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동화
신경진 지음 / 이정서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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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 신작 소설 <팬데믹 동화>를 읽고...
신경진 작가의 <팬데믹 동화>를 미국에서 받아보고, 읽기는 한국에 와서 읽었다. 하루 평균 400~500Km를 자동차로 달리며 6박 7일에 걸쳐 세 곳의 국립공원과 뉴멕시코 산타페를 여행했던 탓에 막상 책을 여력도 기력도 없었다. 신경진 작가의 작품은 아주 오래 전 읽었던 세계문학상 수상작 <슬롯>을 포함해 2021년 작 <결혼하지 않는 도시>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팬데믹이야 우리가 근 3년에 걸쳐서 겪어온 전지구적 재앙이자 제약이요, 올가미였는데 여기에 '동화'라는 단순 판타지가 결합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제목에 제시된 두 단어의 일견 모순된 성격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쉽게 빠져들 수 있었다. 소설의 전반부 1/3 정도를 읽었을 때 누구보다 날카로운 사회적 시각을 가진 작가가 팬데믹을 거치면서 로맨스 장르와 타협을 한 것일까하는 약간은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의무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삶을 구가하지만 남편과의 사별로 홀로 남겨진 선생님과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고등학교 시절 제자의 만남이 연애로 흐르는 소위 '밀당'의 러브라인으로 귀착될 여지가 돌연 차단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20대 청년과 그 나이 또래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어마어마한 빚을 유산으로 상속받은 출발선이 마이너스인 고졸 청년과 비교적 유복하지만 가부장적 부모를 둔 중산층 대졸 여성의 연애는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연애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다가 연민이라고는 받아본 일이 없는 자존감과 책임감이 모두 강한 남자 주인공의 어떤 선택으로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다.
지극히 현실적인 주인공인 현수는 동화를 믿지 않는다. 선생님과 연인의 진심어린 연민을 끝내 동정심이라고 해석한 현수의 선택은 안타깝다. 여기에 팬데믹에서 더욱 가속화되고 극단화된 자본의 무자비한 양극분해 맷돌은 일가친척이 사망하면서 저절로 유산이 불어나고, 투자가 두 세배의 이익을 거두는 사람과 평생 아무리 벌어도 다 갚기 힘든 부채에 허우적거리며 영원히 부채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로 사회를 갈라놓는다. 그래서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선택하는 노동은 더욱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하루 하루 조심스럽게 디딛는 데 바쳐진다.
신경진 작가가 이 소설을 요즘 유행하는 '수상한 편의점'류의 해피엔딩 판타지로 끌고가 독자와 쉽게 타협지 않은 것은 높이 평가하지만, 동화라는 제목을 내걸고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이 팬데믹으로 인해 몇 배 증폭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은 우리의 마음의 습관을 교묘하게 비튼 트릭이자 멋진 반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기간에 넷플릭스나 왓챠에서 무수히 양산한 로맨틱코미디류에 철저히 중독된 사람으로서 "좀 살살하시지...이렇게까지 아프게 하십니까?"라고 농담 섞인 항의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인정하자. 현실은 늘 잔혹동화 아니던가!


"사랑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에 이끌린다. 불완전함이 내포한 공백 속에서 사랑의 꿈이 자라난다. 그러나 사랑은 부조화의 혼란 속에서 태어나 심연의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세계가 붕괴되지도 않았다. 사라진 것은 오직 미완성의 사랑뿐이었다.P. 229 사랑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에 이끌린다. 불완전함이 내포한 공백 속에서 사랑의 꿈이 자라난다. 그러나 사랑은 부조화의 혼란 속에서 태어나 심연의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세계가 붕괴되지도 않았다. 사라진 것은 오직 미완성의 사랑뿐이었다." (팬데믹 동화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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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 1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시공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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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었던 소설 중 최고의 완성도, 놀라운 소설. 다만 인간이 이렇게 악할 수 있다는 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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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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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에세이도 아니고 잡문집이라니... 하지만 부피가 꽤 두툼해 거의 500페이지 가량되어 거의 100페이지 조금 넘는 '빵가게 재습격' 같은 것에 비하면 본전 생각은 덜할 듯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잡문집이라는 것이 내가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떤 소설 보다 잘 읽히고 흥미 진진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못 읽은 소설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읽었던 소설은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매력을 가진 글들의 모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잡문집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들의 (일종의) 거푸집(mold)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거푸집에 주물을 부으면 그대로 상이 나온다. 얼핏 보면 거푸집 자체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그 거푸집에 적당한 재질을 부어 넣으면 거기서 바로 얻고자 하는 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청동상이든 석고상이든 말이다. 소설을 소설로 이해하고 감동받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부족함, 덜 준비됨 등으로 인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적지 않다. 특히 외국작가의 작품을 온전히 소화해내기란 어려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소설 작품을 몇번이고 읽고 또 읽어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재독 삼독하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니 소화가 덜 된채 책을 다 읽어놓고 재미 없다고 얘기하는게 나(혹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독서 습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으면 그가 평소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사물과 세상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고 이게 어떤 식으로 어떻게 소설로 연결될지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가로서 소설에 집중하는 이면에 음악에 대한 깊이와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그는 하루 종일 재즈가 듣고 싶어서 20대 후반에 7년동안 재즈바를 운영한 적이 있으며 작가가 되어서는 손으로 원고를 집필하면서 오른 쪽 손이 혹사되는 것을 풀어주기 위해 바흐의 2 part invention을 연습 삼아 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나 챈들러, 스캇 핏제랄드,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샐린저등 미국 작가들의 수 많은 작품을 소설을 쓰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 과외로 번역하는 전문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설을 왜 쓰는지,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무엇인지, 미국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 소소히 알고 나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보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는 것을 주체할 수 가 없어졌으니 이 '잡문집'은 참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세계라는 원더랜드로 들어가는 토끼굴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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