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조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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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조, 김선영 역, [경관의 조건], 비채, 2016.

Sasaki Joh, [KEIKAN NO ZYOKEN], 2011.

  최근에 방송인으로 변신한 어느 은퇴 축구선수는 출연하는 프로그램에서 아들은 절대로 운동을 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힘들게 고생한 것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부모의 마음은 다 같으리라. 그런데 실제로 살면서 대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본다. 대학 시절에 학교 간의 교류로 어떤 모임에 갔었는데, 자기소개를 하면서 한 친구는 할아버지가 소방관이었고 아버지가 소방관이며 자기는 소방관이 되기 위해 소방학과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날 모인 사람은 모두 그의 집안 내력에 탄성을 지르며 그가 꼭 훌륭한 소방관이 되기를 진심으로 격려했다.

  3대째 경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따라 경찰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사사키 조의 소설 [경관의 조건]은 [경관의 피](비채, 2015.)에 이어서 9년 뒤의 이야기이다. 모든 시리즈가 그렇지만, 작가는 처음으로 만나는 독자를 배려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의 깊이 있는 이해와 더 나은 재미를 위해서는 꼭 순서대로 읽는 것을 권한다. 전작이 가족소설과 대하소설의 의미가 있다면, 이번에는 짜릿한 수사 드라마이다. 현대를 배경으로 더욱 정교해진 수사와 경찰 조직이 움직이는 시스템을 들여다볼 수 있다.

  경시청은 그런 가가야에게 회유당할 우려가 없는, 혈통이 확실한 젊은 경찰관이 필요했다. 임무냐, 돈이냐. 경찰관으로 있을 것이냐, 선을 넘을 것이냐. 그런 문제로 갈등할 리 없는 신입 경찰관을. 가즈야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경시청 경관이었으니 다른 적성도 포함해 적임이었으리라.(p.25)

  그렇게 말하는데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셔츠 가슴주머니로 뻗었다. 주머니 속에 작고 단단한 감촉.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낡은 철제 호루라기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경관의 피를 의식한 뒤로 늘 목에 걸고 있다. 가즈야는 호루라기를 움켜쥐고 그 감촉을 재차 확인했다.(p.250)

  전쟁이 끝난 후, 임신한 아내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안조 세이지는 경찰이 된다. 그는 직업의 명성이나 출세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주재소 주재 경관으로 근무하기를 원한다. 지역 사회에 동화되어 현지 주민의 생활을 돕는 순찰 경관의 삶은 임무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문의 사고로 막을 내린다.

  순직으로 인정되지 않은 아버지의 죽음, 그 뒤에 숨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안조 다미야는 경찰이 된다. 그는 대학생으로 위장하여 좌익 학생운동의 동향을 파악하는 잠입 수사관으로 활동한다. 끔찍한 테러는 막을 수 있었지만, 공포와 불안으로 신경증을 앓으며 내면세계는 파괴된다. 아버지처럼 주재 경관이 되어 시민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회복되지만, 30여 년 전의 사건을 들추며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난다.

  아버지를 향한 적대감과 이런저런 감정으로 안조 가즈야는 경찰이 된다. 3대를 잇는 경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경관의 피는 범죄와의 유착을 끊는 비밀 내사에 투입된다. 선배를 배신하고 동료를 팔아야 하는 일이지만, 경찰 개혁을 위해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그는 몰랐던 아버지의 삶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할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에 다가선다.

  가가야 히토시 경부는 폭력조직을 담당하고 수사원으로서 도쿄의 뒷세계에서 독자적인 정보 수집 루트를 구축했고, 권총 적발이나 각성제 거래 정보를 수집하는 데도 뛰어난 실적을 거두었다. 다만 사생활이 엉망이라 뒷세계와의 유착이 의심되었다. 아무리 눈부시게 활약하는 수사원이라도, 가가야의 경우 경무부의 눈에는 이미 용납할 수 있는 한도를 뛰어넘은 난행으로 비쳤던 것이다. 더는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다. 눈감아주면 다른 수사원들에게도 본보기가 되지 않는다. 언제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의 큰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처분할만한 복무규정 위반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 경무부는 계장이면서 부하가 없는 한 마리 늑대 같은 가가야 히토시에게 부하를 붙여, 그 소행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p.25)

  '사적인 감정을 내세웠나?'

  ...

  별이여, 사라져라! 날이 밝으면 나는 승리하리. 나는 승리하리! 나는 승리하리라!

  어젯밤에는 마치 자신을 위한 아리아 같다고 생각했다. 날이 밝으면 사태는 가사처럼 바뀌었어야 했다. 하지만 가가야는 의원퇴직을 했다. 경무부의 처분은 사라진 것이다.

  나는 이기지 못했다. 그 사실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졌나? 나는 패배했나? 이 승부는, 가가야의 승리인가?

  아니. 가즈야는 생각을 바꾸었다. 날은 아직 밝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승부의 시기가 미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른 형태로, 나와 가가야는 다시 한 번 맞서게 될지도 모른다......(p.61-64)

  유능한 경찰이지만(어쩌면 주인공보다 더 매력 있는), 사건을 조작하고 폭력조직과의 유착이 의심되는 가가야 히토시... 그는 비싼 양복을 입고, 독일제 승용차를 몰며, 폭력조직 간의 동향을 살피어 정보를 수집하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즈야에 의해 그가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되는데, 소설은 여기에서부터 시작이다.

  비밀 내사와 체포 그리고 공판의 과정을 거치며 한때 잘 나가던 수사관은 경시청에서 사라진다. 9년의 세월은 도쿄의 범죄 양상의 변화를 불러오고, 경시청은 새로운 조직 개편으로 이에 맞선다. 가즈야는 경부로 진급하고 조직범죄대책부 제1과 제2대책계장으로 수사를 지휘한다. 아직 악연은 끝나지 않은 것일까? 약물 시장의 판도 변화와 정보 수집의 한계, 정보원이 살해되고 심지어 잠입 수사관이 피살되는 일이 발생한다. 상부에서는 가가야의 복귀를 추진하는데... 부서 사이의 갈등과 경쟁은 앙갚음과 보복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예고한다.

  "저는 계장님이 가가야 경부를 고발한 게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관할서를 포함해 조폭 수사를 담당한 지 오래되었지만, 가가야 경부 같은 수사 방법에는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거래를 하기 시작하면 그건 더는 경찰이 아닙니다. 제 양복은 싸구려지만, 정보를 얻기 위해 명품 옷을 걸치고 맞설 생각은 하지 않아요."(p.358)

  전직 경시청 수사원이라는 우치보리의 행색은 과거 가가야가 이용했던 몇몇 정보원들의 분위기와 똑같았다. 하지만 우치보리의 경우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수사 대상이었던 업계에 한쪽 발을 담근 탓에 그쪽 분위기가 몸에 배고 만 것이리라. 경마와 싸구려 술, 정보 거래. 혹은 갈취할 수 있는 사냥감의 탐색. 그런 하루하루가 어느새 과거의 수사원을 이런 남자로 바꾸었다. 수상하면서도 적적한 기운이 뒤섞인, 타락한 남자의 인상.(p.359)

  자부심과 사명으로 정도의 길을 걷는 경찰, 회색 지대에서 이권을 위해 정보를 사고파는 경찰, 결국 선을 지키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경찰...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모습의 경찰이 등장한다. 매우 현실적이라고 해야 하나? 영웅적이거나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과장된 인물이 아닌 현실에서 실제로 있는 듯한 인물이 나온다. 사건의 해결도 한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기보다는 경찰 조직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마지막 30페이지에 들어설 때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혹의 공은 마침내 경관의 조건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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