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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평점 :
<의자 놀이>를 읽고
책 속에서 한순간에 고아가 된 임성준씨 부부의 자녀들을 보고 울컥 울음이 올라왔다. 그리고 곧 내가 임성준씨의 부인 서미영이 되어 베란다 난간에 서 있는 듯한 소름끼치는 느낌이 밧줄이 되어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시종 책 속에 묶어 놓았다. 그 소름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노동자의 아내로 사는 아픔, 나는 그것을 안다. 2년 전부터 나의 남편도 노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2년 전에 남편은 모 출판사의 영업부장이었다. 크고 작은 베스트셀러를 더러 냈던 인문‧과학 출판사다. 그러나 인문‧과학 분야는 베스트셀러를 내도 공지영씨 책들의 판매 부수에 10분의 1도 안될 만큼 시장 규모가 작다. “오빠, 오늘은 요 넥타이 메고 가서 서점 여직원들한테 윙크 많이 날리고 와.” 하고 애교를 떨며 남편을 배웅하던 그 때, 뉴스에서 간간이 보게 되는 쌍용자동차는 나에게 그렇고 그런 노사분규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때는 언론의 왜곡 보도를 몰랐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남편은 노동자가 아니라 하얀 와이셔츠를 다려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쌍용자동차 일은 나에게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전부터 어려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출판사는 문화‧예술계를 핍박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부터 더욱 더 어려워지게 되고, 급기야 다섯 명 남짓한 직원들 중에 가장 많은 연봉을 받던 남편이 정리 해고자가 되고야 말았다. “사장님이 이제 출판은 미래가 없다고 나더러 먼저 내려가서 농사지으라고 하시네. 곧 합류하시거나 투자 하신다고.” 남편은 내가 그 말을 곧이 믿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당신더러 당신은 아무 생각 없이 딱 농사나 지어야 될 정도로 능력이 없다고 말한 거 아니야?’ 하고 속으로만 쏘아붙일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전 어머니를 떠나보냈던 아픔이 남편의 눈과 가슴을 적시고 있었기에.
그길로 우리는 시댁인 전주에 내려갔고 남편은 농장 노동자가 되었다. 토마토 재배법을 배우고자 한 것이다. 150만원 월급에 12시간 근무를 남편은 즐겁게 했고, 나는 딱 반으로 줄어든 월급으로 시골의 큰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러던 중 아이들 과자 값 벌겠다고 일을 시작한 내가 작은 교통사고를 냈고, 그날 남편은 농장 기둥에 튀어나온 철사에 얼굴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상처가 심해서 얼굴에 조폭 같이 상처를 꿰맨 자국이 남게 생겼는데, 성형수술을 해줘야 할 농장주는 반창고 값도 주지 않은 채로 다음 날로 남편을 해고 시켰다. 그것도 전화 한통으로. 사유는 몸이 아파 하루 쉬겠다는 말을 전화로 하면 안 되고, 직접 출근을 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농장에서 일을 잘 못한 것일까. 그럴 리 만무하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하며 자란 농사꾼의 자식인데다가 대학 시절 엠티 때 추워하는 친구들을 위해 나무를 한 짐 해서 올 만큼 남편은 우직하고 꾀를 모르는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서 학습지회사 일을 하던 중에 또 한 번 사고가 났다. 주중에는 농장 일에 주말에는 아버님 농사를 돕느라 몸이 상할 데로 상한 남편은 그래도 몸살 한번 나지 않더니, 무릎 관절과 십자 인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방문 수업 중에 계단을 오르며, 그러니까 근무 중에 당한 사고였는데도 산재 처리가 되지 않고 또다시 해고를 당했다.
