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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말해주세요, 꽃들의 비밀을 - 꽃길에서 얻은 말들
이선미 지음 / 오엘북스 / 2024년 6월
평점 :
꽃을 찍는 순간은 모든 감각이 집중한다. 숨도 잠시 참아야 한다. 흔들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경험하겠지만 그 순간은 오롯이 저 너머의 꽃과 나만의 순간이다. 무념무상 완벽하게 단순하다. 하릴없이 분주한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그 순간의 침묵은 눈앞에 보이는 수백 수천의 사물을 넘어 ‘없음’의 순간으로 정신을 인도한다. 그런 시간들이 위로가 되지 않을 리 없다. 힘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책을 펼치고 「들어가는 글」중에서 읽게 된 말이다. 공감한다. 꽃을 찍는 순간은 오로지 꽃과 나의 순간이다. 거기서 꽃말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건 꽃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걸. 저녁 산책을 시작하고 구름이 늘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해가 지는 모습이 늘 다르다는 걸 너무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러니 계절을 알려주는 꽃과 만난다는 건 경이로울 수 밖에 없다. 꽃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김춘수 시인의 '꽃' 떠오른다.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는 생각에 꽃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식물도감, 우리의 자생 식물, 야생화 도감을 곁에 두게 되었지만 사진으로 먼저 만나고 이름을 불러주며 다가갈 때의 설레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터다. 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던 이유다. 이 책은 그렇게 꽃과 만나는 순간 순간의 기록인 듯 하다. 꽃이 철학자 한 분을 탄생 시킨 셈이다. 그만큼 꽃과 나무, 아니 모든 식물은 사람을 알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데려다 주기도 한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해마다 봄이면 벚꽃 축제를 한다. 꽃이 지면 그 많던 사람은 모두 사라져버린다. 한번도 꽃이 진 후의 나무를 보러 오지 않는다. 꽃이 지고 나면 푸릇푸릇한 녹음이 우거지고 그 녹음이 그림자를 드리워 상쾌하게 만든다는 걸 사람들은 잊는다. 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 속에는 '찰나'의 의미가 들어 있다. 우리 삶의 순간들은 모두 '찰나'일 뿐인데 모두가 아름답고 좋은, 화려함의 순간만을 보려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도 가끔 있다. 저자는 말한다. 꽃의 뒷모습에 진실이 있다고. 책 속에 많은 꽃이 소개되어져 있다. 이름을 많이 들어봤던 꽃도 있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꽃도 많다. 너도바람꽃, 변산바람꽃, 매발톱꽃, 깽깽이풀, 동강할미꽃, 은방울꽃, 양귀비, 앵초, 연꽃, 엉겅퀴, 수국, 병아리난초, 나도수정초, 호자덩굴꽃, 좀바위솔, 스노드롭... 희귀한 꽃을 만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 사진이 좀 더 선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잠시 마음쉼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이 책을 통해 제비꽃이 우리나라에만 60여 종이 핀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미선나무처럼 우리 땅에서만 자라는 꽃도 많다. 학명을 빼앗긴 건 아쉽지만. 나를 잊지 말라고 말하는 건 물망초뿐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양귀비의 꽃말도 '나를 잊지 말아요' 란다. 엉겅퀴의 꽃말이 '나를 만지지 마세요' 라니! '슬픔은 사라지고' 라는 미선나무의 꽃말, '행복을 여는 열쇠' 라는 앵초의 꽃말이 참 좋다. 모든 작은 꽃이 장미가 되려고 하면 봄은 그 사랑스러움을 잃어버릴 거예요... 테레사 수녀의 말이라 한다. 단 한마디 속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꽃의 비밀을 알려준다더니 삶의 순간 순간을 이야기한다. /아이비생각
우리가 외부에서 가해진 고통을 더욱 크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정말 고통없이 살아야 한다는 환상 때문이다. - 안셀름 그륀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 (-51쪽)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 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 성석제<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75쪽)
"따져보니 제대로 살아 본 것 같지 않다. 나는 나를 떠돌던 나그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누구였을까."
- 네팔 시인 두르가 랄 쉬레스타 (-2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