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에 이끌린다. 불완전함이 내포한 공백 속에서 사랑의 꿈이 자라난다. 그러나 사랑은 부조화의 혼란 속에서 태어나 심연의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세계가 붕괴되지도 않았다. 사라진 것은 오직 미완성의 사랑뿐이었다.P. 229 사랑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에 이끌린다. 불완전함이 내포한 공백 속에서 사랑의 꿈이 자라난다. 그러나 사랑은 부조화의 혼란 속에서 태어나 심연의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세계가 붕괴되지도 않았다. 사라진 것은 오직 미완성의 사랑뿐이었다." (팬데믹 동화 p.229)
소설가의 에세이도 아니고 잡문집이라니... 하지만 부피가 꽤 두툼해 거의 500페이지 가량되어 거의 100페이지 조금 넘는 '빵가게 재습격' 같은 것에 비하면 본전 생각은 덜할 듯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잡문집이라는 것이 내가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떤 소설 보다 잘 읽히고 흥미 진진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못 읽은 소설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읽었던 소설은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매력을 가진 글들의 모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잡문집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들의 (일종의) 거푸집(mold)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거푸집에 주물을 부으면 그대로 상이 나온다. 얼핏 보면 거푸집 자체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그 거푸집에 적당한 재질을 부어 넣으면 거기서 바로 얻고자 하는 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청동상이든 석고상이든 말이다. 소설을 소설로 이해하고 감동받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부족함, 덜 준비됨 등으로 인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적지 않다. 특히 외국작가의 작품을 온전히 소화해내기란 어려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소설 작품을 몇번이고 읽고 또 읽어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재독 삼독하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니 소화가 덜 된채 책을 다 읽어놓고 재미 없다고 얘기하는게 나(혹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독서 습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으면 그가 평소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사물과 세상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고 이게 어떤 식으로 어떻게 소설로 연결될지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가로서 소설에 집중하는 이면에 음악에 대한 깊이와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그는 하루 종일 재즈가 듣고 싶어서 20대 후반에 7년동안 재즈바를 운영한 적이 있으며 작가가 되어서는 손으로 원고를 집필하면서 오른 쪽 손이 혹사되는 것을 풀어주기 위해 바흐의 2 part invention을 연습 삼아 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나 챈들러, 스캇 핏제랄드,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샐린저등 미국 작가들의 수 많은 작품을 소설을 쓰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 과외로 번역하는 전문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설을 왜 쓰는지,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무엇인지, 미국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 소소히 알고 나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보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는 것을 주체할 수 가 없어졌으니 이 '잡문집'은 참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세계라는 원더랜드로 들어가는 토끼굴 같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