전주에서는 일자리가 없었던 남편이 경주에 와서 현대자동차 하청 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 건 지난 봄 부터다. 희망이 생긴 나는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아도 행복했다. 하지만 여름 때 시작된 정규직들의 파업은 한 달이 넘게 지속되었고, 나는 돈이 없어서 굶는 것이 어떤 지를 체험하게 되었다. 정규직들이 파업을 단행하면 비정규직들은 월급이 없는 것이다. 파업 사유는 불합리한 근무 시간 조정이었는데, 그 주장이 관철되면 시급을 받는 비정규직들의 생계는 위협받는 것이다. 남편의 월급은 170만원 남짓 했다. 거기에 하루에 한두 시간 시급이 줄어든다면……. 노동자의 월급이 어찌 이렇게 적을 수 있단 말인가. 에어컨 바람 쐬며 펜대 굴리는 사람들 보다 배는 힘들게 일하고, 월급은 배로 적게 받는다니……. “20년 전에 우리 아빠 회사에서 일하던 건설 노동자들도 200에서 300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았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하고 절규하는 나에게 남편은 “능력 없는 내가 못난 놈이지, 누굴 탓 하냐?” 했다. 그렇게 아이들 배를 골리며 더운 여름을 견디고 있었는데 지인으로부터 소개가 들어왔다. 파주의 한 제조업체의 정규직 노동자 자리. 그 지인도 한 때는 제법 큰 출판사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던 사람이 노동자가 된 것이다. 그 자리의 월급도 170만원 남짓, 이 돈을 고스란히 생활비에만 쓴다면 문제는 없다. 그런데 100만원은 파주에서 살던 아파트 대출 이자에, 단칸방 월세에, 그밖에 대출 이자로 다 소모되고 공과금을 제하면 4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네 식구가 버티는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이라는 것이 희망이다. 유급 휴가를 쓸 수 있는 정규직. 그래서 남편은 한시 바삐 그곳으로 갔고 나는 남편과 떨어진 채로 단칸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누군가 긴 손톱으로 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처럼 가슴이 너무나 쓰라리고 아프고 먹먹하다. 침을 삼키지 않으면 곧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다. 계속 침을 삼키니까 진즉에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돌덩이가 자꾸만 깊숙이 들어간다. 자살도 종종 생각한다. 종묘사에 가서 무턱대고 농약을 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과연 어떤 종류의 약을 얼마만큼 마시는 것이 치사량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잠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은 또 기도를 한다 ‘하느님, 이 길이 하느님이 저에게 경험하라 하시는 어렵고 험난한 길임을 압니다. 이 길의 끝에는 하느님이 씌워주시는 월계관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 제발 저에게 꿋꿋하게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와 현명한 정신을 주세요.’ 하고. 그리고 밤에는 또, 불 피울 연탄은 어디 가서 살 것이며 성냥불로 연탄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지를 생각하며 울며 잠든다. 알토란같은 자식을 두고 어떻게 갈 것이냐고 할 것이다. 저 아이들도 살다 힘들면 죽겠지 하고 생각하는 나는 정말 죄인이다. 이제 울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이런 고통스런 나날들을 어찌 견뎠을까. 그들은 나처럼 단지 해고가 아니라 77일간의 그 끔찍한 옥쇄 파업이라는 고통이 더해져 있지 않은가. 정말 악랄함의 차원을 넘은 용역을 동원한 사측의 폭력 진압과 간사함의 도를 넘은 정신 회유책, 사측에 가세해 끔찍한 강경 진압을 일삼은 경찰 공권력, 이 모든 일들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니,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다. 그 일을 겪어보지 못한 내가 이렇게 도망가고 싶은 심정인데 그 속에 가족들은 어떨까, 정말 사회가 이래도 되는 걸까. 