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김유철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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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레드], 황금가지, 2013.

  요즘에는 독서를 하면서 제목의 의미와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유철의 소설 [레드]는 오랜만에 만난 국내의 추리 스릴러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읽었지만,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는다. 제목의 의미를 모르겠고, 작가가 말하는 것은 모호하다. 왜 제목을 '레드'라고 했을까? 흔히 최면을 거는 과정에서의 '레드 선'을 뜻하는 것인지, 연쇄살인의 피범벅과 방화사건의 화염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화 <세 가지 색> 시리즈처럼 블루, 화이트, 레드로 기획한 것인지... 누구는 이번 작품을 대중소설의 경계에 놓였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감은 순수문학의 감동이나 대중문학의 재미 중에서 한 가지를 분명하게 붙잡았더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좀 더 강조하면 어땠을까?

  "나에겐...... 권한이 없었네. 불임수술과 낙태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시대였으니까...... 나병은 불치병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심했으니까. 거기다 정신병자와 약물중독자, 장애를 가진 사회부적응자까지 모여들면서 그곳을 쓰레기처리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았어. 하지만 단속에도 불구하고...... 농장에서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생기고 아이들이 태어났네......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하얀 연꽃이 피듯이 말이네."(p.233)

  얼마 전에 방영한 시사다큐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1,042회 열네 개의 유리병의 증언 - 나는 왜 태어날 수 없었나)에서, 과거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는 한센인의 출산을 금지하며 강제로 낙태와 정관수술을 시행하였다는 것을 보도했다. 한센병이 유전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부정되었음에도 이 같은 인권 유린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작가는 이것을 알고 있었을까? 소설은 비슷한 맥락에서 진행하는데, 연쇄살인범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가 왜 방화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확실한 동기를 부여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다루었으면... 안타깝게도 그냥 여기까지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천구백칠십 년 할복을 했지요. 선생님?"

  ...

  "선생님 작품을 모두 읽었습니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는 자살을 했어요. 육상 자위대 총감부에 난입을 해서...... 그에겐 추종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방패회 회원이었습니다."(p.9-10)

  "미시마 유키오를 끌어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그가 재학 중에 문학상을 탔다는 이야길 끄집어 낸 것도?"

  "그 이야길 하려면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선생님의 소설이 연쇄살인범과의 연결 고리를 갖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는 거예요."(p.48-49)

  소설을 쓰고 대학에서 강의하는 민성에게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찾아와 이상한 질문을 한다. 남들 모르게 열네 번째 실종 사건을 추적 중이라는 남자는 민성이 쓴 소설에서 살인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소설의 모티브,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살인자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그와 내가 아는 사람 사이에 범인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펼쳐진 책의 앞장을 넘겨보았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라는 노란색 하드커버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책을 뒤적거리다가 한 편의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 형광펜으로 거칠게 덧칠이 되어 있었다.

  거울처럼 고요한 호수가 잠이 든다.

  아리키아의 숲 속

  그 어슴푸레한 나무 그늘에서

  숲을 지키는 사제.

  죽이려고 덤벼드는 사람을 죽이고

  언젠가는 그 자신도 죽임을 당한다.

  -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 [레길루스 호수의 전투](p.37-38)

  "프랑스 문학계에선 샤를 페로와 관련된 연구논문이 더러 발표되고 있거든. 나도 논문 중 일부를 프랑스에 있을 때 읽을 기회가 있었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쌍둥이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p.123)

  토막 시체가 발견된다. 스물네 살 여대생의 머리를 잘라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고 심장을 도려냈다. 박 형사는 피해자를 조사하다가 중학교 시절의 과외 선생을 용의자로 추적한다. 그는 보육원에서 입양되어 자라나 신학대학을 중퇴하고 3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또다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피해자는 모두 12년 전 용호농장의 병원에서 있었던 화재와 연관이 있다. 서른 명이 넘는 환자와 직원을 죽음으로 몰고 간 희대의 방화사건이다.

  기억상실, 쌍둥이, 과거의 접점, 용호농장의 병원 화재,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제 의식, 연쇄살인과 방화, 복수... 소설은 현재에서 과거를 추적하며 살인사건의 퍼즐을 맞추어 간다. 그런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정도를 지나치면 오히려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사마 유키오, 질 드레와 잔 다르크, 프레이저와 에드거 앨런 포, 샤를 페로... 등 수많은 인용구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다. 대중소설을 쓰면서 작품성을 의식해 자기 검열을 하는 것처럼 보여 상당히 부담스럽다.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것이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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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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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쿠라기 시노, 권남희 역, [유리 갈대], 비채, 2016.

