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 - 산 위 오두막의 생태철학자 아르네 네스와 20세기를 가로질러 나눈 대화
데이비드 로텐버그 지음, 박준식 옮김 / 낮은산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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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르네 네스. 낯선 이름이다. 출판사는 그를 20세기에서 중요하게 기억될 철학자 중 하나라고 소개하지만 철학과 그닥 큰 인연을 맺고 있지 않은 이에게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라고 한다면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혹은 아주 아득하게 아도르노 정도의 프랑스풍 이름을 가진 이들이다. 책의 말머리는 그를 핵심적인 '생태' 철학자로 소개하고 있다. 생태 철학. 생태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도 아주 최근의 일이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환경'과 '생태'라는 개념은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고, '생태주의'의 개념이 '환경주의'의 개념과 구분된 것도 얼마되지 않은, 아니, 사실은 혼재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낯선 생태에다 철학까지 붙으니 첫 장을 펼치는 손이 쇠사슬을 매단 듯 무겁다.


하지만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 다행히도 아르네 네스라는, 철학자치고는 꽤 평이한 이름을 가진 이 할아버지는 일단 공부와 삶, 놀이와 일을 구분하지 않는 아주 '명랑한'사람이며, 책의 형식도 미국의 젊은 철학자(아르네 네스에 비한다면)가 아르네를 인터뷰하는 좌담 형식이어서 술술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의외로 잘나가는 책 읽기 진도에 흥겨워하다가 선뜩하게 마주치는 아르네 네스의 사색의 고갱이는 발길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를 테면 이런 대목이다.


"(트베스가스타인의 오두막에 머물다 보면 아주 작은 식물들을 며칠을 두고 관찰하게 됩니다. 황량하게 펼쳐진 자연 속에서 생존에 필요한 극히 적은 문명적 도구만을 가지고 살다 보면 그렇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전혀 다른 발달 단계에 있는 생명체들도 어떤 면에서는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테리아나 무척추동물이 가지는 엄청난 중요성을 아실 겁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 단세포 생물은 모두 자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동물, 식물, 바위로 이루어진 이 풍요로운 세계에 속한다는 느낌에 대해 일종의 이성적인 기반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꺼려하고 자연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점점 더 많이 자연을 지배하려 하고 자연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려 하지요 하지만 그런 의존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상호관계를 의미하며 그것을 통해 대우주로부터 소우주까지, 그리고 그 반대로도 가면서 자신이 엄청나게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차원에서 자신이 아주 작다는 것을 느낌으로써 더 넓어지고 깊어지며, 다른 사람들은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일이란 지구를 돌보는 것입니다. 지구를 돌보는 일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일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일이 되지요."


이것이 그가 주창한 '심층생태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연결된 세계를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아주 아주 작은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자아의 축소가 아닌 확장으로 이어진다는 것. 물론, 노르웨이의 자연환경과 그곳에서 생동하는 자연과 함께하며 자아를 연마했던 아르네 네스의 특수한 경험이다, 너무 순진하고 이상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이 따라붙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반론은 책 곳곳에 나오니 읽으시며 확인하시고. 초등교사인 나에게 이 대목은 또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누구라도 저 멀리 기억을 헤집어 보면 어린 시절, 열지어 가는 개미를 뚫어지게 관찰하거나 손만 대면 몸을 둥글리는 쥐며느리를 몇 번씩이나 만져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다 끝에서 해가 질 때 어떤 모양일까가 궁금해 한 시간이 넘도록 지는 해를 바라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이의 마음이다. 순수한 호기심에 몇 시간이고 자연을 응시하고 자연을 찬탄했던 그 경험들. 아쉽게도 성장이란 그 순수한 호기심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 가는 과정이 되어 버린다. 아이들에게 생태 교육이란 이런 접근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교실에서 재생비누 만들고 올바른 재활용 분류법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자연과 대면하고 그 속에서 마음껏 누려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생존과 풍요를 위해 환경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인간중심적인 환경론이서 탈피하여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인 생태론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더 성숙한 생태론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학원이다 숙제다 어른보다 바쁜 요즘 아이들에게야말로 가장 무망한 일일지도 모르나. 


