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보기
혜민 지음, 이영철 그림 / 쌤앤파커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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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바다 건너에 사는 대학 동기에게 이 책을 보내고 싶다.
국제 우편도 착불이 될라나?ㅋㅋ

그 친구가 그랬다고 한다. 비 오는 날 술 한잔 마시고,
"어이! 거기 구름 뒤에 계셔? 계시면 대답해 봐요. 점쟁이가 올해엔 뒤로 넘어저도 일이 잘 된다고 했는데, 10월이 되도록 왜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거야? 거기 계시면 구름을 걷고 나와보라구요!" 하고 창문을 열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고 한다. 그랬더니 하느님이 대답이라도 하듯 우르릉 천둥이 쳤다나? 놀라서 창문 닫고 돌아서니 남편이 한마디 하더란다. 비만 오면 지랄을 한다고.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는지, 항상 웃음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베스트프렌드다. 그 친구에게 이 책을 이렇게 권하고 싶다. 지난 2년 동안 '하우스푸어'로 지낸 고단한 내 삶에 큰 위로가 된 책이라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잠깐 멈춰서 내 생각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그래, '내 안에 잠든 부처를 깨우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안에 하눌님을 모셨다'고 했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선생의 깨우침이 이 책을 읽고 나면 10분의 1 이해가 된다고 하면 과장일까?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고 했던 원효대사에게 조금은 공감한다고 하면 내가 너무 경망스러운 걸까?
작은 노트를 사서 필사하며 곱씹으며 읽었다.
그래, 이 책을 친구에게 보내고 '성경'을 조금씩 필사하며 생각을 다듬어야겠다. 난 도인이 아니라서 마음먹기가 힘이 드니, 생각을 조금씩 조금씩 다듬다 보면 동그랗 단단한 생각이라는 것이 생기겠지. 내 안에 잠든 부처를 깨워서 소곤거리며 그렇게 살아야겠다.

책을 권해주신 그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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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 한국사 속 두 사람 이야기 10살부터 읽는 어린이 교양 역사
윤희진 지음, 이강훈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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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평등한 부부


시대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부는 평등해야 한다. 아직도 우리네 가정에는 부인은 남편을 존경해야 하고 남편은 부인의 존경을 받으려고만 하는 불평등한 분위기가 팽배하다. 또 한편에서 남편들은 힘들다고 아우성치기도 한다. 밖에서는 명퇴 명단에 끼지 않으려고 노심초사 하다 늦게 퇴근해서 집에 오면 집안일을 소위 내 일처럼 진심으로 하여야만 이웃집 남자와 비교당하지 않고 가정을 지켜나갈 수 있다. 부부는 평등해야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무엇을 더해야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을까.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되는 부부가 있다.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윤희진 글, 이강훈 그림, 책과함께어린이 펴냄)에 두 번 째 로 소개된 유희춘과 송덕봉이다.

유희춘과 송덕봉은 ‘여필종부 남존여비’라는 생각이 만연한 조선시대를 살았던 부부이다. 어떻게 평등할 수 있었을까. 유희춘과 송덕봉은 부부 사이에 진정한 평등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그들은 가부장제가 기둥이었던 유교 사회에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고 사회분위기를 바꾸고자 그 어떤 애도 쓰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서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았다.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일에는 적극 애쓰면서 말이다. 유희춘은 며칠째 숙직을 하기도 하는 바깥일을 해내며 책을 즐겨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송덕봉 또한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는 일에 학문이 깊은 특기를 발휘했다.

서로를 존중하는 그들은 편지글에 애정을 담았고 소소한 일상을 다정하게 나누었다. 유희춘은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과의 상봉에 기쁨을 감추지 않고 미리 다과를 준비해 놓고 새로이 마련하는 보금자리를 미리 손 봐 놓는 센스를 발휘한다. 세심하지 못한 남자의 손길에 송덕봉이 투정을 부렸더니 유희춘은 금세 잘못을 시인하고 고쳐 행동했다. 주변을 정리하지 못하는 유희춘에게 송덕봉의 꼼꼼함은 큰 도움이 되었고, 그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일을 유희춘은 놓치지 않는다. 55세 때부터 매일같이 쓴 일기에 아내 송덕봉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적어놓았으니, 마음은 기록으로 증명해야 마땅하다. 그 기록의 힘은 다른 시대를 사는 오늘날까지 전해져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부인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 없이 그런 기록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부부지간의 평등은 힘든 집안일 따위를 도와주는 것을 넘어 진정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일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다.

