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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이런저런(?) 이유로 국내 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저자의 2016 맨부커상 소식으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책을 출간한 2014년 연말에 어느 문화평론가의 한해 키워드 정리에서 들은 적이 있어서
상을 받은 [채식주의자](창비, 2007.)보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
소설은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사람이다.
글솜씨에 놀라기보다 시종일관 먹먹한 가슴을 달래야 했다.
나는 1990년대 학번으로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대학생활을 했다.
매년 5월에는 총학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그날을 기념하지만,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핑계를 대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내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당연하였다.
그들은 고육지책으로 학생 식당 앞에다가 그날의 영상을 켜 놓았다.
어느 여학생의 처절한 가두방송이 귓전에 메아리로 남아 있다.
몇 년 전에 아프리카 가봉에서 유학 온 친구를 알게 되었다.
먼 곳에서 우리나라로 온 것이 기특해서 하필 왜 한국을 선택했냐고 물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제사회에서 정통성을 인정받고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
제3세계 독재자끼리 외교 관계를 맺고 서로를 지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은 가봉에 잘 알려진 나라이다.
그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민중이 있다는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
원하는 것은 같지만, 누구 하나 앞장서는 이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근, 현대사를 공부하러 왔다고 했다.
내가 잊은 그날을 다른 대륙에서 온 외국인은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동호와 정대, 수피아여고 3학년 은숙,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진수, 양장점에서 일하는 선주 그리고 소설가 한강.
작가는 어렸을 때 잠시 스쳐 지나간 기억을 무슨 이유로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을까?
어쩌면 오랜 세월을 보내며 마음속으로 어떤 빚진 감정이나 다른 부담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손끝에서 글로 되살아난 1980년 5월의 광주는 아주 선명하다.
우리하고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산 다섯 사람의 이야기이다.
잊고 있었던 것을, 아니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을 담백하게 풀어낸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단지 열흘간의 악몽이 아니다!
죽은 자, 살아서 고문과 협박으로 자존감마저 무너지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함께 죽지 못한 서러움과 군홧발에 짓밟힌 몸뚱어리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이다.
죽음의 의미와 무의미한 삶 사이의 치열한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후회 없는 선택이었을까?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똑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p.7)
이제는 나의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은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p.17)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니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다. 반복되는 피라는 단어가 어쩐지 가슴을 답답하게 해, 너는 다시 입을 벌려 심호흡을 한다.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p.22)
오늘 남는 사람들은 정말 다 죽어요?
묻지 않고 너는 망설인다. 죽을 거 같으면, 도청을 비우고 다 같이 피해버리면 되잖아요. 왜 누군 가고 누군 남아요.(p.28)
114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안내받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p.69)
지금은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그 말을 절반은 믿었습니다. 죽을 수 있지만, 어쩌면 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겠지만, 어쩌면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뿐 아니라 조원들 대부분이, 특히 어린 친구들은 더 강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도부를 이끌었던 대변인이 전날 외신기자들을 만나 했다는 말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패배할 거라고 그는 말했다지요. 반드시 죽을 것이며,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지요. 고백하건대 나에게 그런 초연한 확신은 없었습니다.(p.113)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p.119)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p.130)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p.135)
내가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김밥을 나눠 먹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당부했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왜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 물으려고.(p.176-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