Sakuragi Shino, [GARASU NO ASHI], 2010.

  일본소설을 읽는다고 하면, 주위의 대부분은 퇴폐적이거나 음란함을 연상한다. 성인비디오 시장이 활발하고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성 풍속을 참작하여 이미지를 형성했겠지만, 솔직히 지금껏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한 마디로 야한 글은 거의 보지 못했다. 오히려 서정적으로 감수성을 자극하는 작품이 있었고, 아무리 막장이라고 해도 주어진 상황이 괴이했지 성애의 묘사나 성적인 담론은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영화와 드라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좀 더 찾아봐야 하나? 색다른 호기심이 돋는다.

  사쿠라기 시노의 [유리 갈대]는, 어린 시절 러브호텔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자라나 그 영향으로 관능적인 묘사가 대담하다는 작가의 이력을 보면서 나름의 기대(?)를 하고 책장을 펼쳤다. 나는 엄마의 애인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골목에서 태어난 애가 곧 서른이 되네. 엄마 애인을 가로채서 사장 부인 자리를 꿰찼지 뭐야. 사장이라고 해봐야 그냥 러브호텔 주인이지만. 지금 얼핏 보고 왔는데, 남자를 데려왔더라고. 보통 관계가 아닐 거야. 젊은 남자던데.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하나 거르지 않네."(p.7-8)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말은 처음 들었고, 이만큼 구체적으로 조건을 제시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 흔들릴 일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니 뭐니 운운하지 않는 만큼 결혼생활은 담담했다.

  결혼하는 데 한 가지 골치 아픈 일이 있다면 세쓰코의 엄마가 오랜 세월 고다 기이치로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p.25)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뜻인데,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환경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만큼 자녀의 성장 환경을 중요시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하지만 일본은 조금 다른듯하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의 현실에 목매어 있다. 세쓰코는 앗케시에 있는 스즈란 긴자의 선술집에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태어난다. 어려서는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엄마를 피해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 자라서는 엄마를 대신해 몸을 팔아야 했다. 그녀는 이러한 삶을 복수라도 하듯이 오랜 세월 엄마의 애인이었던 남자와 결혼을 한다.

  "'성애'라는 일관된 주제가 있어서 한 권으로 묶기는 의외로 쉬운 작업이었을 것 같군요. 한 단어 한 단어에 새로움은 없지만, 저는 예전부터 이런 기법으로 단가를 짓는 분들의 경향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본인도 당연히 의식하고 있겠지만, 단가에서 허구적인 표현을 하려면 그 너머에 아무래도 표출할 수밖에 없는 업(業)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흥미를 느낀 것은 가집 제목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만.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라는 한 수입니다. 여기에는 성애를 나타내는 단어도 없고, 자신이 한 알의 모래가 되어 흘러가는 듯한 허무함은 여자라면 누구나 갖지 않나요? 일종의 보편성이 느껴진달까, 좋지 않아요?"(p.44)

  "저는 아주 느낌이 있는 가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다 씨가 이 가집을 만들 때의 마음이 책 전체에서 전해졌어요. 제 멋대로 한 추측입니다만, 고다 씨는 이 한 권으로 현재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꾀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모든 작품과 결별이라는 점에서 이 가집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p.45)

  세쓰코는 진정한 사랑을 해봤을까? 그녀의 주변은 욕망으로 가득한 남자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랑과 결혼을 별개로 살고 있다. 돈과 여유를 이유로 환갑의 나이인 러브호텔 '호텔 로열'의 주인 고다 기이치로와 결혼한다. 남편은 평생을 여자에게 얽매이지 않고 살았는데, 이번이 세 번째 결혼생활이다. 그녀는 인생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으려는 듯이 점심에는 거래처 회계사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오후에는 단가 모임에 나가 노래를 지으며 알게 모르게 자신의 심리를 표출한다. 그런데 남편이 심각한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난 네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처음부터 포기했어. 열다섯 살 나이에 엄마를 떠났기도 하고. 우리 엄마도 멀쩡한 엄마가 아니었거든. 시도 때도 없이 남자 출입이 끊이지 않았어, 동시에 양다리, 세 다리 걸치고.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몰라. 술집을 하는 건지 매춘을 하는 건지. 내가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들에게 당하는 걸 보고 못 본 척하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돈까지 가로챘던 여자야. 딸을 쓰러뜨리는 남자 뒤에서 끝날 때까지 보고 있었어. 그래서 열다섯 살에 바로 집을 나와버렸어. 이런 내가 엄마인 척하면 너도 싫었을 거야."(p.142-143)