그가 못마땅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주장(혹은 주의)을 논리로서가 아니라 태도로서 받아들이고 싶다. 젊은 날 그가 심취했던 과학적 사고방식과 논리실증적 사고방식을 회수하고 '가능주의'를 소개했을 때, 그는 그것이 모든 진실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라고 했다. 즉, 인과론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갖지 말고 미지의 것이 작용할 가능성에 늘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들, 21세기의 그것은 너무나 깊고 넓고 다양해서 마치 인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그리고 정복하지 못한 세계는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인류의 지식은 세계에 분포하는 존재와 현상에 대해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으며, 그것을 다루거나 관리하거나 대처하거나 혹은 무엇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현재의 인류가 석기 시대 인류보다 더 나아졌다는 증거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불과 수십 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먹을 것을 버려가며 경제를 살린다고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이 바보 같은 상황은 지금 우리가 만든 것인 것이다. '가능주의'는 인류에게 조금 더 겸허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즉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에 대한 그의 반론 가운데 하나. 심층생태론이 국가적 개발주의에 대항하는 자세에 대한 요목 가운데 하나는 반대론자들의 주장과 논리를 '가능주의'에 입각하여 수용적인 자세로 경청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상정하여 그것에 반대하는 대신 내놓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반드시 마련하라는 것이다. 간디에 심취했던 아르네 네스는 정부가 그가 머물던 오두막 근처에 댐을 건설하려고 하자 그에 반대하였는데, 그를 찾아온 공무원에게 "우선 커피부터 마십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주앉은 그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그의 주장을 세심하게 경청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반대 논리를 펴는 상대방을 빙글거리며 비웃던 어느 진보논객이 떠올랐다. 그의 주장은 분명 명료했고 타당했으며 정치적으로도 옳은 것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는 '패자'로 보였다. 우리는 왜 그렇게 상대방을 멸시하고 비웃는 것에 익숙한지,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아르네 네스를 읽어보십시오, 라고 간절히 권하고 싶다. 그가 제안한 '가능주의'와 '현실가능한 대안'의 제시는 지금 수많은 갈등 상황 속에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제주도의 해군 기지를 설치할 것인가,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혹은 더 건설할 것인가)... 문제를 둘러싼 주장과 논리는 더할 수 없이 많이 존재하고 또 명확하다. 그러나 우리가 더 배울 것은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이다. 그것은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와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더 나아가게 하는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그걸 너무 간과하는 게 아닌가, 아르네 네스는 묻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는 아르네 네스의 가족사와 그의 취미이자 직업이었던 등반, 젊은 날 마약을 접했던 경험까지, 무게 잡고 있는 철학서에서는 볼 수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방대하게 다루어진다. 그런 이야기는 읽는 이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데, 그와 더하여 책을 기획한 이, 혹은 인터뷰어가 의도한 것은 아르네 네스가 고수한 게슈탈트적 사고방식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주체와 객체, 그리고 매개물을 무화시키고, 환경과 나, 그리고 그 둘의 상호적용이 일어나는 경험 전체가 하나의 시각이 된다는 의미를 지닌 게슈탈트적 사고방식은 그의 핵심적 주장이자 이 책이 그의 사상을 소개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기능한다. 서론 본론 결론 딱딱 나눠서 핵심어에 밑줄 그으며 읽는 인문서(혹은 철학서)가 아니라 즐거이 읽어 나가다 보면(의무보다는 재미가 우선이라는 것이 아르네 네스의 일관된 태도!) 어, 이 사람이 이거 말하려나 보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 그래서 앞서 말한 철학이니 생태니, 혹은 더 무섭게도, 심층생태학이니 하는 각잡은 개념들이 결코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와 너무 멀어져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르네 네스는 책 막판에 생각하는 것은 고통스럽다고 토로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직관적인데 언어는 다듬어져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을 이어주는 과정이 생각이기 때문이다. 아르네 네스는 언어로 다듬어지기 이전에 나오는 직관을 소중히 여기기를 주문한다. 생각은 바로 거기서부터 터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는 직관을 눈여겨보지 않고 하잘것없이 여기며 심지어 인지하지 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생각은 시작되며,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마침내 우리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밝혀 준다. 각자의 경험과 생각과 사유가 행동과 실천과 연대로 이어지면 결국 우리 사회의 진보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 라는 다소 반어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을 호기심의 고리 삼아 아르네 네스의 삶과 사유, 사상을 따라가면 조금은 생각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나를 발견할지도. 그렇다면 이 책은 그 의무를 다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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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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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가 주는 서늘함이 너무 강해서 바쁜 틈에도 후속작을 꼭 읽어야지 했었다. 마침 놀러간 어느 집 책장에 꽂혀 있길래 빌려 읽게 되었다. 눈이 멀었던 사람들이 눈을 뜨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나의 얇디얇은 상상력에 기대는 것보다 우선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편인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걸려 온 태클을 여러 차례 이겨 내고 결국 완독하고야 말았다. (주제 사라마구의 글을 읽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문장부호라고는 오로지 마침표와 쉼표만 쓰는 그 해괴한 작가 취향 때문에 읽는 내내 여기서 그만 읽자는 꾀임이 수도 없이 밀려든다.)

