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도
법이다’의 진실
많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두 가지 명언을 남긴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와 “악법도 법이다”라는 구절이 그렇다. 그러나 ‘너
사진을 알라’의 그리스어 ‘그노티 세아우톤’γνῶθι σεαυτόν은 소크라테스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델포이의 신전에 새겨진 글귀이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를 알면 열을 말하는 소피스트들에게 이 말을 썼다. 스스로 얼마나 무지한지 깨달으라고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숨지기 전에 한 말로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도 와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원래 고대 로마의 법언인 ‘법은 엄하지만
그래도 법이다’라는 뜻의 라틴어 ‘두라 렉스Dura lex, 세드 렉스sed lex’에서 나온 것이다. 2세기경 로마 법률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는 이를 두고 “이는 실로 지나치게 심하다. 그러나 그게 바로 기록된 법이다”라는 의미로 풀이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한 것으로 와전된 단초는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가 제공했다. 그는 1937년에 펴낸 『법철학』에서 이 법언을 인용해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라며 ‘악법도 법이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주장은 바로
로마법언을 인용한 오다카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한 것처럼 와전되어 유포된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 대목을 마치 사실인 양 부각시킨 것도 크게 작용했다.
주목할
것은 오다카 역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술하지는 않은 점이다. 그는 단지 소크라테스의 사례를 거론하며 로마법언을
인용해 ‘악법도 법이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이를 곡해한 것은 전적으로 오다카 밑에서 법철학을 공부한 황산덕 등의 법학자들
탓이다. 이들은 이러 왜곡된 얘기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과연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각에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이 말이
억압적인 법집행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
2005년 서강대 정치학과의 강정인 교수가 공저로 펴낸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가 대표적이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정밀하게 추적하면서 이 말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적인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주장키를,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은 법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거부하고 해외로 도망갔다면 이는 자신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강정인은 이를 근거로 소크라테스가
지키고자 한 것은 악법이 아니라 법보다 더 상위에 있는 진리였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친구이자 제자인 크리톤의 탈옥 권유를 좇을
수도 있었는데 그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무래도 지나쳤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소크라테스가 탈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것은 소크라테스는 법 위에
있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독배를 마셨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이는 복잡하게 해석할 일이 아니다. 비록 타락한 형태이기는
했으나 소크라테스도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계를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다카의 주장처럼 소크라테스 역시 비록 그같이
말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악법도 법이다.’라는 로마의 법언을 수용했다고 풀이하는 게 옳다.
『회상록』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유무죄를 논하는 자리에서 “왜 새점을 치는 자들은 내버려 두고 나만 신을 모독했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항변했다. 이어 30표의 근소한 차로 유죄가 결정된 후 형량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더욱 거칠게 항변했다.
그를
비판한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는 소크라테스 역시 여타 소피스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일개 ‘철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답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용히 독배를 마시는 길밖에 없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독배를
내던지거나 할 경우 이는 치명타로 작용할 게 빤했다. 강요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고고함을 드러내는 게 최상의 선택이었다. 실제로
그는 그같이 행동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오는 자문자답 형식의 대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국법’이라는 가상의 화자를 등장시켜 과연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판결을 수용할 것인지 여부를 자문자답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개인에 의해 국법이 짓밟힐 경우 나라는 존속할 수 없다는 ‘국법’의 주장에 대해 그는 “국가는 공정하지 못한 선고를 내렸다.”고 항변했다. 이어
소크라테스 부모의 결혼을 규제하지 않았고, 이어 그 자식인 소크라테스를 국가에서 훈육했으니 소크라테스 역시 국가의 자녀에 해당한다는 ‘국법’의
주장에 대해 그는 이같이 대답했다.
“그렇다.
나라의 처벌을 받았을 때는 감금이든 처형이든 조용히 참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 역시 비록 타락하기는 했으나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제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막다른 상황에 몰려 부득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행보를 놓고 ‘법보다 상위에 있는 진리’ 운운하며 미화하는 것은 또 다른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소크라테스는 ‘힘이 곧 정의다.’라고 생각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상식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그의 이런 도발적인 행보는 시민들의
불쾌감만 조장할 뿐이었다. ‘불의를 당하는 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낫다.’는 말은 언급은 나름 이해할 수 있으나 당대의 정치가인 페리클레스를
두고 시민에게 아부만한 정치가일 뿐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은 도가 지나쳤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이는
시민 대다수를 적으로 돌리는 짓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는 자신만이 ‘진정한 정치적 기술’을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 그의 죽음은 그가 법정에 서기 훨씬 이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다. 사권과 공권 내지 사익과 공익의 질과 양을 따져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교량較量이 필요한 이유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의 잘못된 표결에 의해 자신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됐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받아들여 독배를 들이킨 것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부득이한 상황에 몰린
탓이다. 결코 법보다 위에 있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독배를 들이킨 게 아니라는 얘기다. 이같이 해석하는 것이 크세노폰이 『변명』 등에서 묘사해
놓은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부합한다.
당대
최고의 현자인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는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실제로 아테네는 이후 쇠락의 길로 치달았다. 최상의 정체로 간주된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군주제나 공화제의 타락한 모습보다 더
무서운 모습을 띨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