  세쓰코는 자신도 어린 시절 리쓰코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딸은 엄마를 닮으며 자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같은 생물을 낳은 여자가 얼마쯤은 후회하게 하기 위해.(p.184)

  엄마를 싫어하면서 엄마를 닮은 여자, 아버지의 여성편력으로 집을 나온 여자, 폭력에 시달리는 어린 소녀, 내연남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은 여자, 치매인 어머니를 돌보느라 고생인 여자...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는 모두 인생의 굴레에 매여 삶의 무게를 힘겹게 버티고 있다. 그러던 중, 세쓰코에게 드디어 속박을 벗어버릴 기회가 왔다. 자기의 삶과 사랑을 찾아갈 기회... 하지만 전처의 딸을 찾아 아버지의 비보를 전해야 하고, 장례를 준비해야 한다. 러브호텔의 운영을 생각해야 하고, 단가 모임에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뜻밖의 기회이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모래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사모님 홀가분해지는 건 상관없어요. 아직 젊고,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요, 홀가분해지는 건 무서운 거예요. 속박이 없는 생활의 무서움, 아세요? 의지할 데도 없고 구속하는 곳도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필요 없어져요. 부탁이니 한동안 더 나한테 잔소리 들으면서 힘내세요."(p.221)

  소설은 관능적이라기보다는 투쟁적이다. 우울한 현실에서 몸부림치는 여자의 인생이다. 살다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꽉 막힌 상황에 부닥치게 되는데, 이것을 순리대로 풀어가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작가는 [유리 갈대]라는 제목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보기 좋은 반짝이는 유리이지만, 결국 부러지고 깨지는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여자도 모르는 여자의 심리, 닮기 싫어도 닮고 마는 인생의 굴레, 하루하루가 힘들고 보장받지 못하는 미래, 여자의 인생... 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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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옳은 일이니까요 - 박태식 신부가 읽어주는 영화와 인권
박태식 지음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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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식, [그것이 옳은 일이니까요], 비채, 2016.

  '박태식 신부가 읽어주는 영화와 인권'이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글을 이렇게 잘 쓸 수 있을까? 저자는 사제이자 교수 그리고 영화평론가라고 하는데, 철학적이면서 논리적으로 나름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감성적으로 46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글솜씨가 일품인데, 나의 블로그 글쓰기를 다시 생각해야 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역시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있고, 그가 세상에 나왔을 때의 파급력은 엄청나다.

  어린 시절에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자란 세대라서 영화에 관한 애정은 남다르다. 지금처럼 볼거리가 넘치는 시대가 아니라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이 소중했다. 아는 선배는 중, 고교 시절에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는 007시리즈의 포스터를 잊지 못해 그때의 영화 전편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영화관에서 첫 데이트의 기억... 누구나 영화에 관한 추억이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영화는 종교와 관련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기독교인이 영화 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영화 보는 게 뭐 어때서요? 마치 타락한 죄인을 보는듯한 경멸의 시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이다. 오늘날 교회보다는 영화가 더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생각이고...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종교인이 읽어주는 영화라서 나에게는 더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들은 바로 이 인권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고른 작품들이다. 고문을 받아 억울하게 인생을 마감한 사람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온갖 난관을 뚫고 조국의 경제를 일으킨 사람도 기억할 만하다. 우리에게 <변호인>도 소중하지만 <국제시장>도 중요한 까닭이다. 이처럼 영화는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보고 상상해보는, 즉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책은 모두 네 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제목을 보면 '지금' '여기' '우리' 그리고 '나'인데, 이 네 범주를 통해 인권 문제의 다양한 양상을 포괄하려 했다. 제1부 '지금'은 사회에서 개인 쪽으로 인권의 방향을 잡았고, 제2부 '여기'에서는 개인에서 사회 쪽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제3부 '우리'에서는 공동체에 무게중심을 둔 반면, 마지막 장인 '나'에서는 자아를 치밀하게 들여다보았다. 특히 '나'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잊기 쉬운 오늘의 세계이기에 소중한 가치를 담아 전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 자칫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인권문제를 재인식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p.5)

