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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옳은 일이니까요 - 박태식 신부가 읽어주는 영화와 인권
박태식 지음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박태식, [그것이 옳은 일이니까요], 비채, 2016.
'박태식 신부가 읽어주는 영화와 인권'이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글을 이렇게 잘 쓸 수 있을까? 저자는 사제이자 교수 그리고 영화평론가라고 하는데, 철학적이면서 논리적으로 나름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감성적으로 46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글솜씨가 일품인데, 나의 블로그 글쓰기를 다시 생각해야 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역시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있고, 그가 세상에 나왔을 때의 파급력은 엄청나다.
어린 시절에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자란 세대라서 영화에 관한 애정은 남다르다. 지금처럼 볼거리가 넘치는 시대가 아니라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이 소중했다. 아는 선배는 중, 고교 시절에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는 007시리즈의 포스터를 잊지 못해 그때의 영화 전편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영화관에서 첫 데이트의 기억... 누구나 영화에 관한 추억이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영화는 종교와 관련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기독교인이 영화 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영화 보는 게 뭐 어때서요? 마치 타락한 죄인을 보는듯한 경멸의 시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이다. 오늘날 교회보다는 영화가 더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생각이고...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종교인이 읽어주는 영화라서 나에게는 더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들은 바로 이 인권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고른 작품들이다. 고문을 받아 억울하게 인생을 마감한 사람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온갖 난관을 뚫고 조국의 경제를 일으킨 사람도 기억할 만하다. 우리에게 <변호인>도 소중하지만 <국제시장>도 중요한 까닭이다. 이처럼 영화는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보고 상상해보는, 즉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책은 모두 네 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제목을 보면 '지금' '여기' '우리' 그리고 '나'인데, 이 네 범주를 통해 인권 문제의 다양한 양상을 포괄하려 했다. 제1부 '지금'은 사회에서 개인 쪽으로 인권의 방향을 잡았고, 제2부 '여기'에서는 개인에서 사회 쪽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제3부 '우리'에서는 공동체에 무게중심을 둔 반면, 마지막 장인 '나'에서는 자아를 치밀하게 들여다보았다. 특히 '나'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잊기 쉬운 오늘의 세계이기에 소중한 가치를 담아 전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 자칫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인권문제를 재인식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p.5)
저자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어느 한쪽의 시선이 아닌 포괄적인 눈으로 '인권'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영화 <변호인>의 가치가 중요하지만, <국제시장>의 역사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서로의 처지를 바꾸어 볼 수 있는 것은 영화라서 가능하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통합적으로 해석함으로 우리 사회와 구성원 개인에게 필요한 것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지금... <한공주> & <도희야> / <트래쉬> / <스포트라이트> & <업사이드다운> / <런치박스> &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 <미스 리틀 선샤인> / <스파이 브릿지> / <러시안 소설> & <10분>
여기...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 <인사이드 르윈> & <비긴 어게인> / <무뢰한> &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 <해어화> & <사의 찬미> / <차이나타운> & <조이 럭 클럽> / <1944> & <고지전> / <집으로 가는 길> & <변호인>
우리... <국제시장> / <당통> & <페어웰 마이 퀸> / <비우티풀> & <바벨> / <마지막 4중주>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가족의 탄생> / <마더 데레사의 편지> & <마더 데레사>
나... <안녕 헤이즐> & <나우 이즈 굿> / <조이> & <룸> / <버드맨> / <마션> / <스틸 앨리스> & <어웨이 프롬 허> / <그래비티> & <프로메테우스> / <이다>(p.8-11)
여기에 나오는 영화의 절반은 보았고 절반은 보지 못했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유명한 영화가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영화가 있다. 상업적으로 흥행한 영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다. 누가 보아도 재미있는 영화가 있고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가 있다.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 영화가 있고 반종교적인 영화가 있다. 최근에 나온 영화가 있고 오래된 영화가 있다. 우리의 영화가 있고 외국 영화가 있다. 누구나 아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가 있고 특정 계층만 아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가 있다. 감독도 마찬가지이고... 영화를 '지금', '여기', '우리', 그리고 '나'라는 네 개의 범주로 나누어서 인권을 추출한다.
서구에서 1860년대 이후 등장한 진취적인 예술가들은 눈이나 귀를 즐겁게 하는 형식적인 미(美)에서 벗어나려 했고, 그와 더불어 창작이란 기존의 형식을 벗어나 관객과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정의가 힘을 얻었다. 후기 인상주의의 등장과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창작에 대한 보들레르의 주장이다. <한공주>와 <도희야>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끔찍한지 극적으로 알려준다. 충격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p.15)
<트래쉬>가 고발하는 브라질의 현실은 우리에게도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줄리어드 신부가 올리비아 수녀에게 묻는다.
