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여성 여성신학 시리즈 2
앨버라 미켈슨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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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리더쉽에 있어서의 주도권을 가지도록 의도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열등한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가 경험해 온 고난과 압박의 역사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65) 남자들은 지도자적 역할에 있어서 좀더 강점을 가지고, 여자는 사회의 감성적인 자원을 지키는 역할에 좀더 뛰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진실로 규명된다고 하여, 왜 이 진실이 그 때문에 악한 주장으로 취급되어야만 하는가? (66)

 

 

창조의 질서가 계급주의의 기원이라고 주장될 경우 그것은 타락의 결과로 오해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이해함에 있어서의 기반으로 창조의 이야기를 이해한다. 우리는 구원을 각 개인을 위한 은혜의 역사로 그리고 그 은혜의 역사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 창조 시의 상호성을 회복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356)

 

 

나는 클라크 피노크가 주장하는 바-영적인 동등함, 여자의 자유로운 사역, 남자와 여자 사이의 상호 복종과 존중을 신학화해야 한다고 하는-는 내가 말하는 질서의 틀을 유지하는 한도 안에서 그 틀을 무시하거나 넘어서지(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이다) 않는 한도 안에서 지지한다. (35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창조를 시작하셨으며 그 안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의 역사로 성격지어지는 그 동안의 역사 속에 이루어졌던 성별간의 적대, 남성이 여성을 복종시키려 했으며 여성을 열등하게 취급했던 그 적대. 여자들은 그 안에서 은밀한 원한을 쌓아가야 했던 그 적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9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남자와 동등하다. 그리고 또한 여자는 파생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이다. …”유대인들의 통념에서 창조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의 그들의 인간론에 특정한 핵심적 관점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88)

 

 

 

창세기 3장에 처음으로 명백하게 여성의 종속에 관한 개념이 나타난다. 여자 위에 군림하는 남자의 지배가 여자가 받은 벌이었다. 창세기 저자에 의하면 여자의 종속은 남녀간의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마치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세계간의 대립, 땅 이의 가시와 엉겅퀴 그리고 잉태하는 고통들이 모두 하나님의 의도하신 이상적인 창조의 상태가 아닌 것과 같다.(111) (마르틴 루터의 주장)

 

 

3-4세기의 유대의 작가들이 인류의 타락과 죄성에 대하여 여자 편에 더 책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영향을 미친 환경이나 가르침들에 관하여는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 이들의 글들이 유대교에서 여자를 경시하는 풍조를 제공하였고, 신약은 때로 그러한 개념과 싸우며 때로 가끔은 그러한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99)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신성의 위격 안에 그리고 창조에 계층적 질서가 있다고 말한다. (95)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생명의 원천이며, 교회의 꼭대기이고 왕관이며, 교회의 승천의 기원자이고 완성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123)

 

미켈슨 부부는 케팔레의의미를 영어에서의 머리나 권위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잘못 해석하여 교회가 바울의 본래 의도와는 동떨어지게, 남자의 여자를 지배하는 권위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라 가르쳐 왔던 것이라고 말한다. 케팔레의 머리는 몸의 다른 지체 위해 군림하는 권위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심장을 육신을 지배하는 감정과 영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권위라는 개념은 헬라적 사고 방식에 있어서 ‘머리’라는 단어와 관련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머리는 ‘지도자’이기 보다는 육신의 머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된다는 것이 성장의 원천이며 자양분을 공급한다는 의미로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역시 권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남자가 여자의 생명의 원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이 특별히 지적하여 성부께서 그리스도의 머리라 말하지 않고 단순하게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머리라고 한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성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점을 볼 때 ‘머리’가 원천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머리’가 ‘권위’라는 해석 아래에서는, 에스틴(estin)동사의 현재형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지금 현재나 부활 이후의 승천하신 이후에나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게 됨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순종적인 기독론이라는 이름으로 전 교회사를 통하여 정죄받아 온 주장이었다. 아리안주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기 “머리는 권위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즐겨 사용하였다. (148)

 

 논자는 본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처럼 남편들은 아내의 생명의 원천이므로, 그들의 생명을 아내를 위하여 내어주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권고의 의미라고 결론을 맺는다.

 

 

 

 

 

종들의-그리고 여자의-순종은 복음의 가치와 그 사회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말씀이다. (167)

 

11: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 여자가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이전에는 여자의 머리 위에 남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자가 소유한 이 권위는 공적으로 기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는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이렇듯 머리긴 남자나 머리 민 여자가 당시 사회통념상 욕을 보이는 일이었 듯이 여자가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 권리(기도와 예언의)를 행하는 것 역시 그들의 남편에게 부끄러움을 가져 오는 등 사회적 지탄을 받을 수 있기에 삼가자는 바울의 의도라고 한다.

 

 

 

바로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종들에게 순종을 권고하였던 것처럼, 남편들에게 불순종함을 들어 복음을 헐뜯을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바울은 여자들에게 당시의 규례에 순응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180)

 

 

 

디모데전서 2:9-15과 교회의 사역 안에서 여성의 지위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가장 이해하기 힘든, 다른 말로 하면 실로 명백하게 여자를 낮추는 말씀으로 보인다.

 

여자들은 모성과 가정 내에서의 역할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 그들의 자리를 발견한다는 의미이다. (233) (??)

 

이 본문은 그레코-로망 사회 내에서의 교회의 평판을 고려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여성들에게 적절하고 명예로운 행위로 인정받고 있던 것들을 비난하고 금하는 가르침에 직면하여 그들이 여자들의 마음에 강력하게 호소하여 그들을 타락시킴으로써 결혼 제도와 가정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공의 평판과 모범적인 가정 생활, 적절한 예법, 여자의 모성적 역할 등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도 이단이 존재와 위협에 대한 것이며, 당시의 특정한 문화의 가치관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11-12절 : 아우덴테인(authentein) – 전통적으로 ‘권세를 부리다’ ‘권세를 빼앗다/권세를 불법행사하다’로서 부정적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당시 에베소에서 거짓 가르침에 빠진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남자 지도자나 교사들의 권위를 빼앗아 불법으로 행사함으로써 교회 안에서의 적절한 권위의 행사를 오용하는 것이 반대하는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243)

 

▪ 가르치다 / 주관하다 – 바울은 여자에게 예언하는 것은 허용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한 것인가? 당시 사회에서 교사는 매우 영예로운 지위였다고 한다. 고대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여자 교사에 대한 거슬리는 감정의 배경에서 기독교 사회 안에서 중시되었던 교리의 전승의 전달이라는 과업을 여자 교사에게 맡기는 일은 주저할만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유대교 안에도 명예로운 직함을 가진 여자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으나 여자들은 토라를 배우기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고, 또한 전승의 증인이 그 전승을 전달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볼 때, 여자는 증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당시 사회의 통념이 여자가 그러한 사역을 하는 것에 불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면서 무덤가에 서 있던 여인들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263)

 

디다스코라는 동사가 잘못된 가르침을 의미하고, 따라서 여자가 거짓된 가르침을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지만 근거가 충분치 않다.

 

“여자가 꾀임을 보아” – 거짓 가르침에 빠진 에베소의 여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꼬임을 받은 이브를 언급한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차용한 특별한 논리로 볼 수 있다. (250) 이브가 아담의 교사였으며 뱀에게서 전수받은 지식의 중보자라고 하는 당시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금하기 위해 이브가 속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영지주의를 신약의 배경으로 보는 것이 근거가 불분명하다고 한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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