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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가 주는 서늘함이 너무 강해서 바쁜 틈에도 후속작을 꼭 읽어야지 했었다. 마침 놀러간 어느 집 책장에 꽂혀 있길래 빌려 읽게 되었다. 눈이 멀었던 사람들이 눈을 뜨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나의 얇디얇은 상상력에 기대는 것보다 우선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편인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걸려 온 태클을 여러 차례 이겨 내고 결국 완독하고야 말았다. (주제 사라마구의 글을 읽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문장부호라고는 오로지 마침표와 쉼표만 쓰는 그 해괴한 작가 취향 때문에 읽는 내내 여기서 그만 읽자는 꾀임이 수도 없이 밀려든다.)
전작과 비교하자면 우선 맥이 좀 빠진다. 우선 그 조건부터가 그렇다. 눈이 먼다는 것은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는 것으로, 그 자체로 인간의 행동이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단 한명의 예외를 두고 모두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 예외인 인물을 중심으로 독자는, 눈먼 자들의 사회심리학적 행동을 예측하고 확인하고 놀라워하며 경악하면서 이야기의 중심으로 확실하게 빠져 들어갈 수 있는 구도에 놓이게 된다.
그 반면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물리적이거나 신체적 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만큼 즉각적인 충격 여파는 다소 덜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다시 시력을 되찾았고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중, 선거에서 투표자의 80% 이상이 백지투표를 하는 일이 벌어지고 우파 정당이 잡은 정권은 그것을 일종의 반민주적 행위로 규정하여 주동자를 색출하기에 혈안이 된다. (아, 이 상황은 지금 우리 현실 어느 구석과 너무 닮아있지 않은가. 어제 신문에는 블로거 미네르바가 구속 수감되었다는 보도가 났다.) 정권의 수뇌인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각부 장관들은 곳곳에 프락치를 심고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며 심문하다가 여의치 않자 마침내 계엄을 선포하고 만다. (멀지 않은 훗날 우리가 겪을 일일지도!)
이 소설에서 왜 사람들이 백지투표를 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애초에 행동의 원인이랄 것이 설정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전작에서와 동일하다. 사람들이 왜 눈이 멀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눈이 멀고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했느냐는 것이다. <눈뜬>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행동을 살핀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바로 카메라의 위치다. <눈먼>에서는 눈이 먼 시민들에 카메라를 들이댔다면, <눈뜬>에서는 정치 권력자들에게로 카메라의 시선이 맞추어진다. 그들은 <눈먼>에서, 국가적 초비상상태에 이르러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던 무능력자들이었다. <눈뜬>에서는 그 무능력자들이 그간에 쌓인 피해의식과 더불어 권력을 더욱 공공히하고 때로 그 권력을 다른 것의 그것과 차별화하기 위해 얼마나 치졸하고 얄랼한 방법들을 동원하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이 어디로 향하는지 점점 명확해지면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주제어를 좀 더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눈뜬>은 <눈먼>보다 좀 늘어지고 엉성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시리즈물의 완결판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낸다. 눈먼 자들이 눈을 뜨면서 목격하게 되는 추잡한 권력의 추종자들의 행태들은 차라리 우리 눈을 스스로 찔러 다시 눈이 멀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전해 주며 마지막 장을 덮게 한다.
실제 눈이 멀었던 이들은 그 참혹한 경험을 통해 서로간의 연대와 조용한 행동, 작은 희망에 대한 모두의 열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 듯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마음의 눈을 떴다 할 수 있겠다. 그런 메시지를 보자면 <눈먼>과 <눈뜬>은 서로 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눈먼>은 눈이 먼 상태에서 겪는 참혹한 일들이 너무나 절망적이지만 그 절망의 깊이에 비례하여 인간의 고결함에 대한 희망의 빛이 강렬하게 오버랩된다. 그러나 <눈뜬>에서는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대중의 현명함이 군데군데 희망의 싹을 보여주지만 결국 그것의 상징이 거세되면서 매우 절망적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자꾸 지금 우리 사회의 절망이 떠올랐다. 이명박 정권이 탄생하면서 하루도 조용할 날 없이 지내 온 1년. 쇠고기 파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촛불집회가 있었고, 종부세 폐지 논란이 거세었으나 결국 폐지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아이들에게 조금 더 보람찬 교육을 하고자 했던 교사들은 해직되었고 거대 자본의 손아귀에 방송을 넘기려는 시도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책 속 파렴치한 정치 권력자들은 어떤 반대 논리나 주장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 옹호만을 유일한 제일 목적으로 삼으며 그에 반하는 모든 것을 삭제해 버린다. 소통의 단절. 자신들을 외면하는 시민을 버리고 도시 바깥으로 떠나버린 그들처럼, 지금 MB 정권도 그 어떤 반대 논리와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의 결론처럼 우리도 암울한 끝을 볼 수밖에 없는가. 이 사회의 나아갈 바에 대한 혜안을 가진 일반대중은 결국 한 줌도 되지 않는 정치 권력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눈을 떠 가는데 자꾸만 눈을 감으려고 하는 그들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