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관의 피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평점 :
사사키 조, 김선영 역, [경관의 피], 비채, 2015.
Sasaki Joh, [KEIKAN NO CHI], 2007.
2007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2008 일본모험소설협회 대상
일본 미스터리를 읽으면서 특별히 경찰 소설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전직 경찰이나 경찰에 버금가는 탐정이 등장하고, 경찰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사사키 조의 이름을 언급하며 경찰 소설의 대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지 이제야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계급 구조, 조직 문화, 남성 중심, 팀을 이끄는 경험과 리더십, 의문의 사건... 그리고 악연은 필수 요소이다. [경관의 피]는 들은 소문으로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졌는데, 이번에 후속으로 [경관의 조건](비채, 2016.)을 출간하면서 전작으로부터 9년 뒤의 내용이라고 하여 순서대로 읽었다.
[경관의 피]라는 제목은 매우 박력 있어 보이는데, 여기에는 사건 현장을 누비며 범죄와 맞닥뜨리는 경찰의 희생이라는 뜻과 함께 전후 3대에 걸쳐 경찰이라는 직업을 가진 한 가문의 혈통을 의미한다. 안조 세이지 - 안조 다미야 - 안조 가즈야로 이어지는 경찰 3대의 이야기는 마치 세 권의 책을 읽는 기분이다.
세이지 본인의 희망은 막연했다. 우선 제때에 월급을 받고 싶었다. 제복 경관으로 거리에 서는 일은 그다음의 꿈이었다.
경찰학교에 있는 동안 약간이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게 되기는 했다. 담당 구역의 주민이나 장사치들이 따르는, 순찰을 돌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인사를 해주는, 그런 순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서장이 되는 일도, 헬멧을 쓰고 경찰봉을 휘두르는 자신도, 사복 수사원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마을의 경찰 아저씨. 굳이 말하자면 그것에 세이지의 경찰관으로서의 꿈이다.(p.34)
안조 세이지는 1948년 전쟁에서 돌아와 임신한 아내와 가정을 꾸리기 위해 경찰이 되기로 한다. 당시에는 전후 복구와 사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경관을 모집했다. 경찰학교에서 만난 네 명의 동기생은 후에 인연과 악연으로 이어지는데, 시작은 상당히 희망적이다. 우에노 경찰서로 배속되어 지역을 순찰하며 공원의 부랑자 관리, 좀도둑 검거, 사기꾼 색출... 등 일선 현장에서 직무를 감당한다. 그는 경찰로서 출세보다는 안정적이고 따뜻한 인상의 주재소 주재 경관이 되기를 희망한다.
두 사람을 배웅한 후 다미오는 새삼스럽게 불단에 놓인 아버지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다미오에게 있어 유일한 성인 남성의 규범. 어머니와 지금의 삼촌들이 실제보다 더 미화해서 이야기했더라도, 그들이 이야기해준 진짜 경찰관. 그 피를 자신이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다미오는 남몰래 긍지로 삼아왔다. 특히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더욱 강렬하게.
영정을 바라보면서 다미오는 가슴속으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내가 경시청 경관이 되고 싶은 이유는 한 가지가 또 있다. 누구에게 말할 생각도 없고, 말해봤자 이해해주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그 또 하나의 이유를 위해 나는 내년에 경시청 경찰관 채용 시험에 응시한다......(p.197)
안조 다미오는 1967년 경찰학교에 입학한다. 주재 경관으로 친절하면서도 위엄 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리고 의문의 죽임을 밝혀내기 위해서이다. 경찰학교에서 그는 국립대학에 진학하여 학생운동을 감시하는 잠입수사의 임무를 맡는다. 첩보 영화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데... 경찰이지만, 신분을 대학생으로 하고 신좌익 운동과 적군파의 테러 음모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처럼 주재소 주재 경관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야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가즈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한 가지만 말씀해주십시오. 이 임무에 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뜻밖의 질문이었을까?
오이카와가 다시 가즈야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피다. 자네에게는 훌륭한 경관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런 변칙적인 임무도 견딜 수 있을 만큼."(p.535)
안조 가즈야는 아버지의 죽임으로부터 오 년 후, 경찰시험에 합격하여 대졸 경찰관으로 채용된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서 경찰 계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3대 경찰이다. 그는 경시청 형사부 수사 4과에 배속되어 은밀하게 내사를 진행한다. 동료를 배신하고 선배를 밀고하는 일이지만, 범죄와의 뿌리 깊은 유착을 끊어야 한다.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훌륭한 경관의 피... 그는 할아버지의 의문의 죽임과 관련하여 아버지가 단독으로 수사를 진행하였음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한다.
대하드라마라고 해야 하나? [경관의 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찰 3대를 주인공으로 하는 60년의 기록이다. 한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일본의 근, 현대사를 간략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는 재건을 위해, 사회 질서와 안녕을 위해 대규모로 경찰을 채용한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집 없는 부랑자들이 모여 사는 우에노 공원의 풍경, 한국 전쟁으로 경기가 살아나고 노동조합 운동은 활발해지고... 현장에서 일하는 경찰의 일상은 어느 것 하나 사소한 것이 없다. 베트남 전쟁은 대학가의 학생운동에 불을 붙이고, 심지어 국가를 향한 테러가 일어나기도 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조직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사회 곳곳에서는 약물과 관련된 일탈이 벌어진다. 부패 경찰, 범죄와의 유착, 보여주기식 행정... 등장인물은 허구이나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근원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뭔가 후련한 복수나 확실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쉬움이 있지만, 다음 권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