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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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석제는 여전히 그의 스타일로 글을 쓴다. 짧고 재미있게. 이 소설집은 폭소를 자아내는 그런 이야기는 몇 안 된다. (소설이라 하기보다는 이야기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저자는 이야기꾼이다.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유통시킨다.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네들 삶에 뿌리를 둔 아이러니를 이야기한다. 사는 건 언제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듯 하다. 그는 쓰일데 없는 호기심이 많다. 그런 자들이 세상을 부유하면 작가가 되고 뿌리를 내리면 인텔리겐차가 된다.

글의 금기가 없다. '당부말씀'은 말로만 이루어져 있다. 묘사나 서술같은 소설적 장치에 기대지 않고 라디오 극본같이 재미있게 써 내었다. 작가의 글쓰기는 작가가 이야기에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누구를 믿을 것이냐) 이건 묘한 경험이다. 이 소설집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일 낫다. 신랄하고 어이없는 저자의 세상풍자가 잘 드러나 있다.

경험의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 올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유. 그 한 장의 벽돌이 엉망으로 생겼든 반듯하게 생겼든 상관없다. 그런 편린들이 모여 성석제의 인생을 이루고 성석제식 글쓰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자신감은 버렸을 때 나온다. 소설의 형식을 버리고 플롯이나 사회적 인정을 버렸다. 전작(前作)처럼 재기 넘치고 유쾌하지만 한편 한편이 훨씬 짧아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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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 -상
에바토 데쓰오 / 대광출판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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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 기업소설에는 종합상사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가 많다. 종합상사가 그만큼 다이나믹하고 동물적인 조직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사는 수명이 다한 듯 보인다. 그들의 무역기능은 제조업체가 독자적으로 가져가고 금융기능은 시장확장을 노리는 금융회사에, 정보기능은 인터넷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이 소설은 이런 현실에서 인력삭감을 노리는 경영진(executives)과 일거리를 달라고 항명하는 조직원들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두 축으로 전개된다. 가야마와 이와모리가 동상이몽을 품은 채 I국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는 이야기와 제목으로 봐서는 주인공이 분명한 기타노가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는 과정 (새로운 사업기회란 유기농업이다)이 그 둘이다.

<좌천>은 손에 땀을 쥔다는 박진감과는 거리가 멀다. 상상하거나 (소설을 쓰는 도야마) 상부에 반항하는 자(기타노)는 가치없이 먹이감이 될 수 밖에 없다. 책은 본격적으로 리엔지니어링 소설이라고 선전하지만 소설에서는 리엔지니어링이 전혀 안 되고 있다. 불안한 상사맨들의 우려와 창가(window)족(族)의 불쌍한 복지부동만이 있을 뿐이다. 어쨌든 한 조직의 짐이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lay off가 거의 불가능했던 90년대 초의 노동 경직적인 일본의 이야기다. 사람은 각자의 뜻으로 산다. 그러니 누구를 비난하거나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일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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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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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자살을 결심한 남자가 다시 생의 의욕을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에서는 천둥을 매개로 이를 이야기한다. 천둥이 치던 날 그는 어머니를 잃었고 수 십년 후에 다시 천둥이 치던 날 그 날과 똑같이 장난질을 하면서 (그러나 공포는 극복되었다.) 집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없는 빈 집으로. 문제는 그 발생점에서 푸는 것이다. 소설의 수미상관식 구성을 위한 시도로 보이기도 하고 신경증의 원인을 밝히면 절로 치료된다는 그런 정신분석학적 믿음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의 고독은 부모의 부재덕이다. 명확하게 안 나오지만 조나단의 모친은 유태인으로 보인다. 이 후 부정한 아내와 사라져 버린 여동생에게 다시 버림을 받았다. 그래서 홀로 살았다. 그 불안한 고독은 공포를 낳았다. 그 공포의 정체는 비둘기다. 비둘기가 상징하는 평화라는 것이 공포스러운 것은 전쟁과 광기의 기억일 것이고 그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 자유로운 삶의 요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혼자 살기 위해서는 조그만 방과 의학사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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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흐름 경영
조영빈 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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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h is king 이라는 말이 있다. 현금이 왕은 아니겠고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모든 회사의 기능이 왕(현금)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현금은 솔직하다. 손익회계는 적정한 수익과 비용의 대응을 위하여 가정(假定)적으로 처리하는 기법이다. 현금중시 경영은 부기(Bookkeeping)의 원시적 기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계에 있어 일종의 Back to the basic이다. 이 책은 쉽고도 자세하게 현금흐름 경영을 설명한다. 현금은 지갑에 있는 돈이다. 그 돈이 어디서 왔는가. 또한 어디로 나갔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 현금흐름이다. 현금은 저량이고 현금흐름은 유량이다. 현금은 저수지이고 현금흐름은 수도관이다.

이 책을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기능별(다른 말로는 부서별로 영업, 구매, 생산, 지원, 기획 등)로 세부과제를 면밀하게 제시한 점이다. 내포가 넓어지면 외연이 애매해지는 실(失)이 있기는 하다. (경영기법에 Total 이라는 말이 붙으면 한결같이 똑같은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제 일에서 아이디어를 찾고 대안을 제시하는 좋은 태도이다. 어차피 현금은 현실이다. 이상도 가정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Cash만 믿으면 된다. 단순하다. 그래서 믿을만 하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볼 수 있는 눈을 얻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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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무라카미 류 지음 / 무당미디어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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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다. 결손가정에서의 성장이 '트라우마'가 된다는 것. 이는 부모의 상실보다는 부재에서 온다. '시게히루'는 엄마를 잃고도 용케 잘 살고 있다. 물론 이에는 '아오야마'가 일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미'는 그 결손에 계속 결박당해 있다. '아사미'가 발목을 절단하는 이유는 양부의 절름거리는 발과 연관이 있을 것이며 거짓말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은 니 얼굴보기 싫다고 해 놓고는 문틈으로 '아사미'를 보며 자위를 하는 양부의 위선 덕일 것이다.

그러나 아사미의 트라우마(영구적인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충격)의 정체는 여전히 애매하다. 소설이란 원래 독자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저자의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들은 이와는 다르다. 이런 식으로 인간성을 잃어 가는 현대인을 비판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는 정신적인 사치일 뿐이다. 훨씬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쓸 수 있는 작가가 이토록 엽기적인 행각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파해야 하는 이들을 안을 수 있는 대승적인 포용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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