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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사쿠라기 시노, 권남희 역, [유리 갈대], 비채, 2016.
Sakuragi Shino, [GARASU NO ASHI], 2010.
일본소설을 읽는다고 하면, 주위의 대부분은 퇴폐적이거나 음란함을 연상한다. 성인비디오 시장이 활발하고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성 풍속을 참작하여 이미지를 형성했겠지만, 솔직히 지금껏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한 마디로 야한 글은 거의 보지 못했다. 오히려 서정적으로 감수성을 자극하는 작품이 있었고, 아무리 막장이라고 해도 주어진 상황이 괴이했지 성애의 묘사나 성적인 담론은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영화와 드라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좀 더 찾아봐야 하나? 색다른 호기심이 돋는다.
사쿠라기 시노의 [유리 갈대]는, 어린 시절 러브호텔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자라나 그 영향으로 관능적인 묘사가 대담하다는 작가의 이력을 보면서 나름의 기대(?)를 하고 책장을 펼쳤다. 나는 엄마의 애인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 골목에서 태어난 애가 곧 서른이 되네. 엄마 애인을 가로채서 사장 부인 자리를 꿰찼지 뭐야. 사장이라고 해봐야 그냥 러브호텔 주인이지만. 지금 얼핏 보고 왔는데, 남자를 데려왔더라고. 보통 관계가 아닐 거야. 젊은 남자던데.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하나 거르지 않네."(p.7-8)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말은 처음 들었고, 이만큼 구체적으로 조건을 제시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 흔들릴 일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니 뭐니 운운하지 않는 만큼 결혼생활은 담담했다.
결혼하는 데 한 가지 골치 아픈 일이 있다면 세쓰코의 엄마가 오랜 세월 고다 기이치로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p.25)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뜻인데,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환경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만큼 자녀의 성장 환경을 중요시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하지만 일본은 조금 다른듯하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의 현실에 목매어 있다. 세쓰코는 앗케시에 있는 스즈란 긴자의 선술집에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태어난다. 어려서는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엄마를 피해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 자라서는 엄마를 대신해 몸을 팔아야 했다. 그녀는 이러한 삶을 복수라도 하듯이 오랜 세월 엄마의 애인이었던 남자와 결혼을 한다.
"'성애'라는 일관된 주제가 있어서 한 권으로 묶기는 의외로 쉬운 작업이었을 것 같군요. 한 단어 한 단어에 새로움은 없지만, 저는 예전부터 이런 기법으로 단가를 짓는 분들의 경향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본인도 당연히 의식하고 있겠지만, 단가에서 허구적인 표현을 하려면 그 너머에 아무래도 표출할 수밖에 없는 업(業)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흥미를 느낀 것은 가집 제목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만.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라는 한 수입니다. 여기에는 성애를 나타내는 단어도 없고, 자신이 한 알의 모래가 되어 흘러가는 듯한 허무함은 여자라면 누구나 갖지 않나요? 일종의 보편성이 느껴진달까, 좋지 않아요?"(p.44)
"저는 아주 느낌이 있는 가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다 씨가 이 가집을 만들 때의 마음이 책 전체에서 전해졌어요. 제 멋대로 한 추측입니다만, 고다 씨는 이 한 권으로 현재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꾀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모든 작품과 결별이라는 점에서 이 가집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p.45)
세쓰코는 진정한 사랑을 해봤을까? 그녀의 주변은 욕망으로 가득한 남자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랑과 결혼을 별개로 살고 있다. 돈과 여유를 이유로 환갑의 나이인 러브호텔 '호텔 로열'의 주인 고다 기이치로와 결혼한다. 남편은 평생을 여자에게 얽매이지 않고 살았는데, 이번이 세 번째 결혼생활이다. 그녀는 인생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으려는 듯이 점심에는 거래처 회계사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오후에는 단가 모임에 나가 노래를 지으며 알게 모르게 자신의 심리를 표출한다. 그런데 남편이 심각한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다.
"난 네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처음부터 포기했어. 열다섯 살 나이에 엄마를 떠났기도 하고. 우리 엄마도 멀쩡한 엄마가 아니었거든. 시도 때도 없이 남자 출입이 끊이지 않았어, 동시에 양다리, 세 다리 걸치고.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몰라. 술집을 하는 건지 매춘을 하는 건지. 내가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들에게 당하는 걸 보고 못 본 척하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돈까지 가로챘던 여자야. 딸을 쓰러뜨리는 남자 뒤에서 끝날 때까지 보고 있었어. 그래서 열다섯 살에 바로 집을 나와버렸어. 이런 내가 엄마인 척하면 너도 싫었을 거야."(p.142-143)
세쓰코는 자신도 어린 시절 리쓰코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딸은 엄마를 닮으며 자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같은 생물을 낳은 여자가 얼마쯤은 후회하게 하기 위해.(p.184)
엄마를 싫어하면서 엄마를 닮은 여자, 아버지의 여성편력으로 집을 나온 여자, 폭력에 시달리는 어린 소녀, 내연남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은 여자, 치매인 어머니를 돌보느라 고생인 여자...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는 모두 인생의 굴레에 매여 삶의 무게를 힘겹게 버티고 있다. 그러던 중, 세쓰코에게 드디어 속박을 벗어버릴 기회가 왔다. 자기의 삶과 사랑을 찾아갈 기회... 하지만 전처의 딸을 찾아 아버지의 비보를 전해야 하고, 장례를 준비해야 한다. 러브호텔의 운영을 생각해야 하고, 단가 모임에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뜻밖의 기회이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모래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사모님 홀가분해지는 건 상관없어요. 아직 젊고,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요, 홀가분해지는 건 무서운 거예요. 속박이 없는 생활의 무서움, 아세요? 의지할 데도 없고 구속하는 곳도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필요 없어져요. 부탁이니 한동안 더 나한테 잔소리 들으면서 힘내세요."(p.221)
소설은 관능적이라기보다는 투쟁적이다. 우울한 현실에서 몸부림치는 여자의 인생이다. 살다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꽉 막힌 상황에 부닥치게 되는데, 이것을 순리대로 풀어가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작가는 [유리 갈대]라는 제목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보기 좋은 반짝이는 유리이지만, 결국 부러지고 깨지는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여자도 모르는 여자의 심리, 닮기 싫어도 닮고 마는 인생의 굴레, 하루하루가 힘들고 보장받지 못하는 미래, 여자의 인생... 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