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고향으로 가는 짧은 여행

 

 

자크 랑시에르 지음

곽동준 옮김

 

 

목 차

서문

1. 새로운 고향

시인의 여행 – 윌리엄 위즈워스

유토피아의 땅 - 생시몽

사람들의 노래 – 게오르그 뷔히너

바다의 거울 – 클로드 즈누

 

2. 가난한 여자

화석화된 꽃 - 미슐레

마르트와 르네 - 릴케

 

3. 한 아이 자살하다 – 로베르토 로셀리니

 

 

서문

이 책에서는 여행에 대한 문제를 다룰 것이다. 그렇지만 저 머나먼 섬이나 이국적 경치가 아니라 방문자에게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이미지를 주는 아주 가까운 고장에 가는 여행이다. 바다 건너편에, 강이나 대로에서 떨어진 곳에, 도시의 수송로 저 끝에는, 단순히 그냥 사람들이 아닌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거기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시로 돌아가거나, 지옥으로 내려가거나, 약속의 땅이 도래하는 것 같은. 나뭇잎에 내리쬐는 7월의 태양은 유럽대륙을 산책하는 영국 시인에게 축제의 자연에 주어진 혁명적인 프랑스의 새로운 빛이 된다. 손 강 강가의 한 주막에서 서로 부딪치는 술잔들, 어느 6월의 달콤한 저녁, 시골의 어느 일요일 울리는 바이올린과 노래 소리는 새로운 사회의 우애 깊은 모임이 된다. 그리고 역사가는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지 않고도 그가 유혹한 여자 종업원에게서 프랑스를 만든 촌스럽고 야만스러운 사람들의 정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행의 즐거움에 마을이 아름답고, 늘 태양이 비추고, 여종업원이 예쁠 필요까지는 없다. 콘크리트 벽돌이나 벽토와 판자, 양철로 된 막사 위에 드리워진 겨울 하늘의 잿빛 풍경은 이미 말하고, 읽고, 듣고, 꿈꾸었던 것과 유사하게, 바로 그 낯선 가운데 오랫동안 찾다가 단번에 알아본 한 농부가 직접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만으로 나그네를 기쁘게 할 수 있다. 생생한 현실을 겪어보기 위해 집을 나서고 도시와 책을 떠나 직접 걸어 다녀보겠다고 한 사람들에게 옛날 마오쩌둥의 책에서 약속한 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현실은 책의 무기력함을 고발하면서 거기 있었지만, 책에서 기대하고 있던 것이나 흔히 말로 나타내는 것과 아주 유사했다. 여행한다는 것, 여행을 통해 알 수 있는 이런 낯섦을 발견하는 것, 책에서 나타내는 글과 정반대거나 아주 유사한 이런 생생한 삶은 억압의 분석이나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의 의미, 우리 세대의 생생한 정치적 경험 이전에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의 모범 답안처럼 호기심 어린 시선이나 무관심하거나 열정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이런 기호들, 어떤 생각이 어떤 개념을 현실화시키는 생생한 풍경이나 장면에서 구체화되는 방법에 대해 의문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우연히 혹은 공통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이런 정치의 고고학에 속하는 몇 가지 여행, 짧은 만남 혹은 놓쳐버린 약속 등이 나타날 것이다. 미래의 사람들을 찾아가는 선교사들의 여행, 우연히 이 사람들과 마주치는 관광객들의 여행 혹은 그들을 만나지는 못하지만 남유럽의 바다에서 자신의 신분을 예상치 못한 거울을 발견하는 노동자의 여행 등. 특히 이방인들이 이 책을 가로질러 갈 것이다. 이를테면, 알프스의 산길에서 프랑스 대혁명 축제에 놀란 어떤 영국 시인, 스트라스부르에서 멋진 과학의 혁명 아래 스스로 심연으로 내려가기 전에 어떤 프랑스 유토피아의 길 잃은 여행자를 만나 비웃는 독일 시인, 자신의 가난의 노래를 파리의 어떤 젊은 노동자의 막연한 욕망에 맡기는 또 다른 독일 시인, 미지의 사람들을 방문하고 이방인으로서의 특징을 반영하는 세계의 여자를 이탈리아 연출가에게 연기하는 스웨덴 여배우 등이.

그들의 시선과 발걸음의 리듬에 따라 새로운 고향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고 해체된다. 단순히 이방인이 언어를 배우거나 경험이 있는 그의 시선으로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온전한 정신은 경치를 그리고 믿음의 주름에 주름살과 그림자를 조화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돌멩이들의 불모와 무덤의 추위는 우선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행복한 미래의 꽃이 피어나는 거기에 별 도리가 없다. 또한 아직 그곳을 잘 모르는 순진한 이방인은 자신의 시선의 호기심을 그대로 유지하고, 관점을 이동하며, 말과 이미지들의 처음 조합을 다시 다듬고, 장소의 확실한 기억들을 해체하면서 장소와 일반적으로 현실의 이름으로 알려진 여행 일정의 지도를 모르는 각자 내면에 현재의 능력을 깨우쳐준다. 이처럼 이방인은 자신이 묶은 매듭을 푼다. 민감한 정치의 확실성을 빛과 구름의 놀이와 결합하는 말과 이미지를 결합한 시인은 이미지의 추락에 반대하고, 자신의 낱말을 다시 만들며, 공동의 행복을 위한 모든 가능성과 관련하여 이미지와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는다. 이처럼 그 땅에서 책에 나오는 낱말과 장소를 무한정 인식하는 사람의 길과 낱말과 형상을 그리고, 단단한 돌이나 시에, 작품으로부터 되찾은 기묘함 속에 꽃을 새기는 사람의 길은 서로 갈라진다.

따라서 이 글은 순진한 이방인들이나 재빨리 지나가는 젊음을 형성하는 데 아주 유익한 여행, 유토피아의 구름을 고발하는 독특한 현실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에서는 유토피아적 신기루나 광기가 실제적인 지식과 합리적인 정치가 현실을 구축하는 절차에 대해 미세한 지나침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느끼게 될 것이다. 즉 다시 덮는 문제, 유토피아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배열된 낱말과 이미지의 조합에 의해, 말하자면 직접 주어진 사물, 혹은 낱말과 사물의 정확한 일치의 말없는 명백함이다. 또한 현실의 광경이 유토피아의 전도사들을 깨닫게 하는 것도 드문 일이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그들은 걷는 데 지쳐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여행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사물의 무게보다는 흔히 낱말의 상처를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실제의 저항을 믿고 사람들이 낱말 때문에 살고 죽는 사람들은 여행의 신랄한 지식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줄 게 거의 없다. 그들의 독특한 학문은 유토피아를 현실, 사회 혹은 분명 이카리아보다는 더 편한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 문제를 공유한다. 그들은 이처럼 물론 소중하지만 진실의 길을 위해 주어지는 칭호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평화의 방법을 확보하려고 한다. 일상적인 도정과 유토피아의 잃어버린 길이 그려져 있는 방향에 대해 더 알기 위해서는 장소의 찾기와 그 부재의 운각을 나타내는 낱말들을 모으면서 시인들의 작업을 따라가는 편이 낫다. 이 글을 관통하고 있는 워즈워스, 뷔히너, 릴케, 그들의 여백에 긴 자국을 남긴 보들레르, 낱말의 여행으로 영원히 떠났다가, “긴 문장과 문장이 아닌 약간의 존재와의 결합”이라는 불가능하고 특별한 만남에 마지막 도약까지 중단된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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