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수유병집 - 글밭의 이삭줍기 정민 산문집 1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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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9 <체수유병집(정민 지음/김영사)>

글밭의 이삭줍기

섬광 같은 사유, 내면 깊은 성찰 고전학자 정민 교수의 산문집

 

인문학이 바람을 일으키며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에도 우리의 고전에 대한 관심은 한문 해석의 어려움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우리의 손길을 끄는 책들도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만큼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책들이 많아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정민 선생님의 글을 읽고, 글의 깊이와 폭이 거대한 강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던 고전에 대한 아름다움과 묵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문을 통해 저자가 책을 펴낸 목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서문 또한 명문이다.

체수는 낙수요, ‘유병은 논바닥에 남은 벼이삭이다. 나락줍기의 뜻이다. 추수 끝난 들판에 여기저기 떨군 볏단과 흘린 이삭이 남았다. 책 제목 체수유병집은 이 구절에서 따왔다. 지난 10여 년간 요청에 따라 쓴 글들을 모았다. 한 편의 글마다 그 시절의 표정과 한때의 생각이 담겨 있다.

다산은 보름에 한 번은 책상을 정리하라고 했고, 연암은 젊은 날에 쓴 메모 쪽지를 냇물에 흘려 지웠다. 이제껏 하고 싶은 공부 실컷하며 즐겁게 지냈다. 문득 돌아보니 책상은 엉망이고, 책꽂이는 정신이 없다. 한 번씩 치우고 버리고 정돈해야 정신이 든다. 글을 한자리에 모아 묶는 것에는 이 뜻도 있다. 그때그때 쓴 글이지만 모으고 보니, 평소에 못 느끼던 흐름이 얼핏 보인다. / 서문

 

1문화의 안목은 삶의 단상과 문화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책만 책이 아니다. 독서는 문자를 빠져나와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읽을 때 가장 위력적이다. 삶의 행간을 읽고, 드러나지 않는 질서를 읽을 때 독서는 비로소 완성의 단계에 진입한다. 남들이 같이 보면서도 못 보는 것들이 내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제까지 아무 의미도 없던 것들이 내 삶 속으로 걸어들어와 간섭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독서는 사실 이 단계에 진입하기 위한 연습 과정일 뿐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해서, 더 툭 트인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 평생 독서의 지침이요, 목표다. / 섬광처럼 번쩍이는 순간

이용휴는 <당헌일기>에서 다만 눈앞의 오늘이 있을 뿐 어제나 내일에 눈 돌릴 여가는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오늘 공부하지 않으면 하루를 헛산 것이라 공일空日이라고 썼다. 이덕무는 오늘이 쌓여 고금이 될 뿐이니 내일이 오늘이 되고 오늘은 어제로 밀려나는 이 사흘의 누적 속에 인생과 고금이 놓여 있다고 단언했다. 나는 오늘의 힘을 믿는다. 이 순간의 중요성을 신뢰한다. 지금 성실치 않고 오늘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어제만 돌아보거나 내일을 꿈꾸지 않기를 늘 다짐하곤 한다. / 공부하지 않은 날은 살지 않은 것과 같다

할 말 못하는 아비, 들을 말 못 듣고 자란 자식들 위에 사회의 구조악까지 얹혀지고 보니 세상에 풍파 잘 날이 없다. 굽실대던 낮은 처지를 벗어나 조금 지위를 갖게 되면 금세 아랫사람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한다. 제가 그의 처지일 때 생각은 간 데가 없다. 오히려 한술 더 뜬다. 마침내 광망하게 굴다가 나락에 떨어지고 나서도 제 탓할 생각은 없고 세상 원망만 한다. 가정교육의 부재가 승자독식의 사회구조와 만나 빚어낸 슬픈 풍경이다. / 빛 없는 그늘

남과 기쁘게 나누고 즐거이 베풀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제 이익을 위해 남을 헤코지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망치는 사람이다. 남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지만 결국 그가 찍는 것은 제 발등이다.