  저자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어느 한쪽의 시선이 아닌 포괄적인 눈으로 '인권'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영화 <변호인>의 가치가 중요하지만, <국제시장>의 역사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서로의 처지를 바꾸어 볼 수 있는 것은 영화라서 가능하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통합적으로 해석함으로 우리 사회와 구성원 개인에게 필요한 것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지금... <한공주> & <도희야> / <트래쉬> / <스포트라이트> & <업사이드다운> / <런치박스> &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 <미스 리틀 선샤인> / <스파이 브릿지> / <러시안 소설> & <10분>

  여기...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 <인사이드 르윈> & <비긴 어게인> / <무뢰한> &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 <해어화> & <사의 찬미> / <차이나타운> & <조이 럭 클럽> / <1944> & <고지전> / <집으로 가는 길> & <변호인>

  우리... <국제시장> / <당통> & <페어웰 마이 퀸> / <비우티풀> & <바벨> / <마지막 4중주>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가족의 탄생> / <마더 데레사의 편지> & <마더 데레사>

  나... <안녕 헤이즐> & <나우 이즈 굿> / <조이> & <룸> / <버드맨> / <마션> / <스틸 앨리스> & <어웨이 프롬 허> / <그래비티> & <프로메테우스> / <이다>(p.8-11)

  여기에 나오는 영화의 절반은 보았고 절반은 보지 못했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유명한 영화가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영화가 있다. 상업적으로 흥행한 영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다. 누가 보아도 재미있는 영화가 있고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가 있다.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 영화가 있고 반종교적인 영화가 있다. 최근에 나온 영화가 있고 오래된 영화가 있다. 우리의 영화가 있고 외국 영화가 있다. 누구나 아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가 있고 특정 계층만 아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가 있다. 감독도 마찬가지이고... 영화를 '지금', '여기', '우리', 그리고 '나'라는 네 개의 범주로 나누어서 인권을 추출한다.

  서구에서 1860년대 이후 등장한 진취적인 예술가들은 눈이나 귀를 즐겁게 하는 형식적인 미(美)에서 벗어나려 했고, 그와 더불어 창작이란 기존의 형식을 벗어나 관객과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정의가 힘을 얻었다. 후기 인상주의의 등장과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창작에 대한 보들레르의 주장이다. <한공주>와 <도희야>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끔찍한지 극적으로 알려준다. 충격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p.15)

  <트래쉬>가 고발하는 브라질의 현실은 우리에게도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줄리어드 신부가 올리비아 수녀에게 묻는다.

  "왜 녀석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이 일을 했을까?"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던데요."(p.30-31)

  미셸 푸코는 "사람들은 국가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다"(생명관리정치의 탄생)면서 국가의 통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국가의 위기관리능력에 회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보노라면 미국이라는 국가 시스템은 역시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 시스템이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고 언론이 달랐던 것은 아닐까. '미국'에서는 무엇인가 국가운영을 잘하고 있으리라는 환상 따위는 버려야 옳을 것이다.(p.42)

  사잔과 일라는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되고 일면식도 없이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의 사랑을 얕잡아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에게도 인도 물가의 5분의 1 수준으로 가난하지만, 지구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다고 알려진 부탄에서 살 권리가 엄연히 있다. 문제는 과연 어느 때 잘못된 기차에 타는가에 달려 있을 뿐. 리테쉬 바트라 감독은 관객에게 주문한다. 그때를 늦추지 말라고. 늦추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몸에서 노인 냄새가 나게 될 것이라고. 상당히 공감이 가는 메시지였다.(p.47)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폴이 끌어낼 기억은 과연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저명한 심리학자 주디스 허먼은 자신의 걸작 [트라우마]에서 괜스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끌어내 자칫 상처를 건드려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을까 염려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과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뜻일 텐데, 아마 수많은 임상을 거쳐 얻은 견해이라라. 폴의 이모들이 하는 걱정도 기우가 아닐 것이다.

  실뱅 쇼메 감독은 심리학자들의 이 같은 우려를 거슬러 자신 있게 반박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억을 회복해서 왜 오늘의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알아내야만 한다고. 만일 겁이 나서 덮어두고 산다면 오늘의 나는 공허한 삶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폴의 인생이 한심했던 것처럼.

  ...