이 책의 작가 윤희진은 역사 속 인물들을 살펴보며 끊을 수 없는 중요한 관계를 맺은, 어찌 보면 하늘이 맺어준 ‘인연’에 초점을 두었다. 부모 자식 관계, 부부 관계, 친구 관계, 군신 관계 등으로 맺어진 역사 속의 인연은 세상 그 어떤 잘난 인물도 혼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인물의 일대기나 업적을 나열하는데 치우친 기존의 전기문과는 다르게 관계 속에 있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어 특별하고도 신선한 위인전이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관계맺음을 잘 해야 하는 인연은 부부사이가 아닐까? 남녀가 만나 가정이라는 일차적인 집단이 생기고 사회가 이루어지니 평등한 부부 사이에 경쟁력 있는 자식이 나올 것이며 건전한 나라가 이루지는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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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 한국사 속 두 사람 이야기 10살부터 읽는 어린이 교양 역사
윤희진 지음, 이강훈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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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 대한 고민으로 힘들어 할 때면 이웃들은 종종 이렇게 조언해준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무슨 말인가? 자식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 이상을 주려고 애쓰기보다 그저 본보기가 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는 말이다. 정말 자식에게 모범이 되는 등을 보여준 세상 모든 아버지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 있다.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윤희진 글, 이강훈 그림, 책과함께어린이 펴냄) 중 첫 번째로 소개된 박지원이다. 그리고 박지원을 본받은 아들 박종채이다.

이 책의 작가 윤희진은 역사 속 인물들을 살펴보며 끊을 수 없는 중요한 관계를 맺은, 어찌 보면 하늘이 맺어준 ‘인연’에 초점을 두었다.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사람들은 저 혼자 잘날 수 없는 것이 이치다. 그래서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는 정말 특별하고도 색다른 위인전이 되었다. 인물의 일대기나 업적을 기록하는데 치우친 딱딱한 전기문이 아닌 역사 속 인물도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았다는 것을 말하며 현대의 우리들과 멀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뜻한 대화체의 문체 또한 전기문을 더욱 재미있게 해주는 큰 역할을 했다.

세상에 태어나 제일 처음으로 맺게 되는 인연, 그러하기에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인연은 무엇일까?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다. 작가도 아마 이런 생각으로 첫 번째 꼭지에 박지원과 박종채의 관계를 담았을 것이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은 현대에서도 보기 드문 자상한 아버지였다. 원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서 자식들과 한 상에서 밥을 먹지 않는 조선시대의 규율을 지키고, 임기를 채우지 않고 승진을 해도 되는 관례에 일침을 놓는 위엄을 보였지만 핏줄을 챙기는 다정다감함은 놀라울 정도로 끔찍했다.

지방 근무로 가족들과 멀어지자 고추장을 담그고, 밑반찬을 해서 다정한 편지와 함께 보내며 답장을 채근하는 아버지, 현대에 정치권이나 연예계 인사들 중에도 이런 기러기 아버지가 있다면 언론에 소개될 일이 아닐까. 손주에 대한 사랑도 끔찍해서 보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은 편지를 보낸 것이며 열하일기에 대한 하소연을 박종채에게 한 것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간의 대화가 얼마나 소소하고 친근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현대의 아버지들이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박종채는 그 존경심을 숨기지 않고 아버지의 전기 <과정록>을 쓴다. 자식이 전기문을 써주다니, 이보다 더 큰 영광과 명예가 어디 있겠는가. 박종채는 또한 아버지의 모범이 되는 모습을 그대로 몸에 담아 개화사상의 뿌리가 되는 박규수를 훌륭히 길러낸다. 부정이 대물림 된 것이다. 또한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속에 사랑이 넘치면 그 아우라가 세상에 전달되어 이렇게 훌륭한 업적 또한 남길 수 있다는 본을 보였다.

