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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 - 산 위 오두막의 생태철학자 아르네 네스와 20세기를 가로질러 나눈 대화
데이비드 로텐버그 지음, 박준식 옮김 / 낮은산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아르네 네스. 낯선 이름이다. 출판사는 그를 20세기에서 중요하게 기억될 철학자 중 하나라고 소개하지만 철학과 그닥 큰 인연을 맺고 있지 않은 이에게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라고 한다면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혹은 아주 아득하게 아도르노 정도의 프랑스풍 이름을 가진 이들이다. 책의 말머리는 그를 핵심적인 '생태' 철학자로 소개하고 있다. 생태 철학. 생태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도 아주 최근의 일이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환경'과 '생태'라는 개념은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고, '생태주의'의 개념이 '환경주의'의 개념과 구분된 것도 얼마되지 않은, 아니, 사실은 혼재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낯선 생태에다 철학까지 붙으니 첫 장을 펼치는 손이 쇠사슬을 매단 듯 무겁다.
하지만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 다행히도 아르네 네스라는, 철학자치고는 꽤 평이한 이름을 가진 이 할아버지는 일단 공부와 삶, 놀이와 일을 구분하지 않는 아주 '명랑한'사람이며, 책의 형식도 미국의 젊은 철학자(아르네 네스에 비한다면)가 아르네를 인터뷰하는 좌담 형식이어서 술술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의외로 잘나가는 책 읽기 진도에 흥겨워하다가 선뜩하게 마주치는 아르네 네스의 사색의 고갱이는 발길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를 테면 이런 대목이다.
"(트베스가스타인의 오두막에 머물다 보면 아주 작은 식물들을 며칠을 두고 관찰하게 됩니다. 황량하게 펼쳐진 자연 속에서 생존에 필요한 극히 적은 문명적 도구만을 가지고 살다 보면 그렇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전혀 다른 발달 단계에 있는 생명체들도 어떤 면에서는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테리아나 무척추동물이 가지는 엄청난 중요성을 아실 겁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 단세포 생물은 모두 자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동물, 식물, 바위로 이루어진 이 풍요로운 세계에 속한다는 느낌에 대해 일종의 이성적인 기반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꺼려하고 자연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점점 더 많이 자연을 지배하려 하고 자연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려 하지요 하지만 그런 의존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상호관계를 의미하며 그것을 통해 대우주로부터 소우주까지, 그리고 그 반대로도 가면서 자신이 엄청나게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차원에서 자신이 아주 작다는 것을 느낌으로써 더 넓어지고 깊어지며, 다른 사람들은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일이란 지구를 돌보는 것입니다. 지구를 돌보는 일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일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일이 되지요."
이것이 그가 주창한 '심층생태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연결된 세계를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아주 아주 작은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자아의 축소가 아닌 확장으로 이어진다는 것. 물론, 노르웨이의 자연환경과 그곳에서 생동하는 자연과 함께하며 자아를 연마했던 아르네 네스의 특수한 경험이다, 너무 순진하고 이상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이 따라붙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반론은 책 곳곳에 나오니 읽으시며 확인하시고. 초등교사인 나에게 이 대목은 또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누구라도 저 멀리 기억을 헤집어 보면 어린 시절, 열지어 가는 개미를 뚫어지게 관찰하거나 손만 대면 몸을 둥글리는 쥐며느리를 몇 번씩이나 만져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다 끝에서 해가 질 때 어떤 모양일까가 궁금해 한 시간이 넘도록 지는 해를 바라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이의 마음이다. 순수한 호기심에 몇 시간이고 자연을 응시하고 자연을 찬탄했던 그 경험들. 아쉽게도 성장이란 그 순수한 호기심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 가는 과정이 되어 버린다. 아이들에게 생태 교육이란 이런 접근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교실에서 재생비누 만들고 올바른 재활용 분류법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자연과 대면하고 그 속에서 마음껏 누려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생존과 풍요를 위해 환경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인간중심적인 환경론이서 탈피하여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인 생태론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더 성숙한 생태론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학원이다 숙제다 어른보다 바쁜 요즘 아이들에게야말로 가장 무망한 일일지도 모르나.
