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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셋이다. 넷도 아니고 (까라마조프의 아들은 넷일수도 있다. 이상한 녀석 스메르자코프도 있으니) 둘도 아니다. 셋은 동양 특히 한국에선 완전수로 대접받는다. 셋은 사이에서 나온 말로 하나와 둘의 사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투 다음에 나오는 쓰리는 투에서 파생되는 말이다. 서양적 사고에서 중용의 도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에겐 종말을 향한 사고가 사방에 깔려있다.
드미트리는 인간과 신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 자가 중용 즉 무게 중심이 된다. 그러나 그는 파멸한다. 인간적 과욕 (신심보다 더 커져 버린 정열. 그 인간적 귀결로)의 결과이다. 종말이 올 지 안 올 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탈출을 꿈꾸고 있고 더이상의 스토리 전개는 없다. 이 작품에서 이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는다. 신을 믿지 않은 결과로 정신적인 곤란함을 겪으며 살인을 사주(?)해버리고 급기야 병에 걸려 환상을 보기도 하고 스토리의 끝까지 회복되지 못한다. 삼남 알료샤는 신심을 상징하고 있다. 오히디푸스 콤플렉스 즉 부친살해 욕망을 햄릿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내었다. (햄릿이 아버지의 원수를 두고 갈등한건 단지 살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거다 혹 그도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인류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그따위라는 주장은 믿기에 너무 괴로운 명제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