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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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데니스 루헤인, 조영학 역, [더 드롭], 황금가지, 2014.

Dennis Lehane, [THE DROP], 2014.

  몇 년 전, 책을 처음 출간했을 때부터 아주 많이 읽고 싶었던 소설이다. 데니스 루헤인이라는 이름과 매력적인 표지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관심을 끌었다. 이후에 톰 하디 주연으로 동명의 영화를 보았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드디어 원작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소설 [더 드롭]은 원래 단편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황금가지, 2014.)의 확장판이라고 한다. 작가는 단편소설을 먼저 쓰고, 여기에 살을 붙여 장편의 스릴러를 완성했다.

  밥이 개를 발견한 건 성탄절에서 이틀이 지난 때였다. 사람들이 추위와 숙취, 과식으로 집에 틀어박힌 탓에 거리는 고요했다. 밥은 플래츠 거리에 있는 커즌 마브의 술집에서 오후 4시부터 새벽 2시까지의 교대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 일을 한 지도 거의 20년이 다 되었다.(p.11)

  사촌 마브의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밥 사이노스키는 퇴근길에 쓰레기 더미에서 상처 입은 개를 발견한다. 그리고 나디아라는 여자를 알게 된다. 아메리칸 스태퍼드셔 테리어, 흔히 핏불이라고 하는 강아지는 누군가가 심하게 때리고 일부러 버린 듯 보인다. 혼자 사는 밥은, 개가 시설에 보내져도 주인이 찾지 않거나 누군가에게 분양되지 않으면 안락사된다는 말을 듣고... 결국, 개를 데려가기로 한다. 이것은 나중에 몰고 올 사건의 발단이 된다.

  "젠장, 진짜 지랄같이 나오면 어쩌려고? 거긴 갱단 술집이란 말이야. 드롭 바라고."

  피츠의 미소도 딱딱해졌다.

  "그게 핵심이야, 인마. 드롭 바가 아니면, 누가 이 짓 한대?"(p.39-40)

  기네스 두 잔을 따르는데 체첸 인 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짧 머리와 이틀분의 수염, 둘 다 양털 반코트 차림이다. 마브가 두 사람을 지나치며 걸음도 멈추지 않고 누런색의 마닐라 봉투를 건넸다. 밥이 거품을 처리할 즈음 체첸 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신출귀몰.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은 것 같았다.(p.40-41)

  커즌 마브의 술집은 갱단에서 운영하는 드롭 바이다. 매일 밤, 술과 도박으로 벌어들인 돈을 수금원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아무도 마브의 술집은 건드리지 않는다. 갱단 간의 전쟁이 아니고서는, 목숨을 맞바꿀만한 보복이 뒤따르기에... 그런데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샷건으로 무장한 이 인조 강도가 들어와 금고를 털어가는 일이 발생한다.

  "도시를 움직이는 사람은 의사당 건물이 아니라 지하에 있다. 저기, 제1의 도시? 네가 보는 곳 말이냐? 그건 놈들이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입힌 겉옷에 불과해. 몸통은 제2의 도시란다. 도박을 하고 여자와 약과 TV와 카우치 등, 노동자들이 구매 가능한 물건들을 파는 곳 말이다. 노동자가 제1의 도시와 엮일 때는 오직 도시한테 먹을 때뿐이지만, 제2의 도시는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삶과 죽음을 지배하지."

  초브카 우마로프는 제2의 도시의 왕자다.(p.69)

  로코. 독신자와 순교자의 수호성인, 그리고......

  개의 수호성인(p.86-87)

  어둠의 지배자로, 도시의 갱단을 이끄는 초브카가 직접 마브의 술집에 찾아오고, 경찰은 10년 전에 행방불명된 리치 휠런의 행적을 다시 수사한다. 밥은 개의 이름을, 독신자와 순교자의 수호성인 그리고 개의 수호성인인 '로코'라고 한다. 감옥에서 출소한 에릭 디즈는 나디아와 관계가 있고, 개의 본래 주인은 자기라고 하면서 돌려달라고 협박 한다. 모든 것이 꼬인 상황, 긴박함 속에서 매듭을 하나씩 풀어야 한다.

  1. 죄수를 믿지 말라.

  2.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3. 먼저 쏴라.

  4. 하루에 세 번 빗질하라.

  5. 놈들이 네게 해코지를 하리라.

  6. 공짜 일은 금물.

  7. 일은 신속하게.

  8. 늘 합리적으로 보여라.

