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에세이도 아니고 잡문집이라니... 하지만 부피가 꽤 두툼해 거의 500페이지 가량되어 거의 100페이지 조금 넘는 '빵가게 재습격' 같은 것에 비하면 본전 생각은 덜할 듯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잡문집이라는 것이 내가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떤 소설 보다 잘 읽히고 흥미 진진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못 읽은 소설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읽었던 소설은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매력을 가진 글들의 모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잡문집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들의 (일종의) 거푸집(mold)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거푸집에 주물을 부으면 그대로 상이 나온다. 얼핏 보면 거푸집 자체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그 거푸집에 적당한 재질을 부어 넣으면 거기서 바로 얻고자 하는 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청동상이든 석고상이든 말이다. 소설을 소설로 이해하고 감동받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부족함, 덜 준비됨 등으로 인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적지 않다. 특히 외국작가의 작품을 온전히 소화해내기란 어려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소설 작품을 몇번이고 읽고 또 읽어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재독 삼독하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니 소화가 덜 된채 책을 다 읽어놓고 재미 없다고 얘기하는게 나(혹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독서 습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으면 그가 평소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사물과 세상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고 이게 어떤 식으로 어떻게 소설로 연결될지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가로서 소설에 집중하는 이면에 음악에 대한 깊이와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그는 하루 종일 재즈가 듣고 싶어서 20대 후반에 7년동안 재즈바를 운영한 적이 있으며 작가가 되어서는 손으로 원고를 집필하면서 오른 쪽 손이 혹사되는 것을 풀어주기 위해 바흐의 2 part invention을 연습 삼아 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나 챈들러, 스캇 핏제랄드,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샐린저등 미국 작가들의 수 많은 작품을 소설을 쓰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 과외로 번역하는 전문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설을 왜 쓰는지,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무엇인지, 미국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 소소히 알고 나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보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는 것을 주체할 수 가 없어졌으니 이 '잡문집'은 참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세계라는 원더랜드로 들어가는 토끼굴 같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