전작과 비교하자면 우선 맥이 좀 빠진다. 우선 그 조건부터가 그렇다. 눈이 먼다는 것은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는 것으로, 그 자체로 인간의 행동이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단 한명의 예외를 두고 모두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 예외인 인물을 중심으로 독자는, 눈먼 자들의 사회심리학적 행동을 예측하고 확인하고 놀라워하며 경악하면서 이야기의 중심으로 확실하게 빠져 들어갈 수 있는 구도에 놓이게 된다.

그 반면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물리적이거나 신체적 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만큼 즉각적인 충격 여파는 다소 덜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다시 시력을 되찾았고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중, 선거에서 투표자의 80% 이상이 백지투표를 하는 일이 벌어지고 우파 정당이 잡은 정권은 그것을 일종의 반민주적 행위로 규정하여 주동자를 색출하기에 혈안이 된다. (아, 이 상황은 지금 우리 현실 어느 구석과 너무 닮아있지 않은가. 어제 신문에는 블로거 미네르바가 구속 수감되었다는 보도가 났다.) 정권의 수뇌인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각부 장관들은 곳곳에 프락치를 심고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며 심문하다가 여의치 않자 마침내 계엄을 선포하고 만다. (멀지 않은 훗날 우리가 겪을 일일지도!)

이 소설에서 왜 사람들이 백지투표를 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애초에 행동의 원인이랄 것이 설정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전작에서와 동일하다. 사람들이 왜 눈이 멀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눈이 멀고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했느냐는 것이다. <눈뜬>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행동을 살핀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바로 카메라의 위치다. <눈먼>에서는 눈이 먼 시민들에 카메라를 들이댔다면, <눈뜬>에서는 정치 권력자들에게로 카메라의 시선이 맞추어진다. 그들은 <눈먼>에서, 국가적 초비상상태에 이르러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던 무능력자들이었다. <눈뜬>에서는 그 무능력자들이 그간에 쌓인 피해의식과 더불어 권력을 더욱 공공히하고 때로 그 권력을 다른 것의 그것과 차별화하기 위해 얼마나 치졸하고 얄랼한 방법들을 동원하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이 어디로 향하는지 점점 명확해지면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주제어를 좀 더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눈뜬>은 <눈먼>보다 좀 늘어지고 엉성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시리즈물의 완결판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낸다. 눈먼 자들이 눈을 뜨면서 목격하게 되는 추잡한 권력의 추종자들의 행태들은 차라리 우리 눈을 스스로 찔러 다시 눈이 멀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전해 주며 마지막 장을 덮게 한다.  