박지원을 그저 <열하일기>라는 업적을 남긴 학자라는 인식에 다정한 아버지라는 새로운 관점을 더한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기록한 아들’ 이야기는 이 세상의 아버지와 아들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이 이상적인가를 보여주는 글이다. 우리 모두 읽어보고 가족 안에 좀 더 따뜻한 훈기를 담을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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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치마
이형진 글 그림 / 느림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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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면, 어릴 적에 친구가 입은 예쁜 원피스가 너무나 탐이 났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달라고 조르고 조르다 급기야 부모를 바꿔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구나 품어보았을 거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아이들은 손에 쥔 아이스크림 하나가 세상의 전부이고, 다가올 추석에 새로 가지게 될 게임기를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여기, 아이들 마음을 정말 잘 아는 이가 있다. ‘비단 치마’ (느림보 펴냄)의 작가 이형진이다.

작가는 어린 여자 아이인 심청이가 과연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픈 온전한 효심만으로 인당수에 몸을 던졌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은 것 같다. 그래서 심청전을 현대적 의미로 다시 썼다. ‘비단 치마’는 훌륭하다. 읽고 나면 심청이의 엄청난 효심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고전과 달리 청이가 모든 선택의 주체가 되어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내는 모습은 마치 나에게 이런 친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느껴진다.

아버지를 향한 효심으로 인당수에 몸을 날렸던 고전의 내용과 다르게 고운 비단치마에 혹해서 장사꾼들을 따라 나서지만 죽음 앞에 직면해서 살고 싶다고 발악하는 ‘비단치마’의 청이, 높은 파도가 일어 배를 삼켜버리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물 위로 떠오른 청이는 나무 궤짝 하나를 부여잡고 목숨을 부지한다. 죽어서 용왕님을 감동시켜 다시 살아나는 ‘심청전’과는 다르다. ‘비단치마’에서 청이는 잠시 정신을 잃었는데 어쩌다 커다란 연꽃 속에 들어가 있다. 이 부분을 잠시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 이유는 원전의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것이다. 연꽃에서 몸을 일으키며 주변의 소리를 들은 청이는 부잣집 아씨가 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제 정말 행복한 부자 아가씨가 되었구나 하는데, 아버지가 비렁뱅이가 되어 나타났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비단치마’가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결정적 이유가 결말에서 청이의 심리변화를 묘사한 점이다. 비단치마에 혹한 여자 아이는 눈먼 비렁뱅이 아버지를 외면하고 마는 것이 당연하다. 방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숨었는데 질긴 핏줄은 방안으로까지 들어와 청이의 양심을 후벼 파고야 말았다. 자신에게 나쁜 소리하는 건 듣기 싫어 아니라고 버럭 소리를 질러버리는 청이, 아이답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는 허탈함과 아버지를 보고 싶었던 마음, 아버지가 눈을 뜨게 되어 반가운 마음 모두가 울음으로 터진 그림이 참 감동적이다.

이제 신분이 탄로 났으니 비굴하게 사는 것은 싫다. 또다시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는데 비단치마를 입고 있은 들 무슨 소용이랴. 청이는 이제 알았다. 불같이 일어난 욕심은 높이 솟구친 파도처럼 일순간 허망일 뿐이라는 것을. 결국 불은 꺼지고 파도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는 것을. 청이는 성장기의 홍역을 한바탕 호되게 앓고 이제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제 아버지가 눈도 떴으니 예전처럼 농사를 지을 지언 정 조금의 희망은 있다. 언제나 선망하던 비단치마를 실컷 입어보았으니 이제 그 힘으로 두 주먹 불끈 쥐고 힘껏 살아낼 것이다.

‘비단 치마’가 훌륭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림이다. 소녀로서의 욕망을 펜의 섬세한 터치로 그려 항상 뭔가가 들끓고 있는 그런 느낌을 잘 표현했다. 역동적인 그림과 대담한 유화의 색채는 한때의 홍역을 앓아내는 청이의 마음을 더 실감나게 한다. 장사꾼들이 높이 쳐든 비단치마를 가지고픈 욕심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불길이 일어나는 모습이 정말 잘 표현되어 있다. 성난 파도 앞에서 살려 달라 울부짓는 그림, 살고픈 욕망에 물속에서 두 눈 부릅뜬 장면, 아버지를 보고 놀라고 당황한 청이의 표정, 아버지가 눈을 뜨고 한바탕 울음을 쏟아내는 장면에는 만감이 교차한 심리를 정말이지 잘 표현해냈다.

