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을 점령하라 사계절 중학년문고 4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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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때 강릉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살았다.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우리 집을 중심으로 윗집과 아래 집, 집은 모두 세 채이고, 과수원과 한 눈에 보이는 작은 논밭이 있었다. 그 논밭의 대부분은 윗집의 땅이었고, 아래 집은 사과를 심은 과수원이었다. 그때 내가 경험했던 과수원은 정말 신비로운 곳이었다. 향긋한 사과 향이 나에게 놀러 오라고 손짓했지만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엄마는 타향살이를 하는 우리가 혹시 이웃과 적을 지게 될까봐 과수원 근처엔 절대 혼자 가지 못하게 했다. 어쩌다 엄마가 마실 갈 때 따라 가서 어설피 본 과수원 정경은 정말 예뻤다. 우뚝 솟은 초록빛 산 아래 하얀 종이 봉지가 씌워진 많은 사과들은 정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빨간 벽돌의 아담한 집은 그 집에 맡겨진 할머니 손녀들을 부럽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 집에 또 놀러 가고 싶어 종종 입구까지 갔다가 떨어진 호두만 몇 개 주워 와서 작은 오빠와 돌멩이로 두드려 까먹곤 했고, 익은 사과 냄새가 우리 집까지 풍겨오면 “엄마, 사과 냄새 난다.” 해서 엄마는 벌레 먹은 사과를 한 상자 씩 사오곤 하셨다. 그때 엄마가 만들어준 사과 쨈을 생각하니 지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혀끝이 달달해진다. 그래서 나는 과수원이라 하면 향긋한 사과 향을 머금은 안개가 저 멀리서 천천히 조용히 나에게로 오는 것만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떠오른다.

그런데 과수원을 점령하라니, 아이들이 과일 서리라도 하는 이야기라면 별 매력이 없을 것 같다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는데, 역시 이곳의 과수원 또한 내 기억 속 그곳과 흡사해서 반가웠고 그때 실컷 뛰어놀지 못했던 아쉬움을 이곳에서 말끔히 덜어내는 것만 같아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래, 과수원이라는 곳은 그 향긋한 과일 냄새가 사람과 동물과 미물들에게까지도 ‘여기 오라’ 손짓한다는 생각으로 ‘황선미’ 작가도 출발하지 않았을까? 아파트가 즐비한 신도시 한켠의 작고 조용한 과수원에서 작아서 주목받지 못하는 동물들과 할머니가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과수원 귀퉁이에서 어쩌다 생기게 된 물웅덩이에서 물장구를 치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던, 단지 과수원의 벌레들을 잡는 도구로 활용되던 오리들이 연못의 황소개구리를 소탕하는 과업을 이루며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을 받게 되는 처음 이야기는 ‘이거 정말 재미있네.’ 하는 감탄이 나왔다. 다음 장을 넘기니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 되어 ‘뭐야, 장편 동화 아니야?’했는데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게도 여러 개의 이야기가 한 장면 한 장면씩 만나는 퍼즐 형태의 구조를 띄고 있었다. 그래서 작가는 오리들이 과수원에서 연못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어난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지만 다소 소란스러운 사건을 마치 “너, 오리들이 연못으로 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 너한테만 들려주는 거야.” 하고 귓속말을 하듯 이야기를 한다. 그 귓속말을 듣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참 작품성이 있는 훌륭한 동화구나 여겨졌다.

