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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겉으로 보기에는 부유하고 다정한 부모님
밑에서 성장하는 성적 좋고 올바르게 자란 아이들처럼 보이는 집안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난한 국가 속에서 부유하게 사는 평범한 집안처럼 보이지만 집안으로
들어오면 가부장적 집안의 독재자,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는 악의 존재에 불과하다.
<보라색 히비스커스> 속 작은 발버둥은 개인의 살고자 하는 작은 몸짓일 수 있지만 이 것들이 모여 세상의 모습이 변화하듯 실패
역시 쌓여 정답에 가까운 길에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 보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경악하고, 결론적으로는 성공했다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폭력 속에 벗어난
것만으로도 주인공인 행복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이런 모습들 속에서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희망과
더불어 좀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생각들이 합쳐져 훗날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자리에 그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에서도 엄격한 가톨릭 교리와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가는 '캄빌리'는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다정한
아버지와 현모양처인 어머니, 착한 오빠 밑에 성장하는 공부 잘하는 착한 딸 '캄빌리'로 보인다.
<앰네스티 월드>에서 인권상을 수여했을 정도로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종교에 헌신하고, 종교에서는
그런 아버지를 좋은 사람으로 설교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이야기 한다. 심지어 교회의 베네딕트 신부가 설교를
할 때 교황님, 우리 아버지, 예수님 순서대로 언급했다고
한다.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드높이고 진실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사람,
베드로 성금과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기부금을 가장 많이 낸 사람, 영성체 포도주 값을
지불하거나 성체 굽는 수녀원에 새 오븐을 여러대 들여놔 주고, 새 병동을 지어주는 아버지는 그 어떤
칭찬에도 의기양양함을 들어내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더욱 칭찬하였고, 믿었다.
그러나 설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자신의 행동을 종교와 자본주의에 합리화 하며 폭력과 폭언을 서스름치 않는 가정폭력범이었다. 신부님이
입을 만져서 구역질 난다는 오빠의 이야기에도 주님의 몸이라며 죽겠다는 아들의 말을 듣지 않고 경본을 아들을 향해 던지거는 기본이며 남들과 이야기
할 때는 교양인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
심기를 거스르거나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아내와 자식들은 폭력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 좋은 집에서 좋은 것을 먹으며 살면서도 오로지 한 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만
한다. 아내의 배를 때려 유산을 시킨 경험도, 1등을 놓친
것만으로 아들의 손가락을 망가뜨리고, 하교시간이 몇 분 늦은 어린 딸의 뺨을 손바닥 자국이 날 정도로
때리는 건 빈번한 폭력의 행위일 뿐이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아무도 아버지의 행동을
막을 수 없고 폭력에 적응되어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 생각할 뿐, 오빠의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이러는건지 생각하기보다 집이 풍비박산 나기 시작했다 표현하는 부분이다. 주님의
몸을 받는 대신 죽음을 택하겠다는 오빠를 아들을 보았을 때 궁금한 것이 전혀 없었을까...?
은수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은수카에서 시작됐다. 이페오마 고모의
은수카 집 베란다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 침묵을 밀어 내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하지만 내 기억은
은수카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 전, 우리 앞마당의 모든
히비스커스꽃이 눈부시게 선명한 빨간색이었을 때에서 시작되었다.
P.27
아버지는 말을 할
때 뒤로 기대서 위를 올려다보길 좋아했다. 마치 공중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나는 아버지의 입술에, 그 움직임에 집중했고, 때로는 무아지경에 빠졌으며, 때로는 영원히 그대로 있고 싶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아버지가 하는 중요한 얘기에 귀 기울이면서. 그것은 아버지가 미소 지을 때, 아버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빛나는
속살을 가진 코코넛처럼 활짝 벌어질 때 느껴지는 기분과 똑같았다.
P.38
폭력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사님이 데려다 주는 부유한 집안의 학생이지만 속으로는 교복 세탁에 시간이 정해져 있고 일과표에
아버지의 펜이 닿지 않는 부분이 없는 남매 그저 새로운 것을 접해본 적이 없을 때 '캄빌라'는 아버지의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린 소년, 소녀들이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기 바빴다. 그
사이 어머니는 뱃 속에 있던 아이를 잃고 아이의 성적은 떨어지고, 2등으로 떨어진 자신의 성적을 실패로
더럽혀졌다 표현하며 교실에서 몇 분더 남아있지 못하는 소녀는 친구들에게 공부 잘하는 재수탱이로 따돌림 당할 뿐이었다. 아버지에게 맞고 싶지 않아 달릴 뿐인데 달리기가 좋다고 거짓말 하는 이 작은 소녀를 어떻게 해야할까
"이페디오라가 오빠
면전에 대고 자기 생각을 말했기 때문이에요. 이페디오라는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죠. 하지만 오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진실에 대해서는 꼭 싸우려 들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죽어 가고 있어요, 알겠어요? 죽어 간다고요. 노인네가 사실 날이 얼마나 남았겠어요, 그보? 그런데 오빠는 아버지를 이 집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드리러 가지도 않죠.
오 조카! 오빠는 하느님 행세를 그만둬야 해요. 하느님은
다 큰 어른이니까 당신 일은 당신이 하실 수 있어요. 아버지가 조상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하실 거라면 오빠가 아니라 하느님이 벌하시게 놔두란 말이에요."
P.124
폭력을 휘두르고 종교로 정당화하고, 눈물로 사죄하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사랑했을 것이라 말할 것이다. 사랑하는 모습이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본인을 신적인 존재로
숭배받을 수 있도록 만들려 했던건지, 왜이렇게 자식과 아내를 폭력 속에 잔인하게 다루었어야만 했는지는
책을 다시 읽어보아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페오마 고모가 일하고 생활하는 은수카에
가서 캄빌리와 오빠는 자신들이 다른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한다고 죄악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한 켠에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계속 갈등한다. 결말은 비극적이다. 이 가정이 계속되었다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가정폭력의 범죄에 노출되었을 것이지만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끝은 성공이라 하기엔 초라하고, 실패라 하기엔 비극적이지 않다.
마음은 같은데 종교적 차이 때문에 멀어진
아버지와 아들, 그러나 가부장적인 생각 속 여성에 대한 인권은 동일한 부자의 모습은 성장소설이라는 <보라색 히비스커스> 속에서 여성에 대한 한계점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툭 던지고 있다.
가치관의 차이로 서로 보지 않는 부자임에도 여성은 바지를 입어서는
안된다. 남편이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동일하게 하는 부자는 과연 무엇이 얼만큼 다르기에 서로
보지 않을 정도였을까? 페미니즘 작가로써 이야기하던 부분이 소설 속에서 언급되니 가부장적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있던 것은 인권 뿐만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소설은 고구마를 먹은 듯하게 답답한 현실이
계속되지만 그래도 끝은 희망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몰입하며 읽게 된다. 비록 생각했던 결말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글은 여기서 끝났어도 이들의 삶은 더욱 더 희망차게 진행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