내가 소중해서 남을 아낀다. 이때 나와 남은 우리가 된다. 내가 소중해서 남을 해친다. 그래서 세상은 지옥이 된다. 나에 대한 사랑이 남을 향한 사랑으로 확산되고,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어 우리가 되는 삶, 이것이 나눔의 참된 정신이다. / 스스로를 아끼는 사람

 

2연암과 다산은 저자가 사랑하는 두 지성에 대해 가볍게 쓴 글을 모았다.

연암은 사유의 힘으로 사람을 압도하고, 다산은 방법의 사유로 문제를 풀어준다.

연암집의 수많은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을 옥죄고 있던 시대의 질곡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우리는 왜 지금 여기를 살면서 그때 저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이 될 수 있으려면, 옛것을 그대로 흉내만 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오히려 지금 눈앞의 현실, 가슴속의 진실을 글에 담을 때 훗날에는 그것이 고전이 된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지만, 당시로서는 꺼내기가 쉽지 않은 말이었다.

색깔 속에는 빛깔이 있다. 속에는 태가 있다. 색깔은 누구나 보지만 빛깔은 보는 사람만 본다. 외형은 다 알지만 그 속에 깃든 태깔은 아무나 볼 수 없다. 겉껍데기만 비슷한 것은 진짜가 아니다. 외형外形에 속지 말고 내태內態를 보아야 한다. 색깔에 현혹되지 말고 빛깔을 읽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는 겉모습에 있지 않고 그 속에 감춰진 빛깔과 태깔에 있다. 겉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 연암이 <능양집서 陵陽集序>에서 한 말이다. / 연암, 금기를 뛰어넘는 문체의 불온성

고전은 시간의 손길을 타지 않는다. 열하일기속의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어떤 삶이 바른가? 어느 길로 가야 하나? 세상은 무엇으로 돌아가는가? 바른 판단은 가능한가? 정의는 과연 정의로운가? 도처에서 그가 불쑥불쑥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생생하고, 현장은 그에 맞춰 시간의 흐름마저 딱 멈춘 듯하다. 내 생각에 그는 아직도 베이징의 어느 뒷골목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슬렁거릴 것만 같다. /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그는 도처에서 청의 앞선 문물을 배워와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주장을 반복했다. 목청을 내세워서 배우자고 주장한 이용후생의 강조는 오히려 자신의 핵심 주장에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려놓기 위한 물타기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면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정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뭘까? 문제의 불온성은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사유의 불온성과 관련이 있다. 문체는 그 불온성을 발화의 영역으로 끌어내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연암은 한 차례 중국 여행에서 우물 안 개구리의 구태를 활짝 벗어던졌다. 그는 다시 우물 안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여행 전의 그가 아니었다. 엄마 배 속에서 바깥세상을 그려보는 것과, 마침내 태를 벗어나 사지를 쭉 뻗어 으앙, 시원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의미는 외형이 아닌 내태에서 나온다. 얼마짜리 옷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입어서 맵시가 나느냐가 더 중요하다. 태깔이 나야 값이 있지, 값만 비싼 것은 소용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슨 상표와 얼마짜리에 더 연연한다. 연암의 열하일기에는 돌아오는 노정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다. 그는 북경까지 간 이야기만 적고 오는 길에서 일어난 일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북경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만 같다. 아직 찾아야 할 것이 있고, 가야할 길이 남아서다. / 열하일기의 인문정신

천연두 관련 정보를 정리한 마과회통, 속담을 분류한 이담속찬, 목민관의 행동지침을 갈래지은 목민심서등 그의 모든 작업은 항상 핵심 가치 파악, 자료 분석, 목차 정리, 카드 작업, 정보의 재배치 순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정리된 자료는 일목요연해서, 언제나 누구든 필요한 정보를 꺼내 유용하게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산의 경쟁력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 다산의 지식경영, 생각이 경쟁력이다.

