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사이 - Rosso>를 읽고 그의 청아한 문체에 매료되었었다. 그 문체에 목이 말라 그녀의 작품을 더 느끼고 싶어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8년동안 서로 함께 했던 연인, 겐고와 리카. 하지만 8년동안의 사랑과 인연을 끊기로 겐고가 3일만에 결단하게 한, 하나코의 흡인력과 매력, 이라는 것이 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인데, 개인적으로는 정말 설득력이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하나코는 모든 이를 빠져들게 할 만한 흡인력을 갖고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속하지 않는 (그녀의 동생을 제외하고)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 설정에 거의 공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질투를 느끼고 미운 감정이 들어야 할 리카마저도 그녀의 매력 속에 함몰되어 동거하게 되었다는 설정도 너무 억지스럽다. 처음 읽었을 때는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무능하고 게으르고, 내뱉는 대사도 단편적이고, 제멋대로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의 알 수 없는 희미한 캐릭터. 빈둥거리며 하는 일도 없지만 8만엔이나 하는 집세를 매달 내 주는 사람이 있고, 어디를 가든지 그녀에게 휘둘린 사람에 의해 경제적으로 도움을 얻는 그런 캐릭터.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현실적으로 치열하게(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인간 관계에서든) 살아가면서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점에서 어떻게 보면 '배가 부른' 소설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게는 그런 인물들을 담은 소설이 훨씬 매력적이고 감동적이다. 작가는 그런 설정을 통해서 하나코의 흡인력을 더욱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내게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상황과 사건, 그녀와 인물들간의 갈등, 배경, 그녀의 심리 등이 더 잘 묘사되었더라면 그나마 설득력이 있었을텐데, 주인공 리카의 시점에서 묘사된 하나코라는 인물은 너무나도 희미하고 작위적이다.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작가는 하나코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을 강조하려다가 '밋밋하고 희미한' 캐릭터로 만들어 버린 실패를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억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매력있는 소설이다. 짧지만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게끔 하는 문장들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서 실연당했으나 하나코에게 흡인되고, 겐고를 여전히 사랑하는 리카의 심리가 잘 반영되어 있다는 점 등이 매력적이다. 소설의 여러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에쿠니 가오리만의 청아하고 깔끔한 아름다운 문체는 읽어나가는 내내 여름의 계곡에서 흐르는 시냇물처럼 내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사족. 김난주 씨의 번역은 정평이 나 있고 잘 된 편이나, 남자 주인공 '겐고'를 자기 편의로 '다케오'라고 바꾼 점에 불만이다. 역자는 '다케오'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내게는 '겐고'가 더 어울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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