실제 눈이 멀었던 이들은 그 참혹한 경험을 통해 서로간의 연대와 조용한 행동, 작은 희망에 대한 모두의 열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 듯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마음의 눈을 떴다 할 수 있겠다. 그런 메시지를 보자면 <눈먼>과 <눈뜬>은 서로 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눈먼>은 눈이 먼 상태에서 겪는 참혹한 일들이 너무나 절망적이지만 그 절망의 깊이에 비례하여 인간의 고결함에 대한 희망의 빛이 강렬하게 오버랩된다. 그러나 <눈뜬>에서는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대중의 현명함이 군데군데 희망의 싹을 보여주지만 결국 그것의 상징이 거세되면서 매우 절망적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자꾸 지금 우리 사회의 절망이 떠올랐다. 이명박 정권이 탄생하면서 하루도 조용할 날 없이 지내 온 1년. 쇠고기 파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촛불집회가 있었고, 종부세 폐지 논란이 거세었으나 결국 폐지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아이들에게 조금 더 보람찬 교육을 하고자 했던 교사들은 해직되었고 거대 자본의 손아귀에 방송을 넘기려는 시도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책 속 파렴치한 정치 권력자들은 어떤 반대 논리나 주장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 옹호만을 유일한 제일 목적으로 삼으며 그에 반하는 모든 것을 삭제해 버린다. 소통의 단절. 자신들을 외면하는 시민을 버리고 도시 바깥으로 떠나버린 그들처럼, 지금 MB 정권도 그 어떤 반대 논리와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의 결론처럼 우리도 암울한 끝을 볼 수밖에 없는가. 이 사회의 나아갈 바에 대한 혜안을 가진 일반대중은 결국 한 줌도 되지 않는 정치 권력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눈을 떠 가는데 자꾸만 눈을 감으려고 하는 그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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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사석원의 황홀한 쿠바
사석원 지음 / 청림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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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겁도 없이 정한 신혼여행지는 쿠바였다. 물론 엄청난 비행기 삯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유럽으로 바꿨지만. 하지만 지금도 무척 아쉽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쿠바는 왠지 굉장히 매력적인 관광지일 것 같다. 우선은 우리와 삶의 룰이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겠지. 자본주의를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인간의 삶은 어떠한지, 그래서 행복할 거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진짜 그런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다.
중미라는 점에서도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체 게바라! 촌스러운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는 모퉁이만 돌면 체 게바라의 초상을 만날 수 있다 하니, 체 게바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나로서는 꼭 가 보고 싶은 곳이다.

... 아내가 식탁에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놨다. 쌀밥 반 공기, 김칫국, 계란찜, 명란젓 두 토막, 그리고 몇 가지 나물들을 하얀 도자기 그릇에 담아 차린 정갈한 아침상이다. 마치 가지런한 아내의 모습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꽤나 생각날 것이다. 오늘 이 밥상은....

어라, 부푼 기대를 안고 넘긴 책은 첫장부터 분위기를 깬다. 미술 하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데, 이 사람 왠지 좀 불안하다. 처음부터 나는 인생을 날로 먹는 놈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남편이 긴 여행을 떠나는 날 아내가 아침상을 챙겨 줄 수도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러나 그걸 받아든 남편의 서술에서 그들 생활이 늘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가지런한 아내의 모습 같기도 하다"는 대목에서 그 혐의가 매우 짙어진다.

유쾌하지 않은 첫 인상은 그 후에도 쭉 이어진다. 우선, 문장이 좋지 않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서경식 씨의 책(<소년의 눈물>)을 읽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사람의 문장은 너무 수식이 많다. 열 손가락에 열 개의 반지를 낀 것 같다. 거실 벽에 어울리지 않는 액자를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 같다.

'예쁜 글'을 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글은 오히려 더 미워진다. 글의 승부는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떤 관점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가에 달렸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수식으로서 글을 치장하려고 들면 어쩔 수 없이 문장에 덧칠을 할 수밖에 없다. 안 해도 될 말을 꾸역꾸역하게 된다. 필요없는 말을 줄줄이 늘어놓다 보면 '사끼'가 느껴지게 된다. 그런데 '예쁜 글'을 쓰고자 하는 유혹은 너무 강하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도 그런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

어쨌든, 일본을 거쳐 캐나다를 경유하여 멕시코에서 하바나행 비행기로 갈아 타려는 이 아저씨, 비행기에 탑승하기는 했는데, 예쁜 일본 스튜어디스를 보고 마치 영화 <설국>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이 예쁘게 생겼다느니 하는 망언을 하다가 별 궁굼하지도 않은 일본 문화에 대해 온갖 잘난 척을 한다. 그 재수 없음은 캐나다의 공항을 경유할 때, 캐나다에서 영어 연수를 받고 있는 초등학생 딸내미 생각이 났다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슬슬 걱정이 된다. 이 아저씨, 쿠바에 가서 어떤 작태를 보일런지.