살갗이 벗겨지는 최루 가스를 헬기를 동원해 뿌리고, 맞으면 팔이 부러지는 고무총을 쏘고 넘어진 사람에게 집단 폭행을 하고, 그런 현장을 앞으로 보게 된다면 혹은 내가 그 같은 일을 겪게 된다면 나 또한 22명의 희생자 중에 한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도망가고 싶다. 이 비열하고 불합리한 한국 사회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 책을 진즉에 매매로 내놓았던 아파트 값이 또 떨어져 이제는 팔아도 마이너스라고 하는 남편에게 욕을 하며 분풀이를 하기 전에 그러니까 그제 쯤 남편에게 주문했다. 서평쓰기를 취미로 하는 남편은 인터넷 서점에 마일리지가 많아서 아이들과 나는 항상 읽고 싶은 책을 남편에게 주문하곤 한다. 남편은 이 와중에도 아이들 교육이 걱정되는지 <잠수네 아이들의 수학 공부법>이라는 책을 함께 보냈다. 우울하던 중에 <의자놀이>를 읽으면 아이들 앞에서 통곡하게 될까 두려워 <잠수네~>를 읽다가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조금만 읽어야지 했는데 그 자리에서 읽고, 울고, 읽고, 울고…… 끝내는 아이들을 놀라게 하고야 말았다. 대학 시절 주유소에서 알바를 하며 읽었던 <인간에 대한 예의>로 나에게 들어왔던 공지영씨가 르포르타주도 잘 쓰는 실력가여서일까,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신자유주의의 자본이 무서워서일 것이다.
어제 허공에다 대고 했어야 할 분풀이를 남편에게 하고야 말았다. 욕이 나오는 ‘나꼼수’를 편하게 듣지 못하는 간이 콩알만한 나는 한 번도 욕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내 입에서 개자식이란 말이 나왔다. 그러고서 후회하며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개자식일까 하고. 능력이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처자식 건사하는 노동자 남편이 개자식일까, 편의에 따라 해고 하는 회사의 사장들이 개자식일까, 자본주의의 병폐를 깨닫지 못하는 사회가 개자식일까, 자본에 병들어 악랄한 행동을 일삼는 정권이 개자식일까, 양심을 팔아먹은 일부 언론(지금은 많아진)이 개자식일까, 아!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다.
누군가 나에게 말하는 것만 같다. ‘세상엔 금을 가진 자들이 있지만 그들이 가진 금은 너무 딱딱해서 나누기가 힘드니까 부드러운 빵을 가진 우리가 나누며 삽시다’ 하고. 나는 3월에 둘째 녀석이 입학하기 전에 파주에 월세집이라도 구해야 하는데 보증금 1000만원을 구해야 하는 고민에 휩싸여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나누어 먹을 빵이 없다. 이 고민이 해결 되면 1년 쯤 뒤엔 나에게도 나누어 먹을 조그맣고 포실한 빵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먼저 와락 센터에 갈 것이다. 내가 이래 뵈도 한 때는 동네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동화책을 재미나게 읽어주는 아줌마였다. 와락의 아이들을 보듬어 안고 책을 읽어주고 싶다. 아니 아니다. 와락은 그 전에 없어지거나 다르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하루 빨리 쌍용자동차 일은 민주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고, 철탑 위의 노동자들이 기쁘게 내려올 일이 있어야 할 것이며 쌍용의 식구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쌍용의 식구 중 어느 집에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가서 동화책을 읽어주며 웃다가 올 것이다.
이렇게 울며 쓰는 서평은 처음이다. 정혜신 박사님이 그러셨다. 사람 마음의 상처도 외상을 수술하듯 상처의 실체를 드러내고 치료해야 한다고. 그래서 나도 아픈 2년간의 상처를 드러내 보았다. 아프다. 하지만 조금은 치유된 느낌이다. 사람 마음의 상처는 이렇듯 후벼 파며 치료해야 하는데, 이 사회의 아픔은 왜 이렇게 후벼 파고 드러내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걸까. 그 일은 언론과 정치인이 나서서 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회 속에 개인이 행복해지고 행복해진 개인이 사회를 만들 텐데, 정말 나라가 망하려나 보다 싶다. 기대했던 대선의 결과는 정말 참혹하리만큼 ‘멘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