  "너의 삶을 살아라(Vis ta vie)!"(p.58-59)

  오늘날 가톨릭 교회 깊숙이 파고든 물질만능주의와 뼛속까지 자본주의에 물든 세상, 여성 사제직, 사제 숫자 감소, 사제들의 어린이 성추행, 냉담자 증가 등 하나하나 거론하기조차 힘든 많은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중세의 산물이기도 한 '성직자의 권위주의'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성직의 권위 추락은 인간이 내적 성찰 없이 성직에 오르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잘 보여준다.(p.85)

  그렇게 과거가 인간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극대화시킨 인물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으뜸일 것이다. 어릴 때 받은 상처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현재의 나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비판에 앞장선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과거를 불변(不變)의 심리 장치가 아닌, 미래를 위한 가변(可變)의 도구라고 보았다.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가 오히려 과거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과거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쓰라린 과거사는 실패자의 합리화 도구로 쓰이거나 종종 약진의 논리로 탈바꿈한다. 과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를 망칠 수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p.140)

  죽음이야말로 그런 게 아닐까? 아무도 죽은 이의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삶을 다 같이 모여서 기리고 그가 이룩한 가치들은 존중하며 눈물을 보이지만 결국 죽은 자는 죽은 자일 뿐. 슬픈 일이지만 죽은 자를 매장하는 4월은 잔인한 달이다. 그러니 죽은 자에게는 차라리 망각의 눈으로 뒤덮인 겨울의 대지가 따뜻하지 않겠는가! 오랫동안 그려온 평화를 향해 아쉬움을 남겨두고 훌쩍, 떠나면 그뿐이리라.(p.162-163)

  히로카즈 감독의 말에 따르면, 과거의 다른 표현인 '피'가 가족의 진가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피는 기본 조건일 뿐 결국 가족 공동체의 운명은 그 구성원들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는지에 달려 있다. 즉, 인간의 의지로 결정론(決定論)을 돌파해낼 수 있다. 료타는 그 사실에 대해 완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가족의 탄생>에 등장하는 남성들이 자기가 가족의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철없고 무책임한 사람들일 뿐인 것처럼.(p.167-170)

  리들리 스콧 감독은 선택의 순간에서 뱅캇과 미치의 입장을 지지한다. 한 인간을 살리는 것은 지극히 성스러운 사명으로,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계산에 착오가 생겨 구조선이 대기권에서 폭발하고 생존을 위한 마크의 필사적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도 생명을 향한 사랑이 변해선 안 된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지혜가 등장한다. "만일 한 사람을 죽이면 전 인류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한 사람을 구하면 전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한 사람, 곧 아담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크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전 인류가 노력을 기울인다는 설정은 분명 평범하지 않다. 그러나 감독은 할리우드가 오래전부터 좋아해온 인본주의적 결말을 고집한다. 영화의 철학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다.(p.210-211)

  철학자는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차원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명제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합리주의와 과학주의가 등장하면서 데카르트식의 명제는 도전받아왔다. 오퀴스트 콩트(1798-1857)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차원에 도달하지 않은 명제는 아직 완성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쳐 데카르트식의 사고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 후 형이상학과 과학실증주의는 시대를 오가며 수많은 분야에서 충돌을 일으켰다.(p.230-231)

  가정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에 노출된 상황은 어느 순간 피해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수시로 변하는 조건만 남는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해야 하는 옳은 일이 있다. 우리와 미국은 국가 시스템이 아닌 언론의 차이이다. 그때를 늦추지 마라.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너의 삶을 살아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성찰이다. 과거의 경험은 나를 만드는 가치이다. 죽은 자와 남겨진 자들, 새로운 의미의 가족, 형이상학 차원의 초월적 가치 추구... 더 많은 희생이 있더라도 위기에 처한 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가? 에 관한 명쾌한 영화의 답변이 있다.

  한 편의 영화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감독의 철학, 배우의 몰입, 스태프의 노력이 있다. 인생, 웃음, 감동이 있다. 나와 다른 삶이 있고, 모르던 정보가 있고, 숨은 메시지가 있다. 누구와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말 날 새는 줄 모르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여기에 인간과 인권이라는 시각은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영화의 재발견,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 내가 느낀 감정과 다른 의미의 해석...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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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품격
신노 다케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윌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신노 다케시, 양억관 역, [연애의 품격], 윌북, 2012.

Shinno Takeshi, [KOI SURU KUKOU APOYANG2], 2010.

  설마 했는데, 내용이 이어지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읽을 것을... 제목만으로 단순히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책장을 넘겨보니 익숙한 인물이 연이어 등장하는 게 아닌가... 반가움과 기대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연애의 품격]은 연애소설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샐러리맨 소설로 [공항의 품격](윌북, 2012.)의 뒤를 잇고 있다. 나리타 공항에 입점해 있는 다이코 투어리스트의 현장 사무소를 배경으로 좌충우돌 해프닝을 그리고 있는데, 전작의 경우 상황 설정이나 가벼운 문체 그리고 유머 코드가 맞아서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더구나 나름의 교훈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어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뒤늦게 발견한 후속작이라니...