...솔직히 말해 줄리엣이 이고르의 말처럼 그렇게 예뻤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밤 늦게까지 같이 놀았을 텐데, 나는 노이에게 음료수를 사먹으라고 2달러를 주었다. 미안했지만 어서 호텔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만 자꾸 들었다. 힘없이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와, 해방이다...

놀랍다. 이 아저씨의 순진무구한 마초 근성은 둘째치더라도 여행지에서 만난 원지인에게 단지 그들이 매우 곤궁하게 생활하고 있으며 달러에 반환장한다는 이유로 좀 미안한 대목에서는 달러를 쥐어 주는 저 황당한 거만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아저씨의 이런 작태는 계속 이어진다. 마음에 드는 쿠바인, 좀 미안한 일을 한 쿠바인, 불쌍해 보이는 쿠바인에게 모두 2달러에서 5달러에 이르는 돈을 쥐어 준다. 지가 먼데.
이 아저씨의 오만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점포만 부족한 게 아니라 물건도 턱없이 부족하다. 진열돼 있는 상품들이 별로 없다. 신발 가게엔 달랑 신발 몇 켤레뿐이다. 채소 가게엔 빈 채소 박스만 썰렁하게 구석에 쌓여 있을 뿐 정작 채소 좌판은 초라하다. 쿠바는 유기농으로 유명하지만 식량을 100%자급자족하는 것으로도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100% 자급자족일지라도 풍족하게 보이진 않는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은 상대적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살고 있는 환경에 따라 인식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 아닌가. 한국의 백화점에선 농산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 당연하 ㄴ광경이니, 그런 모습에 익숙한 우리로선 당연히 쿠바의 야채 가게는 그야말로 옹색히다...

...식료품 가게에서 물 한 통을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끝에 서서 기다린다. 성질 급한 한국인의 한 사람인 나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답답해서 뛰쳐나가고 싶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 그래도 물은 먹어야 되니까. 젠장. 제기랄, 투덜거리면서 사 가지고 오던 물을 반이나 마셔 버렸다. 여러 통을 샀어야 했는데 무거울까봐 안 샀더니...

나는 대략 이런 류의 사람은 가급적 여행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위한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쿠바는 쿠바인 나름의 생활이 있다. 필자의 말대로 쿠바는 농산물 100% 자급자족에 대부분(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전량) 유기농 생산을 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 이후 마련된 식량 자급자족 정책 때문이다. 훌륭하지 않은가? 나는 어떤 면에서는, 쿠바의 이런 모습을 보며, 백화점에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그래서 음식에 대한 경외심을 일찌감치 버린,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적어도 그럴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쿠바인들의 모습이 훨씬 올바르다. 그런데, 이 아저씨, 삶의 인식 운운하면서 그 앞에서 투덜거리기만 한다. 이런 사람은 돈 있어서 쿠바에 가고, 덴장할!

아저씨의 가소로운 잘난 척은 마지막까지 화려하게 장식한다.
...전시장을 지키던 한 쿠바 여인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지금까지 전시장에서 동양인을 본 적이 없어서일까, 경비원이 ㄴ그녀는 우리들을 관심 있게 지켜본 모양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들이 문제였다. "이렇게 큰 미술관이 당신네 나라에도 있나요? 마티스, 피카소, 반다이크 같은 거장의 작품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경제적 빈국이라는 쿠바의 미술관엔 놀랍게도 마티스, 피카소는 물론이고 렘브란트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무겁다. 대답을 유에게 떠맡기고 나서 슬며시 돌아서고 말있다. 우리네 문화의 현 주소는 어디인가? 알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그것이 두렵다...