그가 못마땅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주장(혹은 주의)을 논리로서가 아니라 태도로서 받아들이고 싶다. 젊은 날 그가 심취했던 과학적 사고방식과 논리실증적 사고방식을 회수하고 '가능주의'를 소개했을 때, 그는 그것이 모든 진실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라고 했다. 즉, 인과론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갖지 말고 미지의 것이 작용할 가능성에 늘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들, 21세기의 그것은 너무나 깊고 넓고 다양해서 마치 인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그리고 정복하지 못한 세계는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인류의 지식은 세계에 분포하는 존재와 현상에 대해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으며, 그것을 다루거나 관리하거나 대처하거나 혹은 무엇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현재의 인류가 석기 시대 인류보다 더 나아졌다는 증거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불과 수십 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먹을 것을 버려가며 경제를 살린다고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이 바보 같은 상황은 지금 우리가 만든 것인 것이다. '가능주의'는 인류에게 조금 더 겸허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즉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에 대한 그의 반론 가운데 하나. 심층생태론이 국가적 개발주의에 대항하는 자세에 대한 요목 가운데 하나는 반대론자들의 주장과 논리를 '가능주의'에 입각하여 수용적인 자세로 경청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상정하여 그것에 반대하는 대신 내놓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반드시 마련하라는 것이다. 간디에 심취했던 아르네 네스는 정부가 그가 머물던 오두막 근처에 댐을 건설하려고 하자 그에 반대하였는데, 그를 찾아온 공무원에게 "우선 커피부터 마십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주앉은 그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그의 주장을 세심하게 경청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반대 논리를 펴는 상대방을 빙글거리며 비웃던 어느 진보논객이 떠올랐다. 그의 주장은 분명 명료했고 타당했으며 정치적으로도 옳은 것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는 '패자'로 보였다. 우리는 왜 그렇게 상대방을 멸시하고 비웃는 것에 익숙한지,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아르네 네스를 읽어보십시오, 라고 간절히 권하고 싶다. 그가 제안한 '가능주의'와 '현실가능한 대안'의 제시는 지금 수많은 갈등 상황 속에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제주도의 해군 기지를 설치할 것인가,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혹은 더 건설할 것인가)... 문제를 둘러싼 주장과 논리는 더할 수 없이 많이 존재하고 또 명확하다. 그러나 우리가 더 배울 것은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이다. 그것은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와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더 나아가게 하는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그걸 너무 간과하는 게 아닌가, 아르네 네스는 묻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는 아르네 네스의 가족사와 그의 취미이자 직업이었던 등반, 젊은 날 마약을 접했던 경험까지, 무게 잡고 있는 철학서에서는 볼 수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방대하게 다루어진다. 그런 이야기는 읽는 이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데, 그와 더하여 책을 기획한 이, 혹은 인터뷰어가 의도한 것은 아르네 네스가 고수한 게슈탈트적 사고방식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주체와 객체, 그리고 매개물을 무화시키고, 환경과 나, 그리고 그 둘의 상호적용이 일어나는 경험 전체가 하나의 시각이 된다는 의미를 지닌 게슈탈트적 사고방식은 그의 핵심적 주장이자 이 책이 그의 사상을 소개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기능한다. 서론 본론 결론 딱딱 나눠서 핵심어에 밑줄 그으며 읽는 인문서(혹은 철학서)가 아니라 즐거이 읽어 나가다 보면(의무보다는 재미가 우선이라는 것이 아르네 네스의 일관된 태도!) 어, 이 사람이 이거 말하려나 보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 그래서 앞서 말한 철학이니 생태니, 혹은 더 무섭게도, 심층생태학이니 하는 각잡은 개념들이 결코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와 너무 멀어져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르네 네스는 책 막판에 생각하는 것은 고통스럽다고 토로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직관적인데 언어는 다듬어져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을 이어주는 과정이 생각이기 때문이다. 아르네 네스는 언어로 다듬어지기 이전에 나오는 직관을 소중히 여기기를 주문한다. 생각은 바로 거기서부터 터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는 직관을 눈여겨보지 않고 하잘것없이 여기며 심지어 인지하지 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생각은 시작되며,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마침내 우리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밝혀 준다. 각자의 경험과 생각과 사유가 행동과 실천과 연대로 이어지면 결국 우리 사회의 진보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 라는 다소 반어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을 호기심의 고리 삼아 아르네 네스의 삶과 사유, 사상을 따라가면 조금은 생각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나를 발견할지도. 그렇다면 이 책은 그 의무를 다한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