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의 오해
키이쓰 E. 스타노비치 지음, 신현정 옮김 / 혜안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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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의 규칙 : 사이비과학을 경계하라

 

사람들은 심리학에게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조작주의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심리학이 종교나 철학이 아닌 과학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조작적 정의는 측정할 수 있는 관찰가능한 조작에 근거하여 진술된 개념의 정의다. 그것은 과학지식을 공개적으로 검증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중요한 기제다. 어떠한 이론도 반증할 수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면 그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된 확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임상경험이나 사례연구가 이론의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 있다. 가짜약 효과가 이러한 증언들을 신빙성 없게 만든다. 통제된 관찰을 통한 증거만이 주장을 실제로 검증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매체 심리학의 영역에서는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두 변인 사이에 상관이 존재하더라도 그 관계가 반드시 인과적 연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결과는 두 변인과 관련되어 있지만 측정되지 않은 제3변인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두 변인이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변인 A와 변인 B의 상관관계가 A에서의 변화가 B에서의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라고 성급하게 결론내리기 전에, 인과관계의 방향은 B에서 A로 가는 반대방향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선택편향은 행동과학에서 많이 나타나는 사이비상관의 원인이 된다. 즉,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에 행동적 특성과 환경변인들 사이에 상관관계를 만들어 내게 된다.

 

실험통제의 원리: 처치와 결과>>

인간의 물리적 현상에 대한 직관은 부정확하다. 그렇다면 인간행동이라는 보다 복잡한 영역에 대한 우리의 통속이론 역시 정확하다고 믿을 수 없다. 과학자들은 한 현상에 대한 특정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조건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는 원인이라고 가정한 변인에 처치를 가하고(다른 모든 것들은 일정하게 유지한다) 결과라고 가정한 변인에 나타나는 효과를 관찰한다. 이것의 훌륭한 예를 경이로운 말 클레버 한스와 자폐아의 촉진적 의사소통의 검증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응용연구와 기초연구>>

응용연구는 결과를 자연 상황에 직접적으로 대응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연구이다. 여기에서는 표집의 무선성 그리고 연구조건의 대표성이라는 문제가 중요하다. 기초연구에서는 이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이론검증을 위한 기초연구에서는 인위적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심리학 연구는 기초연구이다. 따라서 심리학 연구는 “실제 삶과 같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소비자의 규칙 : 연계성 원리의 위반에 유념하라

‘획기적 돌파구’ 모형 vs. ‘점진적 종합’ 모형 : 연계성 원리>>

 

단 하나의 결정적 실험이나 통찰에 의해서 과학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과거의 모든 지식을 뒤엎어 버림에 의해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오해이다. 예술과 다르게  과학에서는 연계성 원리를 준수한다. 과학에서 새로운 이론은 이전에 확립된 경험적 사실들과 접합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과학의 위대한 도약으로 보는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연계성 원리를 위반하지 않는다. 과학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모든 사람은 선임자들의 연구에 의존한다. 과학은 한 사람의 생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수천 사람의 결합된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혁명적이고 근본적인 진보로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이 지배하는 과학은 틀림없이 사이비과학이다.

 

 인간행동에 관련된 문제가 엄청나게 복잡하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심리학 실험이 상당히 모호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이라는 과학이 존재하고 진보하고 있으며, 그 진보는 느리고 우리의 결론은 때때로 괴로우리만치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의 종합과 논쟁을 거친 후에라야 비로소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획기적 돌파구’라는 대중매체의 주장은 항상 회의를 불러일으키는데, 특히 심리학적 주장에서 그렇다. (253)

 

인간 인지의 아킬레스건: 확률적 추리>>

 이미지의 생생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단일 사례에 압도되어 판단이 흐려져 무가치한 증거를 신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법칙의 확률적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나도 자주 사람들은 확률적 경향성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단일 사례들을 인용한다. 게다가 인지적 착시, 조건확률의 전도(B가 주어졌을 때 A의 확률이 A가 주어졌을 때 B의 확률과 같은 것처럼 행동), 표집크기 정보 사용의 실패(보다 큰 표집이 전집의 모수치를 보다 정확하게 추정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함), 노름꾼의 오류(실제로 독립적인 사건들 간에 연계를 찾으려는 경향성) 등으로 인해 확률적 사고에 어려움을 겪는다.