우리가 왜 마티스며 피카소, 렘브란트의 작품을 소유해야 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것은 단지 문화의 다양성 때문이다. 쿠바는 스페인 등 남부유럽의 지배를 받았으며 현재의 인종도 그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서양 예술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술일 수 있으며(물론 이것도 일부이다. 그들에게는 유구한 인디오의 유산도 있다.) 무엇보다 예술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전통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우리의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는 센스나 시스템 등이 매우 부실한 것은 사실이나 이런 식으로 서술해서는 안 된다.

그밖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오직, 쿠바에 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나서도 개운치 않지만, 쿠바에 가면 어디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공연을 볼 수 있는지, 어디를 꼭 가 보고 싶은지 정도의 정보를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꼭 쿠바에 가 보고 싶다. 그리고, 가기 전에 인식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 쓴 쿠바 여행기를 꼭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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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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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서점에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서경식의 책이 새로 나온 것이다. 나는 이미 <나의 서양미술순례>(창작과비평사, 박이엽 옮김)에서 서경식의 간명하고 소박한 질그릇 같은 글에 굉장히 매료되었었다. <나의 서양미술순례>는 한참 미술 관련 인문서를 읽어 내던 작년 여름, 어느 서점에서 내 손에 걸렸던 것인데, 그림에 대한 지식과 별도로, 나는 작가의 미문에 훨씬 더 마음이 갔다. 미문이라지만, 결코 화려하거나 유려하지 않다. 정갈하고 깔끔한 문장. 그런 문장에 거짓이란 끼어들 수 없는 것이었다.

주문을 마친 며칠 뒤, 택배가 배달되었다. 여러 가지 책과 함께 배달되었으나 내 관심은 오직 서경식의 새 책 <소년의 눈물>(돌베개, 이목 옮김)에만 가 있었다. 그러나 포장을 뜯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책은 하드커버 장정에 굉장히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내지는 고급스런 코트지였고, 쪽번호는 모두 안쪽으로 달아 두어 읽기가 몹시 불편했다. 이 책에는 일본의 저자와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 장마다 뒤쪽에 따로 주를 달아놓았다. 따라서 본문을 읽으면서 번번히 주석을 찾아보아야 했는데, 안에 달린 쪽번호 때문에 중간중간 맥을 놓치기 일쑤였다. 작가를 직접 찾아 가서 찍었다는 책들도 너무 작게 배치해 놓아 책 안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책을 살피는 데 좀 보수적인 편이기도 하지만, 하여튼 이 책의 꼴은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박하고 나직한 저자의 목소리와는 너무 딴판인 디자인과 장정이 혼자서 잘난척하는 양 보였다.

어쨌든.. 마음에 안 드는 책꼴을 만지작거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가 어릴 적부터 책벌레였다는 사실, 그리고 70년대 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오랜 수형 생활을 한 서승, 서준식(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이다.)의 동생이라는 저자의 가정사를 이미 전작을 통해 알고 있던 터라 더욱 흥미가 돋았다.

이 책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전히 아름답고 반듯한 문장들이다. 무엇보다 서경식 글의 장점은 예술 작품을 이야기하되 결코 자신의 삶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건, 문학 작품을 이야기하건.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도 작가는 언뜻 아무 상관이 없어보이는 서양의 중세 미술 작품에 동양인인데다가 한국 국적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도 처연히 몰입시켰다. 나는 내심 이 책에서 문학 작품에는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병치시킬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유년시절을 거쳐 사춘기를 넘어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거쳤던 책들을 장을 나누어 서술한다. 한 장에는 책 한권의 이야기가 담기는데, 사실 책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체에서 얼마되지 않는 양이다. 대부분은 그의 이야기이다. 그의 가족, 그의 형제, 그리고 그의 생활. 그러나 그것이 책과 전혀 관련없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주는 메시지를 작가 스스로 소화하고 그것을 잘 개어 독자들에게 친절히 전해 준다.

