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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을
박솔뫼
자음과모음
올해의 독서 계획 중 하나는 한국 작가의 소설 읽기이다. 각 출판사가 선정한 수상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이 마음에 와 닿으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사이드북으로 끼워 읽는 것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제 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인 박솔뫼의 「을이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읽어서인지, 오랫만에 나선 서울 나들이에 들떠서인지 이 소설의 초반부는 참 어색하고 낯설었다.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중심인물은 "을"이다. 노을을 줄여 "을"이라 불리우는 을은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이 말로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관심 갖고 질문하거나 웃고 떠드는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하면서 공장의 소음 안에서는 평온함을 느끼는 묘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래서인지 조용히 들어 주고, 적당히 맞장구 치며, 억지로 캐고 들지 않는 민주를 무한 신뢰하며 의지한다.
- 을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싫었지만 도시는 언제나 좋았다. 흰색과 검은색의 빽빽함. 건물들은 침묵을 지키고 자동차들은 예측할 수 있는 소리를 냈다. 을은 도시가 갖고 있는 기계적임에서 안정을 찾았다. p35-
을은 이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민주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변변치 못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을의 부름을 받고 고국을 떠나 을이 머무는 호텔에 함께 장기 투숙하고 있다. 이들이 장기 투숙하고 있는 호텔의 하우스키퍼로 일하는 씨안은 여행 중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우연히 머무른 호텔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의미없는 반복된 일상을 보낸다. 또 다른 장기 투숙자인 프래니와 주이는 사촌 자매이자 연인인 자신들의 사랑과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국을 떠나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다. 편견없이, 편하게 대해 주는 씨안과 함께...
어느 날, 프래니와 주이 사이에 제 3의 인물이 나타나게 되고, 프래니는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그 일로 인해 무미 건조하고, 아무 걱정도, 목적도 없이 살아가던 이들에게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프래니와 주이 사이에 제 3의 인물인 손님이, 바원과 윤 사이에 과거의 민주가, 을과 민주 사이에 씨안이, 씨안이 자주 보던 영화속에서는 새로이 등장하는 주인공이 각각의 평화로운 관계 속에 파괴범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둘이 있을 때는 원할하게 지나가던 일상이, 대화가, 관계가 무참하게 깨어지는 것이다.
-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 씨안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언젠가는 학교로, 집으로, 방으로 도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되도록 늦어지기를 바랐다. …… 내가 이곳을 떠날 그 언젠가가 일주일 미뤄졌으면 좋겠어. 그 일주일이 지나면 일주일을 더 연장시킬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언젠가를 늦춰난가고 싶어. 원하는 것을 입 밖에 내자 그것은 더욱 간절해졌다. p90-
작가는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던 커플들이 제 3의 인물의 침입에 의해 깨어지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무얼 밝히고자 한 것일까? 제 3의 인물이 나타나기 전까지 둘의 모습이 엄청 행복하다거나 딱히 만족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저 잔잔할 뿐. 평범한 사람을 지칭하는 갑. 을. 병. 정처럼 "을"이라는 인물은 우리 사는 세계의 평범한 한 인물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마음가는대로 가고, 하고자 하는대로 행동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 그래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영원히 갖혀 있고 싶은 사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200 페이지의 얇은 이 책은 특별한 사건없이 잔잔하게 흘러 가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읽으면서도 갸우뚱, 책을 덮고 나서도 갸우뚱.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씩 머릿속에 떠 오르는 것들이 있다. 아~ 그래서 을이 그런 행동을 했구나. 이래서 씨안이 그런 행동을 했구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이 나를 살펴봐 주길 원하는 마음 한편에는 나에게 무관심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데나 갈 수 있잖아. 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