 

심리학에서 우연의 역할>>

사람들은 순전히 우연으로 일어난 일에 어떤 구조가 있는 것으로 믿고 설명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착각상관(아무 패턴도 없는데 어떤 패턴을 보려 하는 것)에 의해 일어난다. 로르샤 검사에 대한 믿음은 착각상관 현상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다. 임상가들이 어떤 관계를 보게 되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관계가 그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관찰하고 있는 반응패턴 속에 그러한 관계가 실제로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329) 우연을 설명하려는 경향성에 내재한 또 하나의 현상은 통제착각(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결과에 개인적 수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다. 복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직접 참여방식의 복권은 통제착각을 이용한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각자가 받을 자격이 있는 만큼 받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공정한 세상 가설)

때로 좀더 정확한 예측을 위해 오류를 용인하는 것은 그 정확성에 오히려 기여한다. 집단통계적 예측과 임상적 예측은 이점에서 반대적인 특징을 지닌다. 어떤 임상가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집단통계적 예측보다 더 나은 진단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모든 연구에서는 집단통계적 예측이 더 정확하다는 결과의 일관성을 보인다. 복잡다단한 인간에 대한 장황하고 독특한 설명은 오히려 보다 일상적 사례에 대한 예측 정확도를 상실한다. 심리학에 있어서 경험에 의한 개인의 ‘임상적 통찰’이나 직관은 더 많은 실수를 야기할 소지를 갖는 것이다. 그것들이 새로운 연구를 위한 출발점이 되기도 하지만, 행동을 예측하는데 있어서 통계적 정보를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어느 정도의 정확도를 가지고 인간행동을 예측하려면 흔히 오류를 감소시키기 위한 오류의 용인이 수반되어야 한다. 즉, 보편원리에 의존하여 보다 우수한 예측을 하게 되지만 동시에 모든 단일 사례에서 정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345)

 

이중고난의 과학

텔레파시, 천리안, 염력, 미래예언력, 바이오리듬, 점성학, 심령 치료 등등의 책들은 심리학을 가장한 것들이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현대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아니다. 초감각지각을 실행가능한 주제로 간주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유익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어 가거나 아니면 반복가능하지 않고 흥미를 끌지 못하는 관찰을 내놓는 영역은 탈락하고 만다. 아이디어와 연구방법의 이러한 자연도태야말로 과학을 진리에 접근하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다. (364)

 

그러나 심리학이 주장을 판단할 만한 과학적 기제가 없는 분야라는 가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심리학이 이러한 사이비과학과 연관되어 있는 분야라고 간주하게 만든다.

통제된 실험연구에 근거하지 않고 개인적 경험이나 소수의 사례에 의존한 자조적 문헌(self-help literature)들은 대중에게 심리학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심는 데 크게 일조하는 것들이다. 흥미와 상업성만을 고려하여 출판된 이러한 저서들은 심리학이 이러한 데이터베이스에 의존한다고 암시함으로써 일반대중을 오도하고, 심리학 연구자들이 처방전 지식을 추구한다는 오해를 갖게 한다. 실제로 전체적인 심리학 연구는 인간행동에 대한 보편적 사실과 이론을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기초연구다.(371)

 대중매체 심리학자들은 대부분 심리학자 축에 끼지도 못하는 이들이다.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심리학적 정보들은 증명, 진리, 증거, 논리, 정당화, 데이터 등과 절대적으로 관련이 없는 놀이감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어떤 측면보다도 인간과 관련된 물음에 대한 답을 훨씬 간절하게 원한다.(376) 따라서 심리학자들이 견지하는 과학적으로 정당한 보수주의의 태도가 이와 직면할 때 문제가 유발된다. 대중과의 진공상태 속에 자조적 선각자들과 염력 사기꾼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심리학 분야의 독특한 측면은 행동연구에 과학적 방법이라는 수단을 끌어들인 것이다. 반면 심리학 연구는 ‘사람을 읽어내는 데’ 어느 것이든 특별한 ‘직관적’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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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여성 여성신학 시리즈 2
앨버라 미켈슨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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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리더쉽에 있어서의 주도권을 가지도록 의도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열등한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가 경험해 온 고난과 압박의 역사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65) 남자들은 지도자적 역할에 있어서 좀더 강점을 가지고, 여자는 사회의 감성적인 자원을 지키는 역할에 좀더 뛰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진실로 규명된다고 하여, 왜 이 진실이 그 때문에 악한 주장으로 취급되어야만 하는가? (66)

 

 

창조의 질서가 계급주의의 기원이라고 주장될 경우 그것은 타락의 결과로 오해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이해함에 있어서의 기반으로 창조의 이야기를 이해한다. 우리는 구원을 각 개인을 위한 은혜의 역사로 그리고 그 은혜의 역사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 창조 시의 상호성을 회복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356)