어렸을 때 읽은 책들을 나열할 때 나 역시 약간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목록에는 내가 읽었던 책들도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리틀 선생님의 이야기>(내가 읽은 책은 <돌리틀 선생님 이야기>이다.) <안데르센 동화집> <그림동화선>(내 기억으론 <그림 형제 이야기>) <십오 소년 표류기> <하늘을 나는 교실>!
그 외에도 열을 지어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엘리스의 이상한 여행> <닐스의 이상한 모험> <소공자> <소공녀>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 <작은 아씨들>...
이것은 모두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세계명작이라는 전집에 들어있던 작품들이었다. 당시 엄마는 서점에 가서 책을 골라주기보다 집집마다 다니며 전집류를 팔았던 외판원을 통해 책을 구입하곤 했다. 계몽사의 소년소녀세계명작 외에도 역시 계몽사의 <성경이야기 시리즈>(5권), 삼성당의 세계위인전집(50권)도 그렇게 구매하게 되었다.
이 전집들은 초등학교 생활의 가장 큰 낙이었다. 기억으론, 각 전집을 세 번 이상 반복해서 읽었던 것 같다.

...독서에 열중할 때면, 나는 식사 중에도 무릎 위에 책을 펼쳐놓고는 '밥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이때 어머니는 "밥을 먹든지 책을 읽든지 한 가지만 하려무나' 하고 가볍게 꾸지람하시면서도, 내가 종알종알 책의 내용을 재잘거리기라도 하면 재미있다는 듯 말벗이 되어 주셨다...(42쪽)

이 대목을 읽다가 나도 옛날 생각이 나서 웃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엄마들은 다 비슷한가 보다. 늘 그렇게 꾸지람하면서도 책 읽는 모습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요즘은 어린이문학 전집에 대한 말이 많지만, 나는 사실 전집을 그리 나쁘게 보는 편은 아니다. 내가 이미 전집을 통해 책을 만났고, 그때 읽었던 책들이, 어떤 측면에서는, 그만한 나이에 가질 수 있는 통찰력을 키워줬다고 생각한다. 목록이 서양편향이며, 영웅중심이며 하는 비판들이 사실은 양날의 칼이다. 훌륭한 문학은 늘 인생에 눈물도 희망도 함께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전집의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집으로 풍부한 '독서인생'을 살았던 나는 그 이후 중학생이 된 이후로 스스로 책을 살 수가 없었다. 전집으로 구매할 수 있는 책 중에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 없었고, 더군다나 중학생은 '독서'가 아닌 '공부'를 해야 할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번째 이유는 핑계에 불과하다. 문제는, 전집으로 책을 읽던 나는 서점이라는 공간과 책을 선택적으로 구매한다는 구매 행위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책을 사야 할지,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몰랐다. (물론 서점에서 책을 판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말은 아니다. --;;)
무경험은 무지를 낳았고 무지는 다시 무경험을 낳았다. 나는 '순수하게'(참고서나 문제집을 사기 위해서가 아닌) 책을 사기 위해 몇 번이나 어렵사리 서점에 들어갔지만 결국 빈손으로 나오곤 했다.

그리고 나는 고3 수능을 마치고 나서야 다시 '순수한 책 구매자'가 될 수 있었다. 내 손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1>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은 내 인생의 각도를 약 30도 정도 돌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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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대장 존 비룡소의 그림동화 6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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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그림책을 보면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이가 학교를 가는 길에 악어를 만나고, 사자를 만나고 그래서 결국 지각하게 되고. 결국은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반성문을 쓰고. 악어를 만난 것도 사실인지 아닌지 헷갈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이걸 보면 재미있어 할까, 에이 거짓말이에요, 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믿지 않은 교사가 자신의 환상과 같은 상황에서 궁지에 몰린 것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유쾌해했다고 한다. 아이들에겐,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저 자기들의 마음을 몰라 주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어른들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이 책은 그런 이아들의 마음을 정곡으로 치고 나간 것이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이 책을 쓴 작가의 목적이었다면, 이 책은 성공적인 작품인 것 같다.

더불어 나도 점점 궁금해진다. 아이들의 환상세계, 아이들이 상상하는 환타지를 나도 느껴 볼 순 없을까. 그러기엔 너무 어른이 되어 버린 걸까. <지각대장 존>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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