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지음, 오은숙 그림 / 별이온(파인트리)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아! 앨리스가 이렇게 예의가 없는 소녀였다니!!
원작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있던 나는 앨리스가 이렇게 버릇이 없는 아이인줄은 몰랐다.
말하는 토끼를 따라갔다가 약병에 든 물을 마시고 커졌다 작아지고 커졌을 때 흘린 자신의 눈물에 빠지거나
이상한 티타임에 초대를 받거나 억울하게 여왕의 카드 병사들에게 쫓기다가 꿈에서 깨는 건 알았지만,
그래서 참 재밌고 신났고 그래서 쫓기던 앨리스가 잡힐듯말듯 할 때는 불안불안 걱정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원작의 앨리스는 어찌보면 그런 고난을 겪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리석은 행동을 자꾸 한다.
무조건 먹는 것만 보면 욕심을 내서 먹어치워 곤란을 겪고,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계속한다.
(아직 어린아이고 낯선 곳에서 겁이 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도 들긴 하지만...)
순수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들의 멋진 동화의 세계를 마음껏 꿈꾸는 동화라고 들었는데 나에겐 왜 이리 어려운지..
영국의 전설과 기원, 낯익은 여러 지명에 대한 풍자를 재미있게 해놓았다고 들었지만, 내게는 생소한 것들이라 그런지
원작의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실제로 내용이 참 엉뚱하게 웃기는 시, 노래가 많이 나오는데 하나도 알 수 없는 것들이라 무얼 이야기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앨리스의 진정한 재미를 느끼려면 영국의 문화나 전설에 대해 먼저 좀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게다가 루이스 캐럴의 마법같이 기가막히다는 언어유희들을 보여 주려고 하는 노력은 보였지만 번역본은 그 한계가 있는 법,
'이야기(tale)' 와 '꼬리(tail)'(p.60), '아니다(not)' 와 '매듭(knot)'(p.64) 등의 번역으로 설명되어진 것을 보는 것으로는
그 매력을 직접적으로 느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영어원작을 보라고 하나보다.
내가 순수함을 잃어서인지 너무 분석적인 감상만 늘어놓은듯 하다.
내용 자체와 책으로만 본다면, 이 책은 너무나 예쁘고 매력적이다.
아기자기하고 다정다감한 화려한 색깔들로 표현한 여러 그림들(p.134의 그림속 앨리스의 뚱한 표정이 참 재밌다.)과
엉뚱한 상상이 주는 재미, 기발한 모험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 환상적이면서도 그저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여기저기 생각해 볼 거리를 주는 문구가 많았다.
"오! 불쌍한 내 발들! 이제 누가 너희에게 신발과 양말을 신겨줄까? 난 너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 이상은 돌봐줄 수가 없단다. (중략) 발들에게 소포를 보내야겠어. 자기 발들에게 선물을 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말이야. 게다가 그 주소라는 건 또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 p.30
"자라면 보나마나 못생긴 아이가 될 거야. 하지만 돼지라면 꽤 잘생긴 편일꺼야." - p.126
"이렇게 한번 떨어져봤으니 앞으로 계단에서 구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겠는걸.
가족들이 그런 날 보고 얼마나 용감하다고 할까! 이젠 지붕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야지." - p.15
게다가 앨리스도 처음에는 울기만 하더니 나중엔 울음도 참고, 자신에 대해 고민도 하고,
처음보다는 타인을 조금 더 배려하기도 해서 점점 성장해 나가는 앨리스를 지켜보며 함께 모험에 흔쾌히 빠진다면
더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은 동화적인 판타지보단 앨리스란 소녀의 성장소설로 보여진다.
그리고 피터팬과 마찬가지 느낌이 드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기보단 어른을 위한 조금은 슬프기도 한 동화같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 웬디와 헤어질 때 나는 그가 너무 안쓰러워서 슬펐다.
웬디는 자라겠지만 피터팬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엔 언제나 신나는 모험을 즐기는 피터팬이 신나보이고
<앨리스> 의 내용 또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화스런 모험의 세계같지만
결과적으로 피터팬은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 되기 싫어 도망친. 콤플렉스를 지닌 채 영원히 혼자여야하는 외로운 아이일 뿐이고,
앨리스는 언젠간 잃어버릴 어린시절의 순수함이다.
"하지만 당신도 갑자기 번데기로 변했다가 조금 후에는 나방으로 변해버린다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얼떨떨할 거에요"
- p.90
토끼굴 안의 세계에서 자꾸만 커졌다 작아지는 몸과 전에 알고 있던 것을 다르게 기억하고 잃어버려 자신이 변했다고 걱정하는 앨리스.
어린아이는 언젠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그러면 몸도 마음도 자라고
전에 알고 있던 것들 중 어떤 건 잃어버리고 다른 것들을 알게 된다.
그렇게 변한다. 모두가.
아직 그것을 잘 모르는 앨리스는 그것을 두려워하지만 결국엔 알게 될 것이다.
그 모습도 자신이라는것을...
앨리스의 언니는 그것을 알고 있다.
마침내 그녀는 지금은 이토록 작고 귀여운 동생이 언젠가 성숙한 여인이 되었을 때도
지금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을까 상상해보았다.
'아이들과 한자리에 둘러앉아 오래전 꿈속에서 보았던 그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의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나게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여름날을 떠올리며
아이들의 그 티 없는 슬픔을 함께 느끼고, 그들의 소박한 기쁨을 함께할 수 있을까?' - p.243
모든 게 변해버리고 어린시절의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가끔, 이렇게 앨리스와 함께 토끼굴로의 모험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