 

 

나는 클라크 피노크가 주장하는 바-영적인 동등함, 여자의 자유로운 사역,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상호 복종과 존중을 신학화해야 한다고 하는-는 내가 말하는 질서의 틀을 유지하는 한도 안에서 그 틀을 무시하거나 넘어서지(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이다) 않는 한도 안에서 지지한다. (35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창조를 시작하셨으며 그 안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의 역사로 성격지어지는 그 동안의 역사 속에 이루어졌던 성별간의 적대, 남성이 여성을 복종시키려 했으며 여성을 열등하게 취급했던 그 적대. 여자들은 그 안에서 은밀한 원한을 쌓아가야 했던 그 적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9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남자와 동등하다. 그리고 또한 여자는 파생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이다. …”유대인들의 통념에서 창조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의 그들의 인간론에 특정한 핵심적 관점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88)

 

 

 

창세기 3장에 처음으로 명백하게 여성의 종속에 관한 개념이 나타난다. 여자 위에 군림하는 남자의 지배가 여자가 받은 벌이었다. 창세기 저자에 의하면 여자의 종속은 남녀간의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마치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세계간의 대립, 땅 이의 가시와 엉겅퀴 그리고 잉태하는 고통들이 모두 하나님의 의도하신 이상적인 창조의 상태가 아닌 것과 같다.(111) (마르틴 루터의 주장)

 

 

3-4세기의 유대의 작가들이 인류의 타락과 죄성에 대하여 여자 편에 더 책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영향을 미친 환경이나 가르침들에 관하여는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 이들의 글들이 유대교에서 여자를 경시하는 풍조를 제공하였고, 신약은 때로 그러한 개념과 싸우며 때로 가끔은 그러한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99)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신성의 위격 안에 그리고 창조에 계층적 질서가 있다고 말한다. (95)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생명의 원천이며, 교회의 꼭대기이고 왕관이며, 교회의 승천의 기원자이고 완성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123)

 

미켈슨 부부는 케팔레의의미를 영어에서의 머리나 권위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잘못 해석하여 교회가 바울의 본래 의도와는 동떨어지게, 남자의 여자를 지배하는 권위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라 가르쳐 왔던 것이라고 말한다. 케팔레의 머리는 몸의 다른 지체 위해 군림하는 권위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심장을 육신을 지배하는 감정과 영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권위라는 개념은 헬라적 사고 방식에 있어서 ‘머리’라는 단어와 관련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머리는 ‘지도자’이기 보다는 육신의 머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된다는 것이 성장의 원천이며 자양분을 공급한다는 의미로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역시 권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남자가 여자의 생명의 원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이 특별히 지적하여 성부께서 그리스도의 머리라 말하지 않고 단순하게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머리라고 한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성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점을 볼 때 ‘머리’가 원천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머리’가 ‘권위’라는 해석 아래에서는, 에스틴(estin)동사의 현재형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지금 현재나 부활 이후의 승천하신 이후에나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게 됨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순종적인 기독론이라는 이름으로 전 교회사를 통하여 정죄받아 온 주장이었다. 아리안주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기 “머리는 권위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즐겨 사용하였다. (148)

 

 논자는 본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처럼 남편들은 아내의 생명의 원천이므로, 그들의 생명을 아내를 위하여 내어주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권고의 의미라고 결론을 맺는다.

 

 

 

 

 

종들의-그리고 여자의-순종은 복음의 가치와 그 사회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말씀이다. (167)

 

11: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 여자가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이전에는 여자의 머리 위에 남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자가 소유한 이 권위는 공적으로 기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는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이렇듯 머리긴 남자나 머리 민 여자가 당시 사회통념상 욕을 보이는 일이었 듯이 여자가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 권리(기도와 예언의)를 행하는 것 역시 그들의 남편에게 부끄러움을 가져 오는 등 사회적 지탄을 받을 수 있기에 삼가자는 바울의 의도라고 한다.

 

 

 

바로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종들에게 순종을 권고하였던 것처럼, 남편들에게 불순종함을 들어 복음을 헐뜯을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바울은 여자들에게 당시의 규례에 순응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180)

 

 

 

디모데전서 2:9-15과 교회의 사역 안에서 여성의 지위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가장 이해하기 힘든, 다른 말로 하면 실로 명백하게 여자를 낮추는 말씀으로 보인다.

 

여자들은 모성과 가정 내에서의 역할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 그들의 자리를 발견한다는 의미이다. (233) (??)