  9. 개를 키워라.(p.131)

  멍청이 범죄자 에릭은 이 바닥에서 성공하기 위해 나름의 법을 만든다. 오직 자기만을 위한 규칙! 감옥에서 심혈을 다해 만들어 낸 아홉 개의 항목이다. 그런데 아홉 번째, 개를 키워라... 그는 왜 개를 키우려고 했을까?

  "예. 예전엔 속죄가 불가능한 죄가 있다고 믿었어요. 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결국 악마는 빨리 목숨이 끝나기만 기다려요. 이미 영혼을 손에 넣었으니까. 악마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죠. 죽고 나면 하느님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안됐다. 넌 못 들어와. 용서 못 할 죄를 지었으니까, 혼자 지내거라. 영원히."

  "차라리 악마가 낫겠네요."

  "그래요? 지금 생각은 달라요. 신이 아니라 우리 문제라고 생각하니까요. 이해하겠죠?"(p.167)

  밥은 개를 데려다 키우고, 여자를 알게 되고, 강도를 만나고, 협박을 당한다. 슈퍼볼 선데이, 마브의 술집이 갱단의 슈퍼볼 드롭으로 선정되고, 그날 밤에 100만 달러가 모인다...

  사실, 영화의 내용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결말을 알고 있었다.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과 배경이 상당히 잘 묘사되고, 글을 읽으며 영화의 장면이 하나하나 떠올라 색다른 재미를 느꼈다. 주인공 밥은 크게 영웅적이지 않고, 권선징악 메시지의 전달자도 아니다. 술집에서 일하고, 개를 데리고 다니고, 일요일이면 성당 미사에 참여한다. 나름의 기준으로 적정선을 유지하는 사람... 선을 넘어오면 가차 없이 일을 벌이는 통쾌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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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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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 박미영 역, [우리가 추락한 이유], 황금가지, 2018.

Dennis Lehane, [SINCE WE FELL], 2017.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5월의 어느 화요일, 레이첼은 남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p.7)

  시작부터 강렬한 첫 문장이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앞으로 전개될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기대된다. 레이첼은 지워진 과거를 찾으려 하고, 브라이언은 자기의 과거를 지우고 있다. 두 권의 작품을 읽은 듯한 기분인데, 처음 레이첼은 친아버지를 찾는 과정은 마치 자아를 찾아 떠나는 프랑스 문학 같다. 다음으로 브라이언하고의 결혼생활에서 그의 과거를 탐색하는 과정은 전형적인 미국 스릴러이다. 문학성과 오락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까? 작가의 독특한 시도, 그들은 왜 추락하게 되었을까? 아주 오랜만에 읽은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이다.

  의식적이었는지 무의식적이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나중에 레이첼은 그 미소를 아버지의 정체를 비밀로 감추기로 한 어머니의 결심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게 레이첼의 성장기를 점령한 전쟁의 주요 전투가 되었다.(p.15)

  "지워버릴 거야."

  어머닌 아저씨를 지워버렸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와 어머니 자신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던 가족에서 지워버렸고. 그냥 고집만 안 부렸으면 되었을걸, 지독한 악마.(p.60)

  레이첼의 어머니는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결혼생활에 관한 유명한 책을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영혼을 갉아먹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지독한 여자였다. 남자들이 떠나가고, 레이첼의 아버지를 인생에서 지워버린다. 교통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임을 맞이할 때도 레이첼에게 아버지에 관한 것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듯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가족들과 사업은 하지만, 사랑하진 않아. 내 인생의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하는 사이는 아니야."(p.168)

  "나는 그 사람을 모르겠더라." 그녀는 가슴에 손을 댔다. "네 남편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지적인 거 인정하는데, 얘기할 때마다 헤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말해준 게 없다는 기분이야."(p.187)

  레이첼은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처음 브라이언을 만난다. 사설 조사원으로, 그는 단서가 불분명해서 가능성이 작고 비용만 낭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대로의 조언을 한다. 이후에 그녀는 기자가 되고, 첫 번째 결혼을 하고, 지진이 난 아이티에 특파원으로 가고,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방송사고를 일으키는 등...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에서 브라이언은 늘 그녀를 격려하는 메일을 보내온다. 그리고 이혼을 마무리 지은 날,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난다.

