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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김유철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김유철, [레드], 황금가지, 2013.
요즘에는 독서를 하면서 제목의 의미와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유철의 소설 [레드]는 오랜만에 만난 국내의 추리 스릴러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읽었지만,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는다. 제목의 의미를 모르겠고, 작가가 말하는 것은 모호하다. 왜 제목을 '레드'라고 했을까? 흔히 최면을 거는 과정에서의 '레드 선'을 뜻하는 것인지, 연쇄살인의 피범벅과 방화사건의 화염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화 <세 가지 색> 시리즈처럼 블루, 화이트, 레드로 기획한 것인지... 누구는 이번 작품을 대중소설의 경계에 놓였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감은 순수문학의 감동이나 대중문학의 재미 중에서 한 가지를 분명하게 붙잡았더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좀 더 강조하면 어땠을까?
"나에겐...... 권한이 없었네. 불임수술과 낙태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시대였으니까...... 나병은 불치병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심했으니까. 거기다 정신병자와 약물중독자, 장애를 가진 사회부적응자까지 모여들면서 그곳을 쓰레기처리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았어. 하지만 단속에도 불구하고...... 농장에서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생기고 아이들이 태어났네......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하얀 연꽃이 피듯이 말이네."(p.233)
얼마 전에 방영한 시사다큐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1,042회 열네 개의 유리병의 증언 - 나는 왜 태어날 수 없었나)에서, 과거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는 한센인의 출산을 금지하며 강제로 낙태와 정관수술을 시행하였다는 것을 보도했다. 한센병이 유전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부정되었음에도 이 같은 인권 유린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작가는 이것을 알고 있었을까? 소설은 비슷한 맥락에서 진행하는데, 연쇄살인범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가 왜 방화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확실한 동기를 부여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다루었으면... 안타깝게도 그냥 여기까지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천구백칠십 년 할복을 했지요. 선생님?"
...
"선생님 작품을 모두 읽었습니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는 자살을 했어요. 육상 자위대 총감부에 난입을 해서...... 그에겐 추종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방패회 회원이었습니다."(p.9-10)
"미시마 유키오를 끌어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그가 재학 중에 문학상을 탔다는 이야길 끄집어 낸 것도?"
"그 이야길 하려면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선생님의 소설이 연쇄살인범과의 연결 고리를 갖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는 거예요."(p.48-49)
소설을 쓰고 대학에서 강의하는 민성에게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찾아와 이상한 질문을 한다. 남들 모르게 열네 번째 실종 사건을 추적 중이라는 남자는 민성이 쓴 소설에서 살인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소설의 모티브,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살인자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그와 내가 아는 사람 사이에 범인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펼쳐진 책의 앞장을 넘겨보았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라는 노란색 하드커버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책을 뒤적거리다가 한 편의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 형광펜으로 거칠게 덧칠이 되어 있었다.
거울처럼 고요한 호수가 잠이 든다.
아리키아의 숲 속
그 어슴푸레한 나무 그늘에서
숲을 지키는 사제.
죽이려고 덤벼드는 사람을 죽이고
언젠가는 그 자신도 죽임을 당한다.
-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 [레길루스 호수의 전투](p.37-38)
"프랑스 문학계에선 샤를 페로와 관련된 연구논문이 더러 발표되고 있거든. 나도 논문 중 일부를 프랑스에 있을 때 읽을 기회가 있었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쌍둥이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p.123)
토막 시체가 발견된다. 스물네 살 여대생의 머리를 잘라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고 심장을 도려냈다. 박 형사는 피해자를 조사하다가 중학교 시절의 과외 선생을 용의자로 추적한다. 그는 보육원에서 입양되어 자라나 신학대학을 중퇴하고 3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또다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피해자는 모두 12년 전 용호농장의 병원에서 있었던 화재와 연관이 있다. 서른 명이 넘는 환자와 직원을 죽음으로 몰고 간 희대의 방화사건이다.
기억상실, 쌍둥이, 과거의 접점, 용호농장의 병원 화재,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제 의식, 연쇄살인과 방화, 복수... 소설은 현재에서 과거를 추적하며 살인사건의 퍼즐을 맞추어 간다. 그런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정도를 지나치면 오히려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사마 유키오, 질 드레와 잔 다르크, 프레이저와 에드거 앨런 포, 샤를 페로... 등 수많은 인용구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한다. 대중소설을 쓰면서 작품성을 의식해 자기 검열을 하는 것처럼 보여 상당히 부담스럽다.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것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