다산의 단계별 교육으로 최적화된 로드맵을 제시해 학습 요령과 우선순위를 익히게 했다. 전공별 교육으로 적성을 살려주고, 맞춤형 교육에서 개성을 북돋워 학습동기를 유발했다. 이어 실전형 교육으로 방법론을 터득케 하고, 집체형 교육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이런 맵짠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스승의 상경 후에도 스승을 도와 작업에 참여했고, 나중에는 저마다 역량을 갗춘 문인·학자로 성장해서 중앙 문단과 학계에까지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 다산의 제자 교육법

<다산의 제자교육법> https://blog.naver.com/jaytee0514/221293842246

힘센 생각은 메모에서 나온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 생각은 금세 달아난다.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적어라. 위대한 천재들의 놀라운 성취 속에는 언제나 예외 없이 메모의 습관이 있었다. / 최고의 메모광 다산 정약용

 

3옛 뜻 새 정은 옛일로 지금을 비춰본 짧은 글 모음이다.

그의 이름 원효元曉는 신라말로는 시단始旦, 새 아침또는 첫새벽이라는 뜻이라고 삼국유사는 적고 있다. ‘부처님 땅[佛地村]’에 새털처럼 가볍게 새벽 스님이 태어나 그곳에 처음 열린 절初開寺‘]을 세웠다. 그리고 그 빛이 중국, 일본 등 동양 삼국에 찬연히 빛났다. 인도와 중국의 고승들도 해결 못한 난제를 국내파인 새벽스님이 단번에 격파해버렸다. 통쾌하지 않은가? / 새벽 스님

같이 중국에 갔는데, 한 사람은 돌이나 수선화 뿌리를 사오고, 한 사람을 목화씨 앗는 기계를 구해왔다. 그 해맑은 운치가 귀하고, 값비싼 비단만 잔뜩 사온 것보다야 낫다 해도, 목화씨 앗는 기계가 가져온 이용후생의 보람에 견줄 수야 없겠다. / 박면교거

 

4맥락을 찾아서는 변화의 시대, 인문학의 쓸모와 공부의 방법에 대해 쓴 글들이다.

인문학의 갑작스런 활기에 고무될 일이 아니다. 죽을 쑤고 있는 것보다는 낫겟지만, 이것이 취업과 사회활동 영역의 확장으로 이어질 것이란 핑크빛 전망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딱히 인문학에 대해 바라는 것이 무언지조차 잘 모른다. 그래서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다.

인문학은 원리이지 당장 실용 가능한 메뉴얼이 아니다. 사업 잘하려면 시부터 배우란 말이 아니다. 인문학이 담당하는 것은 식견과 통찰력, 다산 식으로 말하면 문심혜두다. 글로 사물의 마음과 만나면 슬기 구명이 뻥뻥 뚫린다는 얘기다. / 질문의 경로를 바꿔라

고전이란 과거로부터 누적되어 쌓인 삶의 지혜다. 과거는 오래된 미래. 지나간 시간 속에 현재의 문제가 있고, 미래의 해답이 있다. 과거로부터 차곡차곡 누적되어온 삶의 지혜가 그대로 이전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가 고전을 공부하는 까닭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옛것에서 배울 것은 본질이지 현상이 아니다. 정신의 원리이지 삶의 형식이 아니다. 형식은 달라도 본질은 같은 것이 진짜다. 겉보기는 똑같은데 알맹이가 다른 것은 가짜다. 옛사람은 이것을 상동구이라고 했다. ‘같음을 지향하되 다름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같음을 지향한다는 말은 그 정신의 원리를 두고 하는 말이고, 다름을 추구한다는 말은 그 형식의 새로움을 일컫는 말이다.

고전은 현재와 소통할 때만 가치가 있다. 형식에 집착해서 본질을 놓치면 아무런 보람이 없게 된다. 고전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옛것을 끌어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다. 이런 것을 통변通變이라고 한다.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사물은 오래되면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변하면 다시 통한다. 통해야만 오래갈 수가 있다. / 변치 않으려면 변해야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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