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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제목이 시적이고 표지가 맘에 들어서 전부터 눈독들이던 책이다.
모리 에토.. 심지어 저자의 이름까지도 왠지 음악적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맘에 안드는 구석이 없다는 뜻이다.
책을 읽고 저자의 이력 소개를 보는 순간 나에게 저자의 또 다른 책이 있다는 걸 깨닫고 기분이 좋아졌다.
'컬러풀', 얼마전 고모에게 빌려온 책이었는데, 또 다른 저자의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책을 덮고,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았어도 기뻐서 웃음이 났다.
이 책에는 6가지의 단편이 실려있다.
하나같이 특이하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솔직히 세번째 이야기인 '수호신' 의 주인공의 심리와 네번째 이야기인 '종소리' 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오만한 집착은 그대로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에 그렇게 순수하게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다.
실수를 비웃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들과 천천히라도 깨달아가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다섯번째 이야기인 'X세대' 는 순수한 열정에 대한 완성이었고, 무척이나 공감도 되었다.
십년전, 친구들과의 야구모임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시쓰.
그런 그의 열정을 보며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자신의 열정도 되살리는 겐이치.
그런 둘의 마지막 대화에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우리, 언제까지나 그런 바보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10년 전에 그렇게들 얘기했습니다. 그야 물론 세월이 10년 정도 흐르면 다들 일도 할 것이고, 결혼을 했을 수도 있고, 아이까지 있을지도 모르죠. 중요한 일도 많아지고, 책임도 방해물도, 아무튼 온갖 것들이 많아질 테지만, 그래도 10년에 하루쯤, 모두 모여 동네 야구를 즐길 수 없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다고, 10년에 하루 정도는 야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바보스러움을 유지하고 싶다고, 우리는 그런 얘기를 했더랬습니다." - p.317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 없는 친구들, 그렇게 그립고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도 내 맘은 그대로인데 무언가 어색하고 앞으로 얼마나 더 자주 이렇게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슬퍼진다.
내가 결혼하면 더 만나기 힘들꺼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게 사실일지라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그래서 온갖 우여곡절로 힘들어도 현실의 모든걸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려는 이시쓰와 친구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문득, 나도 그런 약속을 친구들과 한다면 나도 이시쓰처럼 그렇게 지켜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모두가 변해도 나와 내 친구들은 한결같기를 바라는건 아무래도 무리겠지만 그래도 언제까지나 함께이고 싶다.
이시쓰와 친구들처럼...
첫번째 이야기는 최고의 케이크를 만드는 히로미와 그런 그녀를 동경하는 야요이의 이야기다.
야요이도 원래의 꿈은 맛있는 케이크를 만드는 작은 자신의 가게를 갖는거였지만 히로미의 케이크의 반해, 케이크를 만들기보단 그런 그녀의 맛있고 아름다운 케이크를 돋보이게 해주는 그릇같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처음에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꿈까지 접고서 남의 뒤치닥거리나 하느라 자신의 생활은 엉망이 되는 그녀가...
하지만 지금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꿈을 버린게 아니라 새로운 꿈을 갖게된 것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괜찮은거 같다. 그저 자신의 꿈과 행복이 뭔지 아는 그녀가 부러웠다.
이리저리 삶에 치이고 힘들더라도 그게 자신의 꿈과 행복을 위한 과정이니까 견딜 수 있고 보람있는 일이니까...
그녀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것이다.
오로지 케이크밖에 모르는 야요이는 가게 주인의 관심사가 폭넓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 무질서함이 꺼림칙하기도 했다. 가게 앞에는 과연 작은 새가 네 마리, 두 마리씩 쌍으로 들어 있는 새장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새장에 갇힌 새' 에서 연상되는 비참함은 조금도 없었다. 작은 새들이 오히려 느긋하고 행복해 보여, 그 역시 왠지 꺼림칙했다. - p.30
그녀는 그렇게 '새장에 갇힌 새'가 모두 불행한건 아니라고, 그 편견을 깨는 생각을 가르쳐 주었다.
두번째 이야기, '강아지의 산책',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우리에게 버림받은 떠돌이 개들을 돌보기 위해 술집에 나가는 에리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녀의 '하루 800엔'의 기준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의 삶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녀만큼 확실한 기준도 없이 하루하루 낭비하며 살아가면서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오히려 묻고싶다.
에리코를 비난하는 책 속의 남자같은 사람들은 우리 곁에 많이 있다.
우리 아빠를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아빠 역시 그 남자와 같은 말을 했었다.
"세상에 먹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는데, 개를 위해 저러다니 참 우아하군." (p.90) 시간이 남아도나보다고 덧붙였었지.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실 때, 나는 아무런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아빠 말씀도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되었고, 또 내가 사람이나 개를 위해 무언가 행동할 여력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개를 돕지 말자고 생각하는건 아니었기에 조금 답답했었다.
지금은 그저 에리코의 말대로 이건 인간의 우열이나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관심의 문제(p.88) 라는걸, 나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라크에 잡혀갔다 풀려난 일본인 세 명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얼마전 교회사람들이 그렇게 잡혀가서 맘 졸였던 일이 기억이 났다. 정부가 위험해서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굳이 가서 잡혀간 그들이 유명해지고자 하는 심리로 그런거라며 멋대로 행동한 그들을 구하기 위해 왜 우리가 낸 세금을 낭비해야 하는가?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때 이런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에리코의 질문이 나에겐 참 충격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하고는 무관하다고 외면하면 그만인 누군가와 어떤 일을 위해서 뭔가를 한 적이 있던가? - p.106
이 주제는 마지막 이야기이자 내가 이 책에 끌렸던 이유인 아름다운 제목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에서 강렬하게 나타난다.
아름다운 제목만큼 아름답게 슬픈 이야기였다.
난민들을 돕는 UN 기관에서 일하게 된 리카는 상관인 에드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지만 그들이 정말 행복하게 함께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에드는 현장에 나가 직접 난민들과 호흡하는 일을 좋아해서 계속해서 해외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한 소녀를 구해내고 죽어버린다.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그건 바로 그렇게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난민들을 뜻하는 거였다.
리카는 에드가 죽기 전, 이혼을 했다. 항상 밖으로만 나가는 에드를 끝까지 이해해 줄 수 없어서...
그녀는 에드가 사랑했던 그곳을 '적' 으로 생각했다. "내게서 에드를 빼앗아가는 적." (p.366)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리카처럼은 함께하고자 더 이해해보고자 노력도 않고 그저 불평만 해댔었다.
그와 내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나도 그녀처럼 '적' 으로 생각하고 더 거부하고 미워했었다.
그래서 결국 난 그에게서, 그 상황에서 도망쳤는데, 리카는 이제 당당히 에드의 삶을 받아들인다.
나는 언제쯤 도망가는 걸 멈추고 리카처럼 당당히 맞설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적어도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을 위한 내 삶의 기준만이라도 갖게 될지 조금 불안하다.
나를 나로써 존재하고 살게 만드는 나만의 기준, 리카처럼 용기가 필요한 위대한 기준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야요이나 이시쓰처럼 나와 내 친구들의 작은 행복을 위한 기준을 찾고 싶다.
정말이지 나를 울고 웃게 한 가슴 따뜻한 여섯 편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