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까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밝히듯이 사람들은 생각하는 습관보다 육체가 추구하는 본능적인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워서 익힌다.
롤러코스터의 노래 〈Last  Scene〉의 가사처럼 우리는 '습관이란 건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안다. 습관이란 건 내가 왜, 무슨 이유로 그것을 하는지 깊은 성찰없이 마냥 그 행위만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도 그렇다.
내가 왜 살아가는지, 나의 존재의 근원은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는지 성찰하며 살아가기에는 현대 사회의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바쁘고 우리는 그 바쁨 가운데에서 생활의 습관에 젖어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누구나 가끔씩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이든 우연에 의해서이든 하던 일을 멈추고 익숙치 않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될 때가 있고, 그 때 자신의 존재와 그 가치에 한없는 만족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 참을 수 없게 된다.

20대의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서 나의 정신은 황야에 내맡겨진 야생 짐승처럼 포효하며 한없이 방황하거나, 혹은 도저히 심연의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구덩이 속에 던져넣은 돌멩이처럼 한없이ㅡ영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ㅡ추락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절망적으로 느끼는 한편, 너무나도 방관적으로 쳐다보며 우습게 느끼기도 했다.

알고 지내던 30대인 언니가 했던 말에(나는 30대가 아니므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다.

"젊어지는 게 물론 좋은 거긴 하지만 아무리 진짜로 젊어질 수 있다고 해도 나는 20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그 무서운 방황은 또 한 번 겪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해."
그렇다. 너무나도 끔찍하다, 이 방황은.

 자연스레 이런 상황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뭔가 멋져 보이는 문구의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은 마음에 와 닿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학과 과제를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만났고,  그래서인지 나중에는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제목조차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진정한 의미에서 읽고 느낀다'기 보다는 '읽었다는 것에 의미를 둔' 독서였다는 점이 너무나도 아쉽다.  하지만 때로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에세이 같은 인상적인 어구들은 '20대의 방황'을 하고 있는 나의 삶의 정곡을 날카롭게 찌르면서 다가왔다.

작중인물인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에게 뿐만 아니라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테마는 인간들이 겪는 영원한 고민거리 중 하나일 것이다ㅡ다만 쿤데라와의 차이점은 우리는 그냥 본능적으로 느끼는데 비해 그는 언어로 형상화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고로 풀어나간다는 점에 있겠지만.
인간은 이 테마에 있어서 누구나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존재의 가벼움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는 존재의 무거움에서 벗어나고픈 그런 욕망을 또한 갈망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두 여인의 대조적인 사랑과 삶이 제시된다.  물론 토마스와 프란츠라는 남성 주인공들도 있지만,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나에게는 그녀들의 상황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테레사의 무거운 사랑은 내 마음에 연민의 정으로서 아프게 다가왔다.  작품의 효용론적 감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테니깐(물론 나도).
그러나 그녀가 사랑하는 토마스는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릇된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존재의 무거움이라는 부담감으로 다가오지만 거부할 수 없는, 테레사에게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자그마한 토끼가 되어 테레사의 품에 안긴다.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그의 세계 전부를 포기한 셈인 것이다.

 사랑을 하면 이기적이 된다ㅡ맞는 말이다.  상대방을 감싸고 포용하며 언제까지나 한없이 베푸는 그런 것이 사랑이라 여겨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상대방의 언행을 구속하고 자신의 것만으로 그를 잡아두려고 하는 이기적 속성도 분명 사랑의 한 일부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범주에서 정의되느냐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테레사가 카레닌(강아지)을 사랑하는 것은 조건없이 그냥 그 존재로서의 카레닌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토마스를 사랑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서 그에게 사랑받는 것을 또다시 더 원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은 한 존재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마음이 지치고 내 존재 가치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여 패배감에 휩싸여 괴로워 견딜 수 없을 때,  누군가가 내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고 사랑으로 감싸주면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 다름 아닌 그것이다.  한 존재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켰기 때문에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내게도 과거에 사랑이 있었다. 그와 나는 처음부터 존재의 무거움으로서 만났다. 사랑이라는 것으로 인해 행복하고 의지가 되며 삶이 힘들 때 위안이 되는 것도 있지만 '아름다운 구속'이라는 노래 제목도 있듯이 때로는 존재의 무거움이 나를 쇠사슬로 매듯이 단단하게 옭아맬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나의 영혼은 숨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끼곤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비나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존재의 삶이 부럽기도 하다.  물론 그녀는 때로는 정말로 그 존재의 가벼움에 '참을 수 없어 하기도' 하지만,  나의 삶은 대체로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쪽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다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엄격했던 우리 집안은 너무나도 구속하는 것이 많았고,  나중에는 타의에 의한 자의의 포기로 인해 너무나도 무거운 삶을 살았다.

그 때문일까, 어렸을 때부터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유난히도 많이 꿨다.  꿈에서 깨어나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나는 여전히 무거운 존재 그대로이다.  내게 이 존재의 무거움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다. 가벼움만으로 산다는 것 역시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의 나는 가벼워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