  "어둠이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이미 죽은 목숨이죠."(p.362)

  어쩌면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부재일지도 모른다. 자아의 부재, 감각의 부재, 영혼 또는 기억의 부재.(p.371)

  수십 년의 세월을 다른 사람으로 연기하며 살 수 있을까? 레이첼은 브라이언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녀는 여전히 공황장애와 대인공포증에 시달리지만, 남편은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평범하지 않은 그녀를 남은 따가운 시선으로 보아도 그는 늘 그녀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짜인 각본이고, 대본에 충실한 배우의 연기였다면... 레이첼은 출장 간 남편을 우연히 길에서 목격하고 뒤를 밟는다. 브라이언의 또 다른 삶이 있었는데, 이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하게 된다.

  시작은 매우 좋았다. 그녀의 결혼 생활도, 소설의 재미도... 레이첼이 친아버지를 찾는 과정은 스티븐 킹이 연상될 정도로 빠르고 호쾌하고, 문학적으로 매력이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지나친 심리묘사가 속도감과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과거를 지운 남자는 결국 설계를 하는 사기꾼에 불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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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자살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3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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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 [정신자살], 황금가지, 2017.

  일본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끝맺음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숨은 이야기를 포함해서 하나하나 맞아떨어지는 결말은, 감탄과 함께 글쓰기 장인의 인고한 세월이 느껴진다. 전직 부장판사이고 현직 변호사라는 작가의 특별한 이력, 정신을 파괴해서 육체를 치료한다는 새로운 개념,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 경찰대의 희귀종 이유현의 활약, 거기에 4년 전 악연(?)이 다시 드러난다. [정신자살]이라는 제목과 소설의 시작은 매우 좋았지만, 석연치 않은 결론으로 가능성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정신자살연구소라......

  이 간단한 웹페이지가 나를 짙은 당혹감에 휩싸이게 했다. 정신을 파괴해서 육체의 생을 치유한다...... 괴이한 발상이었지만, 생사의 경계선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p.16)

  고진은 4년 전 돌연 판사직을 그만두고 법정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 후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지 않고 법정에도 나가지 않으며 오직 뒷길에서만 사건 의뢰를 받아 왔다. 정공법보다는 법률의 맹점을 이용해 제멋대로의 사건 해결을 꾀하는 그의 변칙적인 행태 때문에 은밀한 의뢰인들 사이에서는 '어둠의 변호사'라는 별명으로 꽤 알려진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유현이 고진을 알게 된 건 그가 판사를 그만두기 전, '어떤 사건'에 같이 휘말리면서였다. 두 사람의 기질은 록과 트로트의 조합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듯했지만 기묘한 앙상블을 만들어 냈다. 고진이 법원을 그만둔 뒤 일체의 연락이 끊어졌다가, 1년여 전 우연히 두 사람은 재회했다. 이유현은 4년 전의 그 사건이 고진의 신경을 휘저은 내막을 안다. 이유현은 뒷길을 걷는 고진을 탓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사건에서 발휘되는 그의 직관력을 인정하고 답답한 사건의 내막을 털어놓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동료보다 많은 것을 공유한 기묘한 관계였다.(p.31-32)

  파탄 난 결혼생활, 아내는 '미안해. 나를 찾지 마.'라는 아주 짤막한 쪽지를 남기고 1년 전에 가출했다. 아내에 대한 의존성, 예술가다운 섬세한 감성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이 돋보인 여자였다. 그녀는 왜 나를 좋아했을까? 주변에는 남자가 많았고,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아내가 사라지자 내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른 남짓한 인생, 그냥 대충 살면 곱절 이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죽음을 향해서 내달리는 무의미함이 아닌가... 자살을 생각하고, 정신자살연구소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기 편한 말로 한마디씩 던집니다. 죽을 용기로 살지 그랬어, 가족을 생각해야지...... 참 피상적인 참견이죠. 자살자들은 영원한 침묵이라는 단 하나의 구원만을 추구한 사람들입니다. 그보다 고독한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 손으로 묘혈을 파는 사람들의 운명적인 의지의 깊이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외자로서 이런저런 말을 감히 할 수는 없었지만 저에게도 그들의 짧은 생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기적보다 더 낮은 확률로 부여받은 생명이지 않습니까? 생물학적으로는 부모의 그 무수한 정자와 난자의 순열조합 중에 우연히 얻어걸린 생명입니다. 아버지가 만약 그날 회식이라도 있어 늦게 들어왔다면 성립할 수 없었던 인생입니다. 그 부모의 부모, 조조부모 세대, 그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또 그 부모의 사랑과 만남의 확률론까지 계산하면 그 생명은 한 우주의 탄생과도 맞먹는 압도적인 기적입니다. 물론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생명이야 무수히 많습니다. 하지만 '나'로부터 역산해 보면, 다른 사람이 아닌 하필 '내'가 태어날 확률은 원숭이에게 타이프라이터를 던져 주었을 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두드려 낼 확률 이하입니다. 로또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행운, 그 생명의 한 방울을 그리도 허무하게 소멸시키다니요. 의사들은 환자의 몸에 난 종기 하나를 고쳐 내기 위해 백날을 고전했는데, 정작 그 환자는 20층 빌딩 꼭대기에서 훨훨 몸을 던져 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p.44-45)