  "엔도 군, 아포양이란 말 알아요?"

  ...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공항에서 별로 쓰이지 않는 단어다. 원래는 투어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는 공항 사무실에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슈퍼바이저를 칭찬하는 의미로 부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공항에서만 써먹을 수 있는 인간을 뜻하는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에서는 입에 담지 않는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늘 의식하고 있지만.(p.16)

  본사에서 전도유망한 생활을 하다가 한직으로 밀려나 오게 된 현장 사무소의 아포양... 과거 호황기에는 여행의 출발점인 공항에서 여객을 무사히 출발시키는 전문가를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거품이 사라진 시대에는 경쟁에서 밀려 미래가 불투명한 자리이다. 전작에서 엔도 게이타는 하루아침에 공항이라는 낯선 환경에 놓이고, 6년을 사귄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 등 절망의 상황에서 일을 배우며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이번에는 공항에 부임한 지 1년이 지나고 중간 관리자가 되어 후임자를 지도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좀처럼 쉽지 않다. 전임자도 이렇게 답답한 기분이었을까?

  "에다모토 씨, 우리 회사에서는 아일랜드라는 호칭이 있는데 알아요?"

  ...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에다모토에게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아일랜드는 남쪽 섬의 리조트에 머물다가 머리가 멍해진 채로 돌아와서 일본의 분위기에 스며들지 못하는 사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에다모토의 늘어진 시간 관리 능력도 아일랜드 현상이라 할 것이다.(p.17)

  괌 지점의 현지 스태프로 일하다가 온 에다모토 하사오는 30세 동갑내기이다. 여객에게 인기가 있고 일을 잘한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데다 실수가 잦고 무엇보다 일 처리가 늦는다. 일에 대한 열정이나 접객 태도는 좋은 편이나 감독자로서 제 몫을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작가는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특유의 상황 설정으로 다시 만난 독자에게 재미를 주는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엔도를 공항 근무로 좌천시킨 본사의 트러블 과장이 소장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무사히 OJT(On the Job Training, 직장 내 교육)와 여객 접대를 끝낼 수 있을까?

  테러리스트와 아일랜드

  공항 베이비

  런치 전쟁

  태풍의 공항

  연애하는 공항

  나의 스위트 홈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샐러리맨 소설'이라는 분류가 있나 보다. 회사라는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인 상황에서 난관을 헤쳐나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리더십이나 자기계발서와는 조금 다르다. 이 책에서는 정규직 사원의 감정과 계약직 사원의 고뇌를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이익 창출이라는 본연의 목적과 사람다움이라는 가치의 대립은 오늘의 우리 사회를 뒤돌아보게 한다. 무슨 거대한 국제 분쟁이나 거창한 기업의 합병을 다루기보다는 말단 조직에서 일어나는 하루하루의 일상이고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엔도 군은 행복한 겁니다. 정사원이면서 능력도 있으니까 불안하지 않겠죠. 난 대학 졸업 후 취직을 못해서 괌으로 갔지만 평생 살 곳도 아니고 해서 처음부터 다음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번에 나리타에 온 것도 그래요. 연고가 있는 곳도 아니고 나이 들어서까지 교대 근무를 할 수도 없을 테고, 그러니까 다음 직장을 구해야 하는 처지예요.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그다음의 다음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그렇다면 이런 세상을 누군가가 바꾸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돼요. 어쩔 수 없이."(p.56)

  "그렇다고는 하지만 너무 잔소리를 하면 긴장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되는 거야. 그냥 지켜보면 저절로 나아지기도 해. 자네 OJT 시절 때 아마이즈미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아? 그렇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p.76-77)

  "보통 회사원들이라면 퇴근하는 길에 동료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시간을 잡기가 힘들어요. 아침반이 끝나면 너무 시간이 일러서 일단 집으로 돌아가니까 다시 나오기가 싫어지고, 오후반일 때는 먹고 나면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휴식 시간의 식사는 우리들에게 정말 소중한 소통의 자리예요.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자리기도 하고요."(p.142-143)

  나는 하마 코가 정말 부러웠다. 죽었지만 그의 뜻을 이어줄 사람이 있다. 나카진은 대의명분이라고 말했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일을 했고, 건전하고 아름다운 사고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만일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서 없어진다면, 또는 인사이동으로 자리를 옮긴다면 내 일을 이어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에다모토의 OJT라든지 내 반을 이어받을 사람이야 있을 테지만, 내가 지향하는 일이라든지 업무에 대한 태도라든지, 그런 것은 공항에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에다모토에게조차 영향력이 없다.(p.193-194)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머지 않아 이 공항 사무실은 사라져. 다이코 에어포트 서비스 아니면 다른 센딩 회사든 어딘가에 위탁하게 될 거야."