대장 오리가 공원을 가로질러 연못으로 가며 목격하게 되는 이상한 장면은 이랬다. 멀쩡하던 나뭇가지가 저절로 갈라져 사람에게로 떨어지는 찰나, 나무를 오르던 고양이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를 목격한 오리가 꽥꽥 소란을 피운 덕에 그 나뭇가지 아래에 있던 구청장은 안전할 수 있었다. 그 나뭇가지에 올랐던 고양이는 순진한 애완 고양이 ‘호피’였고, 짖궂은 주인 꼬마가 수염을 뽑는 통에 깜짝 놀라 나무 위로 튄 것이었다. 그 나무는 한때 배꽃마을을 수호하던 당산 나무였는데 마을이 신도시로 바뀌며 사람들의 푸대접에 점점 말라갔고, 그곳에는 안타깝게 연명하고 있는 나무귀신이 있었다. 그 나무귀신을 보고 겁을 먹은 호피는 쥐들의 소굴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고생을 하고 나중에 야생 고양이에 가까워져 과수원의 철조망을 넘는다. 공원에 버려진 책상 안에서 사는, 호피를 산 채로 잡아 졸병으로 부리는 당찬 쥐들은 개발에 밀려 살 곳을 잃고, 먹을 것이 풍부한 과수원을 발견하게 되어 철조망을 넘지만 결국 실패한다. 야생화 된 호피가 으르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피는 쥐들이 살아갈 다른 보금자리를 안내하지만 그곳에서 잘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아버지의 고향인 배꽃마을을 찾아 온 철새 찌르레기는 이미 과수원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까치들의 텃새에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오리들의 노력어린 중재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과수원으로 돌진하여 한바탕 곤욕을 치른다. 이 찌르레기들과 다정한 이웃이 되어 살고픈 나무귀신은 오리의 등을 빌려 나무를 옮겨 타는 이사를 감행하고, 예전 당산나무에 있었던 과수원 할머니의 소원 주머니를 찌르레기의 도움을 받아 주인에게 전한다. 그래서 과수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기를 가지고픈 소망은 이루어지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과수원집 할머니의 보물지도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연신 미소가 머금어질 만큼 예쁘고 소담스러웠다. 아기를 바라는 마음이 혹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 차마 말을 못하고, 예쁜 아기 물건을 사서 집안 곳곳에 숨겨두고 나중에 찾지 못할까봐 지도를 그려둔 할머니의 마음이 정말 사랑스럽기까지 했고, 그 할머니의 소중한 지도가 바람에 날려 과수원의 뒤뜰에 사뿐히 내려앉는 광경은 과수원을 예쁜 곳으로 보이게 했고, 이 동화를 예쁘게 만들어주었다.

책장을 덮으며 또 한 번 미소를 짓는다. 과수원에 살고 과수원에 살고 싶어 하는 오리, 고양이, 쥐, 찌르레기, 나무귀신, 사람들의 예쁘고 소담한 이야기가 참 재미있어서. 아직도 어릴 적 과수원집 손녀들이 부러워서. 어떤 이는 인터넷 서점에 이 책을 읽고 아이들과 토론한 기록문을 올려놓았는데 사람과 자연물과의 공생이 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린 아이들과 참 깊이 있는 대화를 한 것 자체가 놀랍다. 나는 그저 아파트 촌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시골스러운 정경의 예쁜 과수원, 그 과수원과 얽힌 예쁘고 작은 이야기들 외의 것을 생각하기 어려웠는데. 꼭 동화에서 주제 의식을 찾아야 맛일까. 나는 그러기보다 동화가 갖고 있는 감동과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우리 남편은 동화작가 중에 황선미가 제일 좋다 했다. 제일 잘 쓰는 것 같다고. 사람들도 ‘마당을 나온 암탉’의 작가 황선미를 칭송한다. 동화가 뭔지도 몰랐던 몇 년 전 그러니까 결혼 전에 서점에서 본 ‘나쁜어린이표’라는 책에서 나는 황선미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다. 나쁜 어린이 표라니, 왠지 삼류 티가 나는 껄끄러운 제목이라 책을 보기도 전에 그렇고 그런 작가로 치부해버렸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기 어렵듯이 책 또한 그런 것 같다. 이번에 처음 읽은 황선미 작가의 작품 ‘과수원을 점령하라’로 인해 ‘나쁜어린이표’도 읽어보고 싶어지고 ‘마당을 나온 암탉’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서울예술대학’ 출신의 작가들은 어쩌면 이리도 정경묘사를 예쁘고 깔끔하게 잘 하는지 글 솜씨가 부럽다.

어릴 적 나의 산골 마을은 아직도 여전할까. 과수원이 아직도 건재하다면 다시 찾아가서 먹는 사과 맛은 얼마나 좋을까. 나도 벌레 먹은 사과를 한 상자 사오고 싶다.  그곳이 아니라면 황선미의 과수원에 찾아가 배를 한 상자 사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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