  컴퓨터 하드를 포맷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저장하듯이 인간의 정신을 초기화하고 새로운 기억을 프로그램할 수 있을까... 인간은 우울증을 비롯하여 금전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생을 끝내고 싶어 한다.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다소 실험적이면서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이탁오 박사의 등장인 4년 전에 이어서 이번에도 살인사건으로 이어진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는 사건...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는 듯한 기분... 인간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이 되기 위한 포석인가 아니면 오락처럼 즐기기 위한 장난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좋은 말씀들만으로는 자살을 막을 수 없단 말일세. 현대에서는 더 이상 정신수양으로 해탈에 이르기 힘들듯이 자살을 막는 일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해. 대신 '약물'과 '기술'이 있지 않은가. 사이코패스는 교화될 수 없지. 유일한 방법은 세로토닌을 투여하는 것뿐이야. 설교로 대응할 수 없기는 우울증도 마찬가지야. 거기엔 프로작 투여 이상의 방법은 없어. 그렇다면 자살에는 대처할 수 있는 다른 '기술'이 없을까. 생각을 바꾸면 돼. 정신이 길을 잘못 들었으면 말일세, 그걸 헛되이 단련시킬 게 아니라 오히려 병든 정신을 파괴해 버려야지. 쉽게 말해 영혼을 리셋해 버리면 된다, 이거야. 그게 이름하여 내가 하려는 정신자살 시술이란 말이지."(p.227)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 함정에 빠뜨리고,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술... 고진 변호사와 이탁오 정신과 박사는 서로 닮은 같은 부류이다. 고진은 법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고, 이탁오는 정신의 문제를 이용하여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종하고 선택하게 한다. 쫓는 자와 도망하는 자의 라이벌 구도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둘의 간격은 조금씩 좁아진다.

  흥미롭더군. 역시. 인간은 누구라도 다르지 않았어.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을 호들갑스럽게 동정하지만, 과연 내면에서도 그럴까? 상투적인 감상주의를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뒷감당 걱정 없이 설정하라면 그들은 어떤 모습을 띨까? 사람들은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자신의 주머니를 가장 먼저 들여다본단 말일세. 어느 누구라도 말이야. 자신의 목숨과 만 명의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 인간은 어느 쪽 스위치를 누를까? 아, 만 명이 부족하다면 100만 명은 어떤가? 100만 명이 죽어 자신이 산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그 반대편을 가볍게 하는 건 어때?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전재산과 100만 명의 목숨, 자기 가족의 생명과 100만 명의 목숨이라면? 난 들키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는 조건하에서는 인간은 주저 없이 자신 쪽을 보존하는 스위치를 누른다고 생각해. 무균 상태에서는 말이야. 그들이 유별난 욕심쟁이라고 생각하나? 절대 아냐. 보통 사람이야. 사람은 누구든 양심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선악을 선택해. 각자의 저울은 천차만별이라도 그 눈금은 하등 다르지 않은 게 인간이야. 인간이란 동물, 참으로 재미있지 않나......"(p.340-341)

  상황윤리, 선택의 갈림길에서 정말로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인가... 나를 우주의 중심에 두고, 나를 중심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 이것이 무너지면 과감히 생을 포기하는 불완전한 존재... 그래서 정신자살연구소를 찾아 육체 대신 정신을 파괴함으로 생을 유지하며 새로운 삶을 사는 것부터 해리성 장애와 다중인격까지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법정과 법률에 관한 생생한 서술이 장점이나 결국에는 발목을 잡은듯하다. 사회파 미스터리로 우리나라의 '자살 문제'를 심층 다루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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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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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황금가지, 2017.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라 트라비아타>는 '길을 잘못 든 여자'라는 뜻이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것을 미리 알았다면, 쉽게 범인을 유추할 수 있었을까? 중의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지막 충격이 정말 제대로인데, 예전에는 부장판사였다가 지금은 현직 변호사인 도진기 작가의 소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흥미롭게 읽었다. 변호사가 쓴 추리소설... 변호사 고진이 등장하는 시리즈이다.

