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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역시나 한강이다. 우주과학, 물리학, 생물학, 의학적 전문 분야에 대한 지적 탐구를 기반으로 사고 실험을 극단적으로 추진하여 폭발력있게 주제를 밀고 나가는 한편 세련되게 여성주의적 글쓰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다소 투박했던 <채식주의자> 연작소설보다 훨씬 우아하면서 여전히 격렬하고 숨가쁘며 희망적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한강 작가의 장편 소설 8편 중 6편을 읽었고 그중 <희랍어 시간>이 최애 소설이었는데 이제 <바람이 분다, 가라>로 바뀔 것 같다. 오감을 풍부하게 자극하며 미적 감각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적 산문의 힘과 광기어려 (정신나간) 매력적인 등장인물들까지 여전하여 반갑다.
*여기서부터 약스포*
다른 평론 및 리뷰들을 흁어보니 우주과학, 미술, 미스터리, 사랑 이야기로만 읽히는데, 여성주의적 관점에 대한 분석을 아직 못본 것같아 아쉽다. <채식주의자>에서처럼 여성주의 코드가 전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적 뮤즈로서의 삶, 길들여짊의 삶, 착취의 삶 등 제2의 성으로 소비됨에 따라 주체자로서의 지위에서 소외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이라는 거대한 자연과학적 메타포가 명백히 깔려있는 작품이라고 본다. 이과 전공이라 그 코드를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우주론적인 관점에서 확률적으로 기적에 가깝게 영원에서 덧없이 생성되었다 스러져가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이 상당 부분 묘사되지만, 이 실존의 덧없음이 소재 특유의 함정상 빠지기 쉬운 허무론으로 자칫 빠져들지 않는다. 우주와 무한, 그에 비하면 0에 가까운 인간 존재의 무상이 대비를 다루면서도 존재론적 염세론에 치우치지 않고 작가가 힘있게 주제를 이어가는 것은 창조의 본질을 지닌 여성 주인공들을 주축으로 전투적인 서사가 펼쳐지기 때문이리라. 이동선, 서인주, 이정희를 축으로 이어지는 여성 주인공들의 삶은 다양한 층위와 궤적으로 남성들에 비해 차별당해온다. 사고 현장에서 어린 남동생만 구출하는 부모때문에 가까스로 스스로 살아남거나(이동선), 성적으로 착취당하거나(여성 주인공들 모두 어느 정도), 남성의 뮤즈로 소비되거나(이동선, 서인주), 물리적인 폭력의 대상이 되며 (서인주, 이정희), 대변하고 반박하여 주장하는 목소리를 입막음당한다(이정희). 남성이면서 연대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이동주(삼촌), 정민서(서인주의 아들)는 열성 인자인 혈우병으로 짐작되는 유전병을 물려받아 폭력으로부터 취약하며 보호받아야 하는, Y염색체의 폭력 성향이 상쇄된 존재들로 은유된다. 비겁하고 거대한 폭력의 세계에서 약자들이 스러져 가는 가운데, 희망 하나가 끝내 생존하여 목소리를 내려 꿈틀 움직이는 순간이 그래서 뭉클하다. 작가의 미술에 대한 깊은 소양과 이를 기반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도 커다란 한 축이며, 지적이고 미적인 문장들의 향연을 황홀하게 읽어내려가는 즐거움은 더할 나위 없어 책장을 덮기 아쉬운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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