수 밖에 없던 것이다.
만약 내가 불어를 잘한다거나
새로운 번역이 없었다면 책에서 주는 교훈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었다 생각하면 아쉽기만하다.
번역의 세계를 통해서
오역을 비판하기 보다는 원래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와 교훈을 전달하고자 함은 알지만 이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은 <어린 왕자> 속 대화를 또 어떤 가치관이 반영 된 이야기고
듣게 될지 자꾸만 아쉬움이 남는다. 이정서 번역가의 새로운 번역으로 많은 작품들이 문장 그 자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고전문학에는 기존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도전이 계속되길 바라볼 뿐이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문장이 그렇습니다. 번역이라고 해서, 번역이니까, 역자 임의로 그때그때 다르게 옮긴다면, 절대로 작가가 쓰고자 했던 의미를 전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원칙 없는 번역이 여떤 결과를 낳는지 보십시오.
어떤 위대한 번역가라고 해도 작가가
쓴 문장보다 좋은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어떤 위대한 학자라 해도 작가가
쓴 문장보다 나은 의미를 담은 문장을 창작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번역은 그야말로 작가가 쓴 의미를
찾아가는 고된 노동인 것입니다.
반면 작가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전세계 언어들로 자신의 글을 고스란히 전달한다는 것에도 한계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작가와 독자 사이에 책 속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번역가라고 생각된다. 그
노동에는 작가의 감사함과 독자의 고마움, 그리고 창작의 언어를 전달한 보람도 존재하지 않을까 짐작해보며
그들의 노고 자체에 감사할 뿐이다. 다만 이정서작가의 이야기처럼 작가가 생명을 불어 만든 작품을 좀
더 잘 전달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존칭이 없는 영어권의
특징까지 생각해본다면 개인적으로 <어린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를
한 번씩, 음.. 몇 장면이라도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존칭을 사용해 전달하는 느낌은 신비로움에 생텍쥐페리의 헌사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새로운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무엇이 헌사일까? 아이들을 위한 동화인가 생각했던 어린시절은 이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