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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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거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소중한 걸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는 거다. 광고로 인해 만들어진 헛된 가치에 유혹되지 말고 새로운 스스로의 문화를 만들어 내라는 말이다. 죽기전에 자신을 용서하고, 다른 사람도 용서하고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엄연한 사실을 잊지 말라. 루 게릭이라는 야구선수가 걸렸던 병을 미국 사회학과 교수가 걸렸다. 당대의 종교이고 그래서 아편인 스포지지 기자인 교수의 제자인 저자가 화요일 마다 교수를 만나고 그의 마지막 강의를 듣는다. 강의명은 인생의 의미이고 텍스트는 교수가 인생의 경험에서 얻은 바이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수 있는가를 마지막으로 제자에게 가르쳐 주는 모리교수. 그의 비명은 <끝까지 스승이었던 자>이다. NBC의 나이트라인을 통해 3회 방송되었고 그는 상업성과 공모하여 사람들에게 그가 인생을 통해 배운 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려 했고 효과적으로 가르쳤다. 물론 일시적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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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공황
마이클 만델 지음, 이강국 옮김 / 이후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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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시에는 브레이크를 잡고(금리인상, 긴축) 실업시에는 액셀을 밟는다.(금리인하, 지출확대) 그러나 신경제는 본질이 틀리다. 신경제는 자동차가 아니라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서 속도를 줄일수 없으며 또한 그 관성으로 계속 날아가야 하는 비행기로 비유한다. 따라서 신경제의 공황 (인터넷 공황)에는 비행기식의 처방을 말한다. 조종사들은 추락할때 기체를 업시키는게 아니라 다운 시킨다.

미국의 신경제는 두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생산요소인 노동의 유연화(스탁 옵션)와 자본의 유연화(벤처 캐피탈). 이 두축의 공통분모는 주식시장 즉 IPO기업공개이다. 과거의 주식시장은 기업의 가치 척도였다면 현재의 주식시장은 기업의 자금원이다. 구경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주식시장의 영향력은 막강하여졌다. 따라서 인터넷 공황은 주식시장에서 온다. 만약 인터넷으로 인해 공황이 오게 되면 다른 자본의 축적으로 세계경제는 재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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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빅뱅
빅토리오 볼피 지음, 신혜영 옮김 / 지구촌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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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일본론이 유행하는 건 일본이 아직 미숙아라 어른이 되지 못하여 자기 스스로의 생각보단 남의 생각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목을 한국빅뱅이라 바꾸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듯. 한국은 일본의 아류라는 생각이 내내 들다. 우리가 현재 미국을 따라가고자 철저히 노력하는 것 자체 (글로벌 스탠다드)역시도 현재 일본을 모방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일본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로 하면 It's up to you. 당신네들에게 달려 있다. 장난 같지만 솔직히 그말 외에 무슨말을 더 할수 있겠나? 인생을 좀더 균형적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을 '수치의 문화'로 서구를 '형벌의 문화'로 규정하였는데 그 명제의 유효기간은 아직 계속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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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닷컴 1
김진명 지음 / 해냄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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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닷컴도 역시나 수구적 정신 (과거는 영원하다)에 바탕한 쇼비니즘 음모론이다. 이번 음모는 금융자본의 실력자들인 유대인의 세계정복 음모인데 이는 카발라라는 유대 신비교의 경전으로 대표된다 그 물질성은 정신성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데 이는 남사고의 격암유록에 있는 천부경이 그 짝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말이 많았던 수메르인의 한민족 가능성도 재탕했다. 이 책은 신의 지문이라는 핸콕의 저서를 상당부분 창조적으로 모방했다. 핸콕은 교수가 아니라 기자인 것 같은데 소설답게 교수로 나오고, 또한 이소설은 실명소설이다. 이 책에는 지관스님도 나오고 빌게이츠, 손 마사요시, 록 펠러등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빌 게이츠등은 세계정복을 꿈꾸는 프리메이슨의 일원이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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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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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셋이다. 넷도 아니고 (까라마조프의 아들은 넷일수도 있다. 이상한 녀석 스메르자코프도 있으니) 둘도 아니다. 셋은 동양 특히 한국에선 완전수로 대접받는다. 셋은 사이에서 나온 말로 하나와 둘의 사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투 다음에 나오는 쓰리는 투에서 파생되는 말이다. 서양적 사고에서 중용의 도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에겐 종말을 향한 사고가 사방에 깔려있다.

드미트리는 인간과 신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 자가 중용 즉 무게 중심이 된다. 그러나 그는 파멸한다. 인간적 과욕 (신심보다 더 커져 버린 정열. 그 인간적 귀결로)의 결과이다. 종말이 올 지 안 올 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탈출을 꿈꾸고 있고 더이상의 스토리 전개는 없다. 이 작품에서 이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는다. 신을 믿지 않은 결과로 정신적인 곤란함을 겪으며 살인을 사주(?)해버리고 급기야 병에 걸려 환상을 보기도 하고 스토리의 끝까지 회복되지 못한다. 삼남 알료샤는 신심을 상징하고 있다. 오히디푸스 콤플렉스 즉 부친살해 욕망을 햄릿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내었다. (햄릿이 아버지의 원수를 두고 갈등한건 단지 살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거다 혹 그도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인류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그따위라는 주장은 믿기에 너무 괴로운 명제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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