고전이 현실감 없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멀리할 것은 아니다. 고전은 물질과 정보가 만능한 현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하고, 권선징악의 결말이 따뜻한 도덕심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가까이 두어야 한다. 그러나 스토리가 갖는 거리감은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데, 유교와 불교의 사상이 바탕이 된 심청전을 현대적 의미로 제법 있을 법한 이야기로 각색한 ‘비단치마’는 훌륭한 대안이 되고 있다. 더구나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작가의 시선에 박수를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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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을 점령하라 사계절 중학년문고 4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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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때 강릉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살았다.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우리 집을 중심으로 윗집과 아래 집, 집은 모두 세 채이고, 과수원과 한 눈에 보이는 작은 논밭이 있었다. 그 논밭의 대부분은 윗집의 땅이었고, 아래 집은 사과를 심은 과수원이었다. 그때 내가 경험했던 과수원은 정말 신비로운 곳이었다. 향긋한 사과 향이 나에게 놀러 오라고 손짓했지만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엄마는 타향살이를 하는 우리가 혹시 이웃과 적을 지게 될까봐 과수원 근처엔 절대 혼자 가지 못하게 했다. 어쩌다 엄마가 마실 갈 때 따라 가서 어설피 본 과수원 정경은 정말 예뻤다. 우뚝 솟은 초록빛 산 아래 하얀 종이 봉지가 씌워진 많은 사과들은 정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빨간 벽돌의 아담한 집은 그 집에 맡겨진 할머니 손녀들을 부럽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 집에 또 놀러 가고 싶어 종종 입구까지 갔다가 떨어진 호두만 몇 개 주워 와서 작은 오빠와 돌멩이로 두드려 까먹곤 했고, 익은 사과 냄새가 우리 집까지 풍겨오면 “엄마, 사과 냄새 난다.” 해서 엄마는 벌레 먹은 사과를 한 상자 씩 사오곤 하셨다. 그때 엄마가 만들어준 사과 쨈을 생각하니 지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혀끝이 달달해진다. 그래서 나는 과수원이라 하면 향긋한 사과 향을 머금은 안개가 저 멀리서 천천히 조용히 나에게로 오는 것만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떠오른다.

그런데 과수원을 점령하라니, 아이들이 과일 서리라도 하는 이야기라면 별 매력이 없을 것 같다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는데, 역시 이곳의 과수원 또한 내 기억 속 그곳과 흡사해서 반가웠고 그때 실컷 뛰어놀지 못했던 아쉬움을 이곳에서 말끔히 덜어내는 것만 같아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래, 과수원이라는 곳은 그 향긋한 과일 냄새가 사람과 동물과 미물들에게까지도 ‘여기 오라’ 손짓한다는 생각으로 ‘황선미’ 작가도 출발하지 않았을까? 아파트가 즐비한 신도시 한켠의 작고 조용한 과수원에서 작아서 주목받지 못하는 동물들과 할머니가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과수원 귀퉁이에서 어쩌다 생기게 된 물웅덩이에서 물장구를 치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던, 단지 과수원의 벌레들을 잡는 도구로 활용되던 오리들이 연못의 황소개구리를 소탕하는 과업을 이루며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을 받게 되는 처음 이야기는 ‘이거 정말 재미있네.’ 하는 감탄이 나왔다. 다음 장을 넘기니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 되어 ‘뭐야, 장편 동화 아니야?’했는데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게도 여러 개의 이야기가 한 장면 한 장면씩 만나는 퍼즐 형태의 구조를 띄고 있었다. 그래서 작가는 오리들이 과수원에서 연못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어난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지만 다소 소란스러운 사건을 마치 “너, 오리들이 연못으로 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 너한테만 들려주는 거야.” 하고 귓속말을 하듯 이야기를 한다. 그 귓속말을 듣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참 작품성이 있는 훌륭한 동화구나 여겨졌다.

