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데니스 루헤인, 박미영 역, [우리가 추락한 이유], 황금가지, 2018.

Dennis Lehane, [SINCE WE FELL], 2017.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5월의 어느 화요일, 레이첼은 남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p.7)

  시작부터 강렬한 첫 문장이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앞으로 전개될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기대된다. 레이첼은 지워진 과거를 찾으려 하고, 브라이언은 자기의 과거를 지우고 있다. 두 권의 작품을 읽은 듯한 기분인데, 처음 레이첼은 친아버지를 찾는 과정은 마치 자아를 찾아 떠나는 프랑스 문학 같다. 다음으로 브라이언하고의 결혼생활에서 그의 과거를 탐색하는 과정은 전형적인 미국 스릴러이다. 문학성과 오락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까? 작가의 독특한 시도, 그들은 왜 추락하게 되었을까? 아주 오랜만에 읽은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이다.

  의식적이었는지 무의식적이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나중에 레이첼은 그 미소를 아버지의 정체를 비밀로 감추기로 한 어머니의 결심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게 레이첼의 성장기를 점령한 전쟁의 주요 전투가 되었다.(p.15)

  "지워버릴 거야."

  어머닌 아저씨를 지워버렸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와 어머니 자신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던 가족에서 지워버렸고. 그냥 고집만 안 부렸으면 되었을걸, 지독한 악마.(p.60)

  레이첼의 어머니는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결혼생활에 관한 유명한 책을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영혼을 갉아먹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지독한 여자였다. 남자들이 떠나가고, 레이첼의 아버지를 인생에서 지워버린다. 교통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임을 맞이할 때도 레이첼에게 아버지에 관한 것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듯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가족들과 사업은 하지만, 사랑하진 않아. 내 인생의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하는 사이는 아니야."(p.168)

  "나는 그 사람을 모르겠더라." 그녀는 가슴에 손을 댔다. "네 남편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지적인 거 인정하는데, 얘기할 때마다 헤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말해준 게 없다는 기분이야."(p.187)

  레이첼은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처음 브라이언을 만난다. 사설 조사원으로, 그는 단서가 불분명해서 가능성이 작고 비용만 낭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대로의 조언을 한다. 이후에 그녀는 기자가 되고, 첫 번째 결혼을 하고, 지진이 난 아이티에 특파원으로 가고,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방송사고를 일으키는 등...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에서 브라이언은 늘 그녀를 격려하는 메일을 보내온다. 그리고 이혼을 마무리 지은 날,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난다.

  "어둠이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이미 죽은 목숨이죠."(p.362)

  어쩌면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부재일지도 모른다. 자아의 부재, 감각의 부재, 영혼 또는 기억의 부재.(p.371)

  수십 년의 세월을 다른 사람으로 연기하며 살 수 있을까? 레이첼은 브라이언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녀는 여전히 공황장애와 대인공포증에 시달리지만, 남편은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평범하지 않은 그녀를 남은 따가운 시선으로 보아도 그는 늘 그녀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짜인 각본이고, 대본에 충실한 배우의 연기였다면... 레이첼은 출장 간 남편을 우연히 길에서 목격하고 뒤를 밟는다. 브라이언의 또 다른 삶이 있었는데, 이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하게 된다.

  시작은 매우 좋았다. 그녀의 결혼 생활도, 소설의 재미도... 레이첼이 친아버지를 찾는 과정은 스티븐 킹이 연상될 정도로 빠르고 호쾌하고, 문학적으로 매력이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지나친 심리묘사가 속도감과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과거를 지운 남자는 결국 설계를 하는 사기꾼에 불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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