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해리 트루먼이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한국전쟁을 직간접으로 겪은 60대 이상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그들 대부분도 트루먼을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경질하고 북진 통일을
미루게 한 장본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의 역사 인식 역시 어릴 때 듣고 보고 배운 것들로부터 형성되기
쉽다. 필자를 포함해 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맥아더는 영웅이며, 트루먼은 맥아더의 북진을 반대한 편협한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최근에 일부 언론과 논객들의 주장을 통해 미국의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이야말로 진정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준 인물이며
대한민국의 은인이라는 인식이 퍼지고는 있지만, 어느 쪽이든 우리나라 사람들의 트루먼에 대한 평가 혹은 인식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트루먼은 한국정쟁이라는 범주를 훨씬 넘어섰던 인물이었다.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조사에서 트루먼은 여러 차례 10위
안에 들어갔던 뛰어난 지도자였다. 새천년을 맞이한 2000년,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 미국의 저명한 학자 132명에게 의뢰한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조사에서도 트루먼은 8위를 차지했다. 다른 조사에서도 6위로 선정됐으며, 우리나라 미국사학회도 2011년 창립 20주년 기념사업으로 출간한
(위대한) 『미국대통령 시리즈』 10권 가운데 제8권을 트루먼에게 할애했다.
미국에서 트루먼에 대한 평가가 처음부터 이처럼 높지는 않았다. 1953년 퇴임하기 전 지지율은 한때 23%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을 받아 1974년 37대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의 최저 지지율도 이보다 1%
높았다. 퇴임 후에도 트루먼은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 다음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트루먼은 퇴임 후 부인 베스(Elizabeth Wallace)를 태우고 낡은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 미국 이곳저곳을 여행
다녔다. 당시는 트루먼이 국민들로부터 별 인기가 없었으며, 퇴임 대통령에게 운전기사는 물론 경호원도 배당되지 않던 때였다. 한 번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지인 집을 찾아 가다 방향을 잃자 트루먼은 차를 세우고 가까운 집 초인종을 눌러 길을 물었다. 집 주인 역시 길을 몰랐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우. 근데 당신, 그 늙다리 SOB 트루먼을 좀 닮았구려. 언짢게는 생각마쇼….” 트루먼이 집주인을 쳐다본 후 씩 웃으며
답했다. “언짢게는 생각 않지만, 내가 그 늙다리 SOB, 해리 트루먼이 맞소.”
트루먼이 매우 소탈한 인간적인 풍모를 지닌 사람이었음을 증명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이 일화는 당대에 그의 인기가
바닥이었음도 같이 보여준다. 그러나 트루먼은 퇴임 후 약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인 1970년대 후반부터 그동안의 저평가에서 벗어나 뛰어난
덕성을 지닌 지도자로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그 흐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트루먼이 재평가를 받은 이유는 물론 그의 장점들이 뒤늦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하버드대학 석좌교수인 조지프
나이(Joseph Nye)는 정치인으로서 트루먼 리더십이 평가절하 되었던 은 사람들이 “그가 지명한 인상적인 팀의 존경을 선택하고 지휘하는
능력을 무시했으며, 그의 직무 학습과 상황지성을 개발하는 능력을 낮춰본 데다, 맥아더 해임,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핵무기 사용 거부와
같은 힘든 결정 등에서 그의 자발적인 의지를 놓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바로 트루먼은 훌륭한 팀 - 내각 혹은 참모진 - 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였으며, 경험 대신 학습에 성공했던 노력가이고, 무엇보다 결단을 내릴 때는 남에게 미루지 않았던 정치가였다.
그러나 트루먼은 정치가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지극히 성실, 정직했고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후에도 가난했지만 청렴한
사람이었다. 도전을 받았을 때는 투지와 끈기로 극복했으며, 설득이 필요할 때는 단호한 논리와 다른 이들을 웃게 만드는 유머를 구사했다. 그는
아랫사람을 섬기고 사랑했으며 자기 과시를 몰랐던 위인이었다. 틈이 나면 역사책을 읽으며 과거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모차르트, 쇼팽의 발라드와 녹턴은 물론 재즈곡까지 피아노 연주를 즐겼던 예술적 감성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부인을 비롯한 가족에게는
지극한 사랑을 바쳤으며, 국가와 국민에게도 그런 사랑을 쏟아 부었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는 정치가가 트루먼이었다. 5피트
10인치(176㎝)의 키로 미국 사람으로는 작은 편인 트루먼이 ‘작은 거인 Little Big Man’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가?
물론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무엇보다 핵폭탄을 인류에게 사용하기로 결정한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는
비난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필자는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지 않고 항복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과연
일본이 그럴 수 있었을까’라는 의심도 갖고 있다.
필자는 우리가 트루먼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매력이 많은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는다면 누구에게서 배운단
말인가? 『강대국의 흥망(Rise and Fall of Great
Power)』이라는 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폴 케네디(Paul Kennedy, 예일대 역사학 교수)는 2007년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자신감을 불어넣고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희망과 자신감 그리고 비전을 제시해 주는
인물, 국민이 어떤 불만을 갖고 있는지 들어주는 인물, 즉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같은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케네디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대통령은 전혀 그런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고, 2012년 선출된 현 대통령 역시 전임자와 이전 대통령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은 모질고 험한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에게는 희망과 자신감, 비전을 보여주면서 국민이 어떤 불만을 갖고 있는지 귀 기울여 들어줄 대통령감이 아예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사람이 있어도 우리가 미욱해 찾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70년 전, 남의 나라 대통령이지만 트루먼의 리더십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아직까지
없었던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