  "예? 그래서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잖아요."

  "서비스의 문제가 아냐. 돈 문제지."(p.238-239)

  이마이즈미가 공항 사무실을 떠날 때면 늘 언제든 돌아올 거라 생각한다고 했는데, 그 돌아올 장소가 없어진다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돌아올 장소, 그러나 그건 장소가 아니다.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카운터에 있는 에다모토, 시노다, 모리오를 보면서 깨달았다.(p.265-266)

  마음이 불편한 것은 공항에서 일을 하며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가르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고 말았다. 에다모토의 마음에 아름다운 뭔가를 남겨주지 못했다.

  "엔도 잘못이야."

  "맞습니다."

  "엔도 잘못이야."(p.285-286)

  잘 다녀오시라 말하지 못한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어떻게 해도 여행을 즐길 수 없는 여객은 출발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진짜 아포양 이마이즈미의 신념이다.(p.305)

  "반드시 출발하게 한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해야 해. 어떤 경우에도. 이거, 잘못된 생각인가? ... 즐기느냐 즐기지 못하느냐는 그다음 문제죠. 그 사람을 만나 확인해봐야 해요. 만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설득해서 출발하게 해야 하고요. 그렇지 못한다면, 에다모토 씨는 공항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p.379)

  테러리스트와 이름이 똑같은 남자,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임산부, 점심 식사에 목매는 여직원, 태풍으로 혼잡한 공항, 절대 떠나서는 안 되는 승객과 꼭 출발해야 하는 승객... 여행의 출발 공항에서 여객을 직접 만나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의 일을 하는 아포양... 사소하고 불필요해 보이지만, 문제가 생긴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중요하다. 작가는 여행사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진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아포양의 신념! 글을 읽으면서 사소한 것 하나에도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일본인 특유의 장인 정신 같은 게 느껴졌다. 요즘 들어 사소한 것은 잠시 뒤로하고... 그게 뭐가 중요한데... 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세상에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소한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 중요한 것은 잘할 수 있을까? 돈이 중요하지만,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이번에도 아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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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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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황현산 역, [어린 왕자], 열린책들, 2015.

Antoine De Saint-Exupery, [LE PETIT PRINCE], 1943.

  드디어 [어린 왕자]를 읽었다. 국내에 여러 번역이 있지만, 불문학을 전공하고 문학 비평가로 활동하는 그리고 가장 최근에 출간했다는 이유로 황현산 역을 선택했다. 저자는 레옹 베르트에게 보내는 서문에서 "지금은 이 어른이 되어 있는 예전의 어린아이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p.5)라고 하는데, 개인적인 감상은 어른이 되기 전에 읽었더라면... 이라는 회한이 남는다(그러면 나는 달라졌을까?). 흔히 어린아이를 가리켜 순수하다고 하지만, 어쩌면 어린이는 이미 인생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공교육 체제로 들어가서는 국가가 요구하는 시민의 덕목을 익히면서 이전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내가 너무 비약한 것일까?

  나는 이렇게 진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이 혼자 살아오던 끝에, 여섯 해 전,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를 만났다. 모터에서 무언가가 부서진 것이다. 기관사도 승객도 없었던 터라 나는 그 어려운 수리를 혼자서 감당해 볼 작정이었다. 나로서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겨우 일주일 동안 마실 물밖에 없었다.(p.10)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조종사로 군 복무를 하고 나서 민간인 조종사로 툴루즈-카사블랑카, 다카르-카사블랑카 노선의 항공 우편 업무를 담당한다. 현대의 기술과는 다르게 당시의 비행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데, 몇 번의 심각한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1935년 12월에는 파리의 부르제 공항을 떠나 이집트로 가다가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여 5일 동안 사경을 헤매며 걷다가 극적으로 구조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이 작품의 동기가 되었던 것일까? 1943년 [어린 왕자]를 세상에 선보인다.

  "저......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뭐?"

