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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ㅣ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평점 :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읽었던 소설 중에서 베스트 3 안에 들며 그 중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작품중 하나가 보르헤스의 《픽션들》이었다. 《픽션들》만 몇 번이고 읽다가 보르헤스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어서 기대를 갖고《불한당들의 세계사》를 도서관에서 빌려 와서 단숨에 다 읽었다(두께도 매우 얇다).
솔직히 말하자면 《픽션들》만한 작품집이라고 기대하고 읽었는지라 좀 많이 실망했다. 〈바벨의 도서관〉,〈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끝없이 두 개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기억의 천재, 푸네스〉, 〈비밀의 기적〉등등 《픽션들》에서는 한 작품도 버릴 작품이 없이 충격과 흥분을 자아냈었는데 말이다. 역자가 작품해설에서 밝히고 있듯이 상호 텍스트성, 다시 쓰기와 같은 보르헤스 작품의 특성이 서서히 태동하는 첫 작품집이라 아마도 미숙함이 있을 것이라고는 하지만.
〈기타 등등〉에서 천일야화를 새롭게 고쳐쓴 이야기 같은 것은 재미있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모든 작품들은 기존에 있었던 작품들을 현대의 언어로 다시 고쳐 썼을 뿐이라고 한다(〈장밋빛 모퉁이의 남자〉를 제외하고) . 각 작품마다 참고해서 쓴 문헌들이 참고문헌이라고 맨 뒤에 실려 있다.
이 작품집에서는 노예 상인, 사기꾼, 해적, 사무라이와 같은 불한당들이 등장해서 이와 같은 제목이 붙었다고 한다. 각 작품의 주인공들의 일대기는 역사서처럼 건조하게 서술되어 있다. 기존의 텍스트를 다시 썼다는 의미에, 문학은 어차피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절망감이 숨어 있다, 고 작품 해설에서는 말하고 있다. 만약에 내가 기존의 원전 텍스트들을 알고 나서 이 텍스트들을 읽었더라면 그것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느꼈을 테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별 감흥없이 이 작품집을 읽어야만 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이 작품집에서 묻어나는 고민을 발전시킨 작품이 아마도 《픽션들》의〈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작품일 것이다. 그 작품은 삐에르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한 자도 빠짐없이 고쳐썼지만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창조했다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보르헤스가 세계 각국 불한당들의 이야기 원전을 현대의 언어로 새로이 고쳐쓰면서, 과거의 언어와는 사회역사정치적 맥락에서 완전히 새로운 언어로 창조했듯이 말이다.
보르헤스의 고쳐쓰기 작업엔 소설은 늘 동어반복적일뿐 새로운 메시지나 이야기를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절망적인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터넷의 발달(그러고 보니 보르헤스가〈끝없이 두 개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하이퍼텍스트를 예견했다고 하는데, 쩝…)로 텍스트들과 재생산된 텍스트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이 시대에 과연 소설을 쓴다는 작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억원짜리 칙릿과 같은 작품이 넘쳐나고, 무릎을 칠 만한 현재의 읽을거리는 거의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과거회귀적이 되는 것일까. 오늘도 고전을 찾아 헤매다, 보르헤스가 던지는 메시지에 착잡한 심정이 되어 나는 오늘도 절망적이면서도 착잡한 의문에 빠져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