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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평점 :
미나토 가나에, 김선영 역, [왕복서간], 비채, 2012.
Minato Kanae, [OFUKU SHOKAN], 2010.
나는 오쿠다 히데오의 캐릭터를 좋아하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왕성함을 좋아하고,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성을 좋아하고, 가이도 다케루의 전문성을 좋아하고, 온다 리쿠의 라이프 스타일을 좋아하고, 기리노 나쓰오의 잔혹함을 좋아하고... 미나토 가나에의 '글솜씨'를 좋아한다. 소설 [고백]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우리에게 다가온 그녀를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치밀한 복선과 탄탄한 구성이라는 평가이다. 가슴을 적시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진실 앞에서,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한 완벽한 짜임새는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그녀의 '글쓰기'를 좋아한다. 주요 인물의 고백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고백]은 독백의 힘을 보여주고, 두 소녀의 번갈아가는 심리묘사로 이루어진 [소녀]는 서술의 섬세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독특함은 항상 다음 작품에 대해 기대를 하게 하는데, 이번에는 '편지'이다.
십 년 뒤의 졸업문집
이십 년 뒤의 숙제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
오랜 지인에게 안부를 묻고, 사랑하는 이에게 소식을 전하며, 기쁨을 나누고, 위로하는 도구로... 이메일과 SNS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과거의 유물인 편지를 말하는 것이 조금은 생소하지만, 그래도 누구나 편지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있다. 예쁜 편지지를 고르고, 부드러운 펜으로, 또박또박 정성을 들여, 우표를 붙이고, 며칠간의 기다림... 봉투를 뜯고, 한자한자 눈을 맞추며, 행간의 의미를, 읽고 또 읽는, 은유와 상징의 설레임... [왕복서간]은 보내는 편지와 그에 대한 답장이라는 형식으로 세 가지 이야기를 선사한다.
기억하니? 1학년 때 갔던 여름합숙. 가모지마 섬 여름축제를 취재하러 가서 민박에 묵었던 그날 밤 말이야. 아즈 너하고 시즈카, 지아키, 나, 이렇게 넷이서 서로 좋아하는 사람을 털어놓았잖아. 모두 다 고이치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진짜 어색했지. 하지만 지아키가 "그럼 넷이서 정정당당히 겨루자. 모두 차이면 위로 파티를 열고, 누구든 잘 되면 나머지 세 사람은 진심으로 축복해주는 거야. 어때?"라는 말을 꺼냈고,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어.
그리고 결국 고이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제일 먼저 고백한 지아키였지.(p.9)
그건 정말 사고였을까?
그래, 산에서 내려올 때 있었던 일을 짚어가다가 한 가지 더 깨달은 게 있어.
시즈카는 그 사고가 있던 밤에도 산을 내려가는 내내, 외그루 소나무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지아키가 넘어졌을 때도, 내가 전화를 걸 때도, 후미야가 와줬을 때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어.(p.44)
<십 년 뒤의 졸업문집> 고이치와 시즈카의 결혼식, 남편을 따라 해외 파견생활을 하던 에쓰코는 일시 귀국하여 고향을 찾는다. 그리고 졸업 이후 십 년 만에 방송부 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지아키는 보이지 않는다. 고이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지아키였는데, 이 둘은 언제 끝나버린 걸까? 에쓰코의 편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왕복 서간으로 십 년 전의 고백, 오 년 전의 사고, 헤어짐, 행방불명의 소식이 전해진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아이들이 여섯 명 있더구나.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그걸 확인하고 교사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했지. 그런데 그때 마침 재직 중에 앓던 지병이 악화되고 말았지 뭐니.(p.93)
제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텐데, 선생님께서 어째서 제게 이런 부탁을 하셨는지 그제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제가 지금 선생님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호 씨를 포함한 여섯 명은 사고 당일 함께 산에 갔던 아이들이고요? 여섯 아이들이 사고로 입은 마음의 상처를, 그후의 인생에서도 씻어내지 못하고 있지나 않을까 걱정하시는 것 아닌가요? 마호 씨는 처음부터 제가 그걸 확인하러 온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p.103)
<이십 년 뒤의 숙제> 이십 년 전 어느 가을날, 야유회에서 남편과 제자가 함께 강물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다. 남편은 수영을 못 하고, 제자는 고작 열 살이다. 그때 누구를 구해야 했을까?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하는 마치코는 사고와 관련된 여섯 명의 아이들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고 교사생활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오바는 마치코를 대신하여 여섯 명을 찾아간다. 그리고 왕복 서간으로 각각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십 년 전의 사고 뒤에 감춰진 진실은 무엇일까?
당신은 약하지도 않고 남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아. 누구보다 정의롭고 용감하다는 걸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단 한 번, 당신을 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은 그게 고마워서 날 치켜세워준 것뿐이지 사실 내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었어.
...
그런데 그들 모두가, 그때 싸움에 뛰어든 당신과 똑같은 눈을 갖고 있었어.
내 눈은 어떨까? 이 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하면, 나도 같은 눈을 가질 수 있을까?(p.191)
나도 후회가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그 녀석들은 돌아오지 않아.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어른들 잘못이겠지. 가즈키네 어머니와 야스타카네 아버지에 대한 소문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어른들 세상의 문제가 아이들에게 비극을 가져온 건 사실이야.(p.228)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 준이치는 마리코를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국제자원봉사대 활동을 떠난다. 2년이라는 헤어짐. 왕복 서간으로 지난 십오 년을 뒤돌아 보는데, 이 둘을 연결짓는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 준이치와 마리코의 기억의 진실은 무엇일까?
[왕복서간]에 수록된 세 개의 중편은 한 가지 사건을 다양한 인물의 시점을 통해서 다각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마치 퍼즐의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하나의 진실이 밝혀지면, 또 다른 진실의 조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 도입부에서 충격적인 결말이나, 자극적인 소재를 드러내어도 글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미나토 가나에 만의 매력인듯하다. 등장하는 인물의 구체적인 이력은 작품에 생동감과 현실성을 부여하고, 편지라는 형식은 또 하나의 독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더불어 왕복 서간으로 긴 대화의 느낌도 함께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녀의 감정, 심리, 내면 묘사는 단연 최고라고 생각된다. 여러 가지 여운을 남기며, 손 편지의 감성이 마음을 물들이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