"왜 녀석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이 일을 했을까?"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던데요."(p.30-31)
미셸 푸코는 "사람들은 국가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다"(생명관리정치의 탄생)면서 국가의 통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국가의 위기관리능력에 회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보노라면 미국이라는 국가 시스템은 역시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 시스템이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고 언론이 달랐던 것은 아닐까. '미국'에서는 무엇인가 국가운영을 잘하고 있으리라는 환상 따위는 버려야 옳을 것이다.(p.42)
사잔과 일라는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되고 일면식도 없이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의 사랑을 얕잡아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에게도 인도 물가의 5분의 1 수준으로 가난하지만, 지구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다고 알려진 부탄에서 살 권리가 엄연히 있다. 문제는 과연 어느 때 잘못된 기차에 타는가에 달려 있을 뿐. 리테쉬 바트라 감독은 관객에게 주문한다. 그때를 늦추지 말라고. 늦추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몸에서 노인 냄새가 나게 될 것이라고. 상당히 공감이 가는 메시지였다.(p.47)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폴이 끌어낼 기억은 과연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저명한 심리학자 주디스 허먼은 자신의 걸작 [트라우마]에서 괜스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끌어내 자칫 상처를 건드려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을까 염려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과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뜻일 텐데, 아마 수많은 임상을 거쳐 얻은 견해이라라. 폴의 이모들이 하는 걱정도 기우가 아닐 것이다.
실뱅 쇼메 감독은 심리학자들의 이 같은 우려를 거슬러 자신 있게 반박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억을 회복해서 왜 오늘의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알아내야만 한다고. 만일 겁이 나서 덮어두고 산다면 오늘의 나는 공허한 삶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폴의 인생이 한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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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삶을 살아라(Vis ta vie)!"(p.58-59)
오늘날 가톨릭 교회 깊숙이 파고든 물질만능주의와 뼛속까지 자본주의에 물든 세상, 여성 사제직, 사제 숫자 감소, 사제들의 어린이 성추행, 냉담자 증가 등 하나하나 거론하기조차 힘든 많은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중세의 산물이기도 한 '성직자의 권위주의'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성직의 권위 추락은 인간이 내적 성찰 없이 성직에 오르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잘 보여준다.(p.85)
그렇게 과거가 인간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극대화시킨 인물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으뜸일 것이다. 어릴 때 받은 상처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현재의 나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비판에 앞장선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과거를 불변(不變)의 심리 장치가 아닌, 미래를 위한 가변(可變)의 도구라고 보았다.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가 오히려 과거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과거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쓰라린 과거사는 실패자의 합리화 도구로 쓰이거나 종종 약진의 논리로 탈바꿈한다. 과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를 망칠 수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p.140)
죽음이야말로 그런 게 아닐까? 아무도 죽은 이의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삶을 다 같이 모여서 기리고 그가 이룩한 가치들은 존중하며 눈물을 보이지만 결국 죽은 자는 죽은 자일 뿐. 슬픈 일이지만 죽은 자를 매장하는 4월은 잔인한 달이다. 그러니 죽은 자에게는 차라리 망각의 눈으로 뒤덮인 겨울의 대지가 따뜻하지 않겠는가! 오랫동안 그려온 평화를 향해 아쉬움을 남겨두고 훌쩍, 떠나면 그뿐이리라.(p.162-163)
히로카즈 감독의 말에 따르면, 과거의 다른 표현인 '피'가 가족의 진가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피는 기본 조건일 뿐 결국 가족 공동체의 운명은 그 구성원들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는지에 달려 있다. 즉, 인간의 의지로 결정론(決定論)을 돌파해낼 수 있다. 료타는 그 사실에 대해 완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가족의 탄생>에 등장하는 남성들이 자기가 가족의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철없고 무책임한 사람들일 뿐인 것처럼.(p.167-170)
리들리 스콧 감독은 선택의 순간에서 뱅캇과 미치의 입장을 지지한다. 한 인간을 살리는 것은 지극히 성스러운 사명으로,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계산에 착오가 생겨 구조선이 대기권에서 폭발하고 생존을 위한 마크의 필사적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도 생명을 향한 사랑이 변해선 안 된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지혜가 등장한다. "만일 한 사람을 죽이면 전 인류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한 사람을 구하면 전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한 사람, 곧 아담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크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전 인류가 노력을 기울인다는 설정은 분명 평범하지 않다. 그러나 감독은 할리우드가 오래전부터 좋아해온 인본주의적 결말을 고집한다. 영화의 철학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다.(p.210-211)
철학자는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차원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명제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합리주의와 과학주의가 등장하면서 데카르트식의 명제는 도전받아왔다. 오퀴스트 콩트(1798-1857)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차원에 도달하지 않은 명제는 아직 완성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쳐 데카르트식의 사고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 후 형이상학과 과학실증주의는 시대를 오가며 수많은 분야에서 충돌을 일으켰다.(p.230-231)
가정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에 노출된 상황은 어느 순간 피해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수시로 변하는 조건만 남는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해야 하는 옳은 일이 있다. 우리와 미국은 국가 시스템이 아닌 언론의 차이이다. 그때를 늦추지 마라.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너의 삶을 살아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성찰이다. 과거의 경험은 나를 만드는 가치이다. 죽은 자와 남겨진 자들, 새로운 의미의 가족, 형이상학 차원의 초월적 가치 추구... 더 많은 희생이 있더라도 위기에 처한 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가? 에 관한 명쾌한 영화의 답변이 있다.
한 편의 영화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감독의 철학, 배우의 몰입, 스태프의 노력이 있다. 인생, 웃음, 감동이 있다. 나와 다른 삶이 있고, 모르던 정보가 있고, 숨은 메시지가 있다. 누구와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말 날 새는 줄 모르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여기에 인간과 인권이라는 시각은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영화의 재발견,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 내가 느낀 감정과 다른 의미의 해석...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