  이유현은 경찰대를 졸업하자마자 제 발로 지방경찰서 강력팀을 찾은 '경찰대의 희귀종'이었다. 말단 형사로 출발하여 현재의 팀장이 될 때까지 수년간 현장에서만 경험을 쌓아왔다. 경찰대 출신이라면 곧장 지구대소장으로 임명을 받거나 관리부서에서 펜대를 굴리고 일선의 경찰관들이 발로 뛰며 만들어 온 사건기록을 뒤적이며 커리어를 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치열한 사건 한가운데에 있고 싶었다. 페이퍼 작업을 할 것 같았으면 다른 직업을 택했을 것이었다. 계급은 자신보다 낮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 온 노련한 형사들에게 배운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뛰어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팀장이 되었고, 그마저 한 달 뒤면 햇수로 벌써 2년을 채우게 된다.(p.8-9)

  "형님! 이러실 겁니까!"

  킬킬킬.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건너왔다.

  "자네가 전화할 줄 알았어."

  그 웃음소리의 주인은, 소위 '어둠의 변호사'라 불리는 고진이었다.(p.22)

  직업의 전문성은 법정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다. 경찰대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쌓은 경험으로 강력팀장에 오른 '경찰대의 희귀종' 이유현과 돌연 판사를 그만두고 사라졌다가 뒷골목에서 법의 맹점을 이용하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 둘은 물과 기름처럼 확실히 다르지만, 기이하게도 케미(?)를 일으킨다. 심상치 않은 두 캐릭터는... 한 명은 사건 현장을 누비며, 다른 한 명은 법의 테두리에서 사건을 분석하며 진실에 다가선다.

  "피고인 조판걸은 서초동 H 아파트 경비로 일하는 자로서, 11월 20일 밤 11시경, 3동 204호에 침입해 정유미를 송곳으로 목을 찔러 살해하고, 이어 위층에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올라온 아래층 104호 입주자 이필호의 목을 과도로 찔러 살해했습니다."(p.12)

  치정, 원한 관계에서부터 사건을 풀어 나갈 것이 아니라 처음에 시도했던 것처럼 순전히 범행 방법의 측면에서 범행의 실행 가능성을 따져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미녀와 스토커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특성 때문에 원한, 치정, 남자관계를 뒤적거렸던 건 낡은 선입견이었을 수 있다.(p.103-104)

  유흥주점에 나가는 여자가 자신의 집에서 남자친구와 통화하는 중에 살해된다. 남자친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여자와 아래층 남자이다. 미녀와 그녀를 따라다닌 스토커의 죽음은 단순 강도를 넘어서 치정이나 원한을 떠오르게 한다. 경찰은 인물 관계와 주변인 알리바이를 조사하고... 수사를 논리적으로 진행하지만, 눈에 띄는 단서가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추리소설을 쓰는 공식을 아는 것처럼, 재미를 주며 줄다리기를 한다.

  "현대의 기술 앞에 범죄의 설자리는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고들 말하지. 지문, DNA, 혈흔 분석 같은 거야 물론 예전부터 있었지만, 요즘은 사건 생기면 딱 세 가지만 보면 되잖아? 휴대폰, 이메일, 그리고 통장 계좌. 이거만 뒤져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다 나와. 그래서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트릭은 대부분 현대에는 성립이 안 돼.

  하지만 말이야. 난 좀 생각이 달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만큼 새로운 트릭의 지평도 그만큼 넓어진 거야. 수사기관을 속일 수단도, 기발한 범죄의 여지도 얼마든지 더 생겨난 거야. 그런 내 이론을 김형빈이 그대로 실현해 보여 줬어. 정말 재미있지 않나? 하하하."(p.160-161)

  "휴대폰 통화를 이용한 심리 트릭이든 시간 차 트릭이든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공범이 따로 있다, 이런 얘긴데 말이야. 그게 모순되는 이야기란 거야. 애당초 김형빈을 범인으로 생각했던 건 그가 휴대폰 통화를 이용한 심리 트릭 혹은 시간 차 트릭을 사용했다는 전제하에서란 말이야. 다시 말해 그런 트릭을 사용했다면 김형빈이 범인이라는 가설이 성립한다는 거야. 그런데 그런 전제를 잊어버리고 '김형빈 범인설'에만 집착해서, 트릭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는데도 김형빈이 무조건 범인이다, 그런데 트릭이 없었다, 그렇다면 공범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 나간다는 건 논리의 오류지 않겠어?"(p.200-201)