 

이 본문은 그레코-로망 사회 내에서의 교회의 평판을 고려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여성들에게 적절하고 명예로운 행위로 인정받고 있던 것들을 비난하고 금하는 가르침에 직면하여 그들이 여자들의 마음에 강력하게 호소하여 그들을 타락시킴으로써 결혼 제도와 가정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공의 평판과 모범적인 가정 생활, 적절한 예법, 여자의 모성적 역할 등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도 이단이 존재와 위협에 대한 것이며, 당시의 특정한 문화의 가치관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11-12절 : 아우덴테인(authentein) – 전통적으로 ‘권세를 부리다’ ‘권세를 빼앗다/권세를 불법행사하다’로서 부정적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당시 에베소에서 거짓 가르침에 빠진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남자 지도자나 교사들의 권위를 빼앗아 불법으로 행사함으로써 교회 안에서의 적절한 권위의 행사를 오용하는 것이 반대하는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243)

 

▪ 가르치다 / 주관하다 – 바울은 여자에게 예언하는 것은 허용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한 것인가? 당시 사회에서 교사는 매우 영예로운 지위였다고 한다. 고대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여자 교사에 대한 거슬리는 감정의 배경에서 기독교 사회 안에서 중시되었던 교리의 전승의 전달이라는 과업을 여자 교사에게 맡기는 일은 주저할만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유대교 안에도 명예로운 직함을 가진 여자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으나 여자들은 토라를 배우기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고, 또한 전승의 증인이 그 전승을 전달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볼 때, 여자는 증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당시 사회의 통념이 여자가 그러한 사역을 하는 것에 불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면서 무덤가에 서 있던 여인들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263)

 

디다스코라는 동사가 잘못된 가르침을 의미하고, 따라서 여자가 거짓된 가르침을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지만 근거가 충분치 않다.

 

“여자가 꾀임을 보아” – 거짓 가르침에 빠진 에베소의 여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꼬임을 받은 이브를 언급한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차용한 특별한 논리로 볼 수 있다. (250) 이브가 아담의 교사였으며 뱀에게서 전수받은 지식의 중보자라고 하는 당시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금하기 위해 이브가 속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영지주의를 신약의 배경으로 보는 것이 근거가 불분명하다고 한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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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지음, 정성희 옮김, 양창규 그림 / 종이나라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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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살면서 <종종> 떠올리는 책.

 평생을 그럴 듯하다.

 오스카 와일드.

 이름만큼 멋진 작가다.

 (책에 그림이 있는 건, 나도 전연 반대.

 이건 내용에 열중하느라 '신기하게도' 별 '방해'를 못느꼈지만, -그림이 있었나? 했을 정도.

 위대한 개츠비는 얼마나 error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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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선 1집 - Reflet
나윤선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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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듣는 귀가 많이 발달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많이 듣죠. ^^ 요즘처럼 음악듣기가 쉬워서 많이 듣는 시대도 없지만..

엄마가 음반가게 하셔서 필 꽂히면 그냥 갖다 들어요. ㅎㅎ

재즈.. 잘 모르지만, (이 분야에 점점 귀가 발달되는 중)

많이 즐겨 들었던 음반이에요.

좀 대중적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매력있어요. 그리고 독특함도 있죠.

목소리 자체가 매력있고 독특하죠!!

지나치게 감칠맛이 흐르지도, 간드러지지도 않는..

지나치게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흐르는 시냇물소리 같아요.

 

그 어떤 여가수의 목소리보다도.. 끌립니다.

김윤아 좋아하는데,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끌리죠.

사실 어쩌면 나윤선이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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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 Solo Green - Jazz Reharmonization
정현철 엮음 / 성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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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노책이 다 그렇긴 하지만,

재즈는 특히 안을 보고 사야 할 듯 합니다.

전 귀찮아서 그냥 끌리는 것 사지만,

그랬다가 한 번 쳐보고 잘 안피는 것들 생기죠.. ^^

웬만해선 만족하다 할만한 연주곡집을 사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제가 샀던 것들 중 가장 내실있었던 것은 (재즈는 아니지만) <트리니티피아노 1> 정도..

 

이건, 편곡자가 정말 신경써서 내신 것 같아요.

소리가 정말.. 단순히 예쁘지 않고.. 감성이 묻어납니다.

(저 유키구라모토, 이루마 안 좋아하고  김광민&조지 윈스톤 좋아해요.)

그리고 한 두곡만 좋은게 아니라 거의 다 좋습니다.

정성을 들이신 듯..

 

파란책 살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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