  "양 한 마리만 그려 줘......"(p.10)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했을 때, 누군가가 불쑥 다가와 무턱대고 양을 그려달라고 한다. 잠시 꿈을 꾸는 것처럼, 아니 무언가에 홀린 듯이... 갑자기 나타난 어린 왕자와 함께 적막한 곳에서 일주일간의 동거를 하게 된다. 보아뱀 그림, 사하라 사막, 비행기 고장, 양 그림, 소행성 B612, 바오바브나무, 장미꽃... 여우, 우물, 뱀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동화처럼 다가온다. 그동안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왜 그토록 어린 왕자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나는 말이야, 중요한 일을 하느라고 바쁘단 말이야!"

  그는 깜짝 놀라 나를 노려보았다.

  "중요한 일이라고!"

  그는 손가락에 새까맣게 기름을 묻힌 채 손에 망치를 들고 그에게는 매우 흉측해 보이는 물건에 엎드려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저씨도 어른들같이 말하네!"(p.31-32)

  "수백만 또 수백만이 넘는 별들 속에 그런 종류로는 단 한 송이밖에 없는 꽃을 누군가가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별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할 거야. '저 하늘 어딘가에 내 꽃이 있겠지......' 이렇게 혼자 말하겠지. 그런데 양이 그 꽃을 먹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그에겐 그 모든 별들이 갑자기 꺼져 버리는 것 같을 거야! 그래도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란 말이야!"(p.33)

  낮에는 뜨거운 열기와 밤에는 찬 바람을 내뿜는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고쳐야 한다. 그래서 어린 왕자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를 꺼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느라고 바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몰상식한 어른의 모습으로 보였나 보다. 꽃의 가시가 어떤 의미인지, 나는 사랑하는 꽃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그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을 때, 연장을 던져두고 다가가 달래주어야 했다. 목마름도 죽음도 안중에 없이...

  '어른들은 참 이상해.' 어린 왕자는 여행을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p.48)

  "사람들은 어디 있니?" 마침내 어린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막은 좀 외롭구나......"

  "사람들이 사는 곳도 역시 외롭지." 뱀이 말했다.(p.73)

  소행성에서 홀로... 세상 전부를 다스린다는 왕,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숭배를 받고 싶어 하는 허영쟁이,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이것을 잊으려고 다시 술을 마신다는 주정뱅이, 5억 162만 2,731개의 별을 가지고 있다는 바쁜 사업가, 매 순간 가로등을 켰다 끄는 쉴 틈없는 가로등지기, 서재를 떠나지 않는 지리학자... 어린 왕자는 여행하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바쁘게 사는 어른들을 만난다. 그의 눈에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 그리고 일곱 번째 별 지구에 왔다.

  "나는 친구들을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건 모두들 너무나 잊고 있는 것이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관계를 맺는다고?"

  "물론이지." 여우가 말했다. "너는 아직 내게 세상에 흔한 여러 아이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네가 필요 없어. 너도 역시 내가 필요 없지. 나도 세상에 흔한 여러 여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한 여우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하게 되지.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야. 나는 너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고......"(p.84-85)

  "잘 가."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기억해 두려고 되풀이했다.(p.90)

  어린 왕자는 정원에서 똑 닮은 5천 송이의 꽃을 보면서 자신이 가진 한 송이 장미꽃이 그냥 흔한 꽃이라는 초라함과 상실감으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곧이어 나타난 여우에게서 '길들이다'라는 의미를 배우게 되는데,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마치 현자와의 만남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인데, 그는 여우를 길들이며 좋은 관계를 맺는다. 그가 가진 장미도 관계를 맺었기에 더없이 소중한 것이고... 여우는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비밀을 알려주고 헤어진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p.97)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바라볼 때면, 내가 그 별들 중의 어느 별에서 살고 있을 테니까, 그 별들 중의 어느 별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아저씨에겐 모든 별들이 웃고 있는 것으로 보일 거야. 아저씨는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지!"(p.110)

  물은 다 떨어지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들은 우물을 찾으러 간다. 이어서 어린 왕자는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한다...

  어린 왕자가 나타난 것은 절망 가운데 희망이었던 것일까? 잠시 꿈을 꾸는 것처럼, 아니 무언가에 홀린 듯이 보낸 일주일은 어른이 되어서는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밤하늘의 별들 사이에서 웃고 있겠다는 그의 마지막 선물은 나에게도 전해지는 기분이다. 어린 왕자의 순수한 시선, 아름다운 은유로 삶에 대한 깊은 성찰, 어른이 되고 나서 잊어버린 것을 떠올리게 하는... 점점 꼰대처럼 말하고, 이상한 어른으로 행동해 가는 시기에 잠깐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해야 하나... 밤하늘의 별을 본 적이 언제였던가? 오늘 밤에는 어린 왕자의 미소를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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