  억울하게 법정에 선 용의자, 어둠의 변호사 고진의 보이지 않는 활약으로 누명은 벗겨지고 재수사가 시작된다. 휴대폰 통화를 이용한 심리 트릭과 시간 차 트릭... 현관의 CCTV를 비껴가는 치밀한 움직임은 다른 용의자를 찾게된다. 작가는 맥거핀(MacGuffin)을 제법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의도적으로 독자의 시선을 한 방향으로 묶어둔다. 치정이나 원한의 복수극이 아니라면, 어떤 이유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실상은 매우 추잡하고, 공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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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관 - 밀실 살인이 너무 많다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오리하라 이치, 김은모 역, [일곱 개의 관], 한스미디어, 2015.

Orihara Ichi, [NANATSU NO HITSGI](The Seven Coffins : Too Many Locked Room Murders), 1992.

  오랜만에 읽은 신본격 미스터리이다. 오리하라 이치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드디어 작품을 만났다. [일곱 개의 관](밀실 살인이 너무 많다)은 밀실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는(이게 매우 흥미롭다) 연작 단편이다. 개인적인 소견은 짧은 글 모음이라서 쉽게 읽을 수 있고, 밀실이라는 일관된 흐름이라서 시선을 빼앗긴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으로 지금 하고는 살짝 코드(?)가 어긋나고, 나이가 들어 내 눈이 높아져서일까... 수수께끼 풀이나 퍼즐 맞추기 같은 오락적인 재미 외에 다른 감동은 없어서 아쉬움이 있다.

  밀실의 왕자

  존 딕슨 카를 읽는 사나이들

  불량한 밀실

  그리운 밀실

  와키혼진 살인사건

  불투명한 밀실

  천외소실(天外消失) 사건

  (작가 후기)

  밀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작가는 모든 문이 잠긴 현장을 하나의 관으로 본다. 여기저기에서 존 딕슨 카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는데, 아마도 그의 소설 [세 개의 관](엘릭시르, 2017.)을 오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추리소설에서 밀실만큼 매력 있는 게 또 있을까? 하지만 독자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부담은 적지 않을 것이다. 도쿄에서 떨어진 시라오카 마을을 배경으로, 구로호시 히카루 경감과 다케우치 마사히로 형사의 활약은 좌충우돌이다. 살인사건이지만, 무겁고 잔혹함이 아닌 가볍고 유쾌함으로 독자와의 한 판 두뇌 싸움을 벌인다. 예상을 뛰어넘는 재치가 있다.

  구로호시 경감은 일류대 출신으로 원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을 예정이었지만, 추리소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화근이 되어 실패를 거듭했다. 예를 들면 지극히 간단한 사건을 맡아놓고 의외의 인물을 범인으로 지적하거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방을 밀실로 취급하여 과거에 수많은 간단한 사건을 미궁에 빠뜨렸다. 그 때문에 '미궁 경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출셋길에서 내려와 시라오카라는 벽촌의 작은 경찰서에서 언제까지고 경감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p.15)

  다섯 명이 주민 체육관에서 밤새 술을 먹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 명이 피살되었다... 한적한 외각 주택의 서재에서 존 딕슨 카의 소설과 함께 4년 만에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야쿠자 간의 불화로 로켓포가 등장하고, 이것을 방어하기 위한 대피소에서 보스가 죽는다... 원고 마감을 코앞에 둔 유명 추리작가는 편집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라졌다가 2년 만에 시신으로 돌아온다... 원하지 않는 결혼식 첫날밤에 신랑은 죽임을 맞이하고... 2층 테라스의 문이 잠긴 상태에서 건설사 사장은 칼에 찔린다... 시라오카산을 오르내리는 리프트 안에서 일어난 살인, 시체는 있으나 범인은 없다... 여기에는 완벽한 일곱 개의 밀실이 등장한다.

  시종일관 구로호시 경감은 밀실에 집착하는데, 미궁에 빠진 사건을 단숨에 해결해서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작가의 밀실에 관한 로망을 잘 대변한다. 단순한 트릭이 아니라 밀실을 구상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해결을 제시해야 하는 추리작가의 숙명이 경감의 모습에서 투영된다. 작가는 후기에서 처음 기고한 작품을 마지막에 수록했다고 하는데, [천외소실 사건]이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있었던 일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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