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치마
이형진 글 그림 / 느림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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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면, 어릴 적에 친구가 입은 예쁜 원피스가 너무나 탐이 났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달라고 조르고 조르다 급기야 부모를 바꿔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구나 품어보았을 거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아이들은 손에 쥔 아이스크림 하나가 세상의 전부이고, 다가올 추석에 새로 가지게 될 게임기를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여기, 아이들 마음을 정말 잘 아는 이가 있다. ‘비단 치마’ (느림보 펴냄)의 작가 이형진이다.

작가는 어린 여자 아이인 심청이가 과연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픈 온전한 효심만으로 인당수에 몸을 던졌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은 것 같다. 그래서 심청전을 현대적 의미로 다시 썼다. ‘비단 치마’는 훌륭하다. 읽고 나면 심청이의 엄청난 효심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고전과 달리 청이가 모든 선택의 주체가 되어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내는 모습은 마치 나에게 이런 친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느껴진다.

아버지를 향한 효심으로 인당수에 몸을 날렸던 고전의 내용과 다르게 고운 비단치마에 혹해서 장사꾼들을 따라 나서지만 죽음 앞에 직면해서 살고 싶다고 발악하는 ‘비단치마’의 청이, 높은 파도가 일어 배를 삼켜버리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물 위로 떠오른 청이는 나무 궤짝 하나를 부여잡고 목숨을 부지한다. 죽어서 용왕님을 감동시켜 다시 살아나는 ‘심청전’과는 다르다. ‘비단치마’에서 청이는 잠시 정신을 잃었는데 어쩌다 커다란 연꽃 속에 들어가 있다. 이 부분을 잠시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 이유는 원전의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것이다. 연꽃에서 몸을 일으키며 주변의 소리를 들은 청이는 부잣집 아씨가 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제 정말 행복한 부자 아가씨가 되었구나 하는데, 아버지가 비렁뱅이가 되어 나타났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비단치마’가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결정적 이유가 결말에서 청이의 심리변화를 묘사한 점이다. 비단치마에 혹한 여자 아이는 눈먼 비렁뱅이 아버지를 외면하고 마는 것이 당연하다. 방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숨었는데 질긴 핏줄은 방안으로까지 들어와 청이의 양심을 후벼 파고야 말았다. 자신에게 나쁜 소리하는 건 듣기 싫어 아니라고 버럭 소리를 질러버리는 청이, 아이답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는 허탈함과 아버지를 보고 싶었던 마음, 아버지가 눈을 뜨게 되어 반가운 마음 모두가 울음으로 터진 그림이 참 감동적이다.

이제 신분이 탄로 났으니 비굴하게 사는 것은 싫다. 또다시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는데 비단치마를 입고 있은 들 무슨 소용이랴. 청이는 이제 알았다. 불같이 일어난 욕심은 높이 솟구친 파도처럼 일순간 허망일 뿐이라는 것을. 결국 불은 꺼지고 파도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는 것을. 청이는 성장기의 홍역을 한바탕 호되게 앓고 이제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제 아버지가 눈도 떴으니 예전처럼 농사를 지을 지언 정 조금의 희망은 있다. 언제나 선망하던 비단치마를 실컷 입어보았으니 이제 그 힘으로 두 주먹 불끈 쥐고 힘껏 살아낼 것이다.

‘비단 치마’가 훌륭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림이다. 소녀로서의 욕망을 펜의 섬세한 터치로 그려 항상 뭔가가 들끓고 있는 그런 느낌을 잘 표현했다. 역동적인 그림과 대담한 유화의 색채는 한때의 홍역을 앓아내는 청이의 마음을 더 실감나게 한다. 장사꾼들이 높이 쳐든 비단치마를 가지고픈 욕심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불길이 일어나는 모습이 정말 잘 표현되어 있다. 성난 파도 앞에서 살려 달라 울부짓는 그림, 살고픈 욕망에 물속에서 두 눈 부릅뜬 장면, 아버지를 보고 놀라고 당황한 청이의 표정, 아버지가 눈을 뜨고 한바탕 울음을 쏟아내는 장면에는 만감이 교차한 심리를 정말이지 잘 표현해냈다.

고전이 현실감 없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멀리할 것은 아니다. 고전은 물질과 정보가 만능한 현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하고, 권선징악의 결말이 따뜻한 도덕심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가까이 두어야 한다. 그러나 스토리가 갖는 거리감은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데, 유교와 불교의 사상이 바탕이 된 심청전을 현대적 의미로 제법 있을 법한 이야기로 각색한 ‘비단치마’는 훌륭한 대안이 되고 있다. 더구나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작가의 시선에 박수를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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