대장 오리가 공원을 가로질러 연못으로 가며 목격하게 되는 이상한 장면은 이랬다. 멀쩡하던 나뭇가지가 저절로 갈라져 사람에게로 떨어지는 찰나, 나무를 오르던 고양이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를 목격한 오리가 꽥꽥 소란을 피운 덕에 그 나뭇가지 아래에 있던 구청장은 안전할 수 있었다. 그 나뭇가지에 올랐던 고양이는 순진한 애완 고양이 ‘호피’였고, 짖궂은 주인 꼬마가 수염을 뽑는 통에 깜짝 놀라 나무 위로 튄 것이었다. 그 나무는 한때 배꽃마을을 수호하던 당산 나무였는데 마을이 신도시로 바뀌며 사람들의 푸대접에 점점 말라갔고, 그곳에는 안타깝게 연명하고 있는 나무귀신이 있었다. 그 나무귀신을 보고 겁을 먹은 호피는 쥐들의 소굴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고생을 하고 나중에 야생 고양이에 가까워져 과수원의 철조망을 넘는다. 공원에 버려진 책상 안에서 사는, 호피를 산 채로 잡아 졸병으로 부리는 당찬 쥐들은 개발에 밀려 살 곳을 잃고, 먹을 것이 풍부한 과수원을 발견하게 되어 철조망을 넘지만 결국 실패한다. 야생화 된 호피가 으르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피는 쥐들이 살아갈 다른 보금자리를 안내하지만 그곳에서 잘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아버지의 고향인 배꽃마을을 찾아 온 철새 찌르레기는 이미 과수원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까치들의 텃새에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오리들의 노력어린 중재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과수원으로 돌진하여 한바탕 곤욕을 치른다. 이 찌르레기들과 다정한 이웃이 되어 살고픈 나무귀신은 오리의 등을 빌려 나무를 옮겨 타는 이사를 감행하고, 예전 당산나무에 있었던 과수원 할머니의 소원 주머니를 찌르레기의 도움을 받아 주인에게 전한다. 그래서 과수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기를 가지고픈 소망은 이루어지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과수원집 할머니의 보물지도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연신 미소가 머금어질 만큼 예쁘고 소담스러웠다. 아기를 바라는 마음이 혹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 차마 말을 못하고, 예쁜 아기 물건을 사서 집안 곳곳에 숨겨두고 나중에 찾지 못할까봐 지도를 그려둔 할머니의 마음이 정말 사랑스럽기까지 했고, 그 할머니의 소중한 지도가 바람에 날려 과수원의 뒤뜰에 사뿐히 내려앉는 광경은 과수원을 예쁜 곳으로 보이게 했고, 이 동화를 예쁘게 만들어주었다.

책장을 덮으며 또 한 번 미소를 짓는다. 과수원에 살고 과수원에 살고 싶어 하는 오리, 고양이, 쥐, 찌르레기, 나무귀신, 사람들의 예쁘고 소담한 이야기가 참 재미있어서. 아직도 어릴 적 과수원집 손녀들이 부러워서. 어떤 이는 인터넷 서점에 이 책을 읽고 아이들과 토론한 기록문을 올려놓았는데 사람과 자연물과의 공생이 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린 아이들과 참 깊이 있는 대화를 한 것 자체가 놀랍다. 나는 그저 아파트 촌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시골스러운 정경의 예쁜 과수원, 그 과수원과 얽힌 예쁘고 작은 이야기들 외의 것을 생각하기 어려웠는데. 꼭 동화에서 주제 의식을 찾아야 맛일까. 나는 그러기보다 동화가 갖고 있는 감동과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우리 남편은 동화작가 중에 황선미가 제일 좋다 했다. 제일 잘 쓰는 것 같다고. 사람들도 ‘마당을 나온 암탉’의 작가 황선미를 칭송한다. 동화가 뭔지도 몰랐던 몇 년 전 그러니까 결혼 전에 서점에서 본 ‘나쁜어린이표’라는 책에서 나는 황선미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다. 나쁜 어린이 표라니, 왠지 삼류 티가 나는 껄끄러운 제목이라 책을 보기도 전에 그렇고 그런 작가로 치부해버렸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기 어렵듯이 책 또한 그런 것 같다. 이번에 처음 읽은 황선미 작가의 작품 ‘과수원을 점령하라’로 인해 ‘나쁜어린이표’도 읽어보고 싶어지고 ‘마당을 나온 암탉’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서울예술대학’ 출신의 작가들은 어쩌면 이리도 정경묘사를 예쁘고 깔끔하게 잘 하는지 글 솜씨가 부럽다.

어릴 적 나의 산골 마을은 아직도 여전할까. 과수원이 아직도 건재하다면 다시 찾아가서 먹는 사과 맛은 얼마나 좋을까. 나도 벌레 먹은 사과를 한 상자 사오고 싶다.  그곳이 아니라면 황선미의 과수원에 찾아가 배를 한 상자 사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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