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작가는 뭔가 신비스러운 제목을 붙이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삼월은 붉은 구렁을》, 《흑과 다의 환상》, 《황혼녘 백합의 뼈》등등등. 작품의 직접적인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제목들은 작가가 좋아한다는 미스터리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일조하는 것 같다. 당분간 현대 일본 소설은 읽지 않기로 한 터에 대형 서점을 어슬렁 거릴 때마다 이 책의 예쁜 표지가 나를 살살 유혹하는 걸 보고도 지나쳤었는데,《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작품을 선물받아 읽고 나서 온다 리쿠라는 작가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그 작품 4부에서 《흑과 다의 환상》을 예고하기에 호기심이 생겨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매우 재미있어서 두 권을 한 자리에 앉아 단숨에 읽어버렸다.
대학 동창인 네 친구 리에코, 아키히코, 마키오, 쎄쓰코가 사십을 앞두고 Y섬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이 작가 특유의 이야기 풀어내는 방식이 작품마다 비슷하여 흥미롭다. 《밤의 피크닉》도 성장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소년 소녀들간의 관계에서 뭔가 알듯 모를듯한 비밀들이 야간 보행제를 통해 밝혀지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온다 리쿠 작품은 《밤의 피크닉》, 《삼월은 붉은 구렁을》, 《흑과 다의 환상》 세 편을 읽어 보았는데,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각 장에서도 그렇고 (나는 ‘미스터리 장르’에 딱히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른다) 등장인물들과의 관계, 그들을 어우르는 제 3의 인물의 정체, 추리로 인한 사건의 전말 같은 게 조금씩 밝혀진다.
……라고 정의를 내리니 뭔가 기분이 좋지는 않다. 나는 온다 리쿠의 작품에 ‘미스터리 장르’라고 이름 붙이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 (내가 읽었던 작품들에 한해) 온다 리쿠의 작품에는 추리 소설처럼 탐정이 등장하지도 않고, 뭔가 극적인 (해결되어야만 하는) 사건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의 시놉시스 비슷한 것들을 읽고 나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과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도 않다. 주인공들은 평범한 인물들일 뿐이다. 다만 우리의 삶 자체가 미스터리라며 미스터리를 예찬하는 아키히코의 말처럼, 연애와 애증, 한 인간의 중요한 가치나 성격, 그를 둘러싼 인간 관계, 행동을 야기한 원인 같이 보편적 인간 삶에 숨어있는 의미나 이유를 끊임없이 탐색할 뿐이다. 온다 리쿠는 복잡한 관계에서 벌어진 일과 인물간의 심리들을 퍼즐처럼 치밀하게 플롯을 짜놓아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톱니바퀴처럼 그것을 들어맞게 만든다. 여기에 굳이 ‘미스터리 장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게 난 뭔가 못마땅한 것이다.
리에코의 시점, 아키히코의 시점, 마키오의 시점, 쎄쓰코의 시점으로 번갈아서 소설은 진행된다. 각 시점에서 관찰된 인물들과 관찰되었던 인물들의 입으로 나레이션이 나올 때 같은 사람도 있고 이질적인 사람도 있다. 차분하고 신중한 리에코는 관찰된 모습과 본인의 나레이션이 거의 일치하는 인물이라면, 명랑한 쎄쓰코는 나름의 지옥과 신중함을 안고 사는 인물로 관찰된 모습과 본인의 시점에서 부조화가 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물론 그것까지 계산해 놓은 설정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디스트적 성격이 다분한 마키오(와 같은 인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의 시점으로 쓴 3부가 가장 매력적이었다.
음……. 별 세개, 별 네 개, 별 세 개, 하고 고민하다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라서 별 네 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