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독서일기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허경 옮김/인간사랑·1만5000원

지난달에 있었던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시민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시민 후보의 당선으로 이명박 정권이 표나게 망쳐놓은 민주주의는 회생하게 된 것일까? 시민 후보의 당선이 민주주의의 진척을 보여주는 것일까?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인간사랑, 2011)는 ‘천만에!’라고 대답한다. 오늘의 민주주의란 대의제에 의해 은닉된 과두정치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그에게, 선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민주주의란 애초에 없다.

랑시에르에게 선거는 과두계급의 순환 지배를 세탁해주는 과정이다. 이런 생각은 꽤나 과격해 보이지만, 민주주의라는 ‘불판’을 새로 뒤집어야 한다는 급진주의자에게는 그렇게 낯선 게 아니다. 슬라보이 지제크도 그런 경우로 그는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라는 책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방법이 대의제 말고는 모조리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폭력으로 느낄 수 있어야 닫혀 있는 정치가 열린다고 주장한다.

급진주의자들과는 다른 이유지만, 1인 1표와 동어반복인 민주주의를 싫어하기는 우파도 마찬가지다. 좌파나 시민 후보의 승리를 ‘포퓰리즘의 폭거’라고 논평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우파들만 그런 게 아니다. 만국의 우파들은 무책임한 선거 유희를 제도화한 민주주의를 증오한다. 이때 우파가 애용하는 포퓰리즘은 랑시에르가 잘 정리했듯이 “민중적 정당성과 과두제적 정당성 사이의 악화된 모순을 은폐시킬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용어”다. 이 용어는 우파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모든 정치적 일탈을 베는 전가의 보도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선제가 곧 민주주의를 뜻하던 시절이 있었고, 이런 사정은 보통 선거를 성취하기 위해 장구한 투쟁을 벌였던 서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어느덧 대의제와 민주주의는 좌우 양편과 급진주의자의 증오를 받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미리 보았듯이, 우파들은 막강한 재력과 엘리트 교육으로 무장된 우수한 인재를 가지고도 마음대로 못해 먹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저주한다. 좌파의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역시 우파만큼 단순해서, ‘어느 나라에서든 선거의 공통점은, 선거 비용을 더 많이 쓴 후보가 적게 쓴 후보보다 당선 가능성이 더 크다’라는 단 한마디로 요약된다.

반면, 지은이는 민주주의를 법이나 제도로 여기고 만다는 점에서 좌파나 우파가 다를 게 없다고 본다. 선거를 통해 입신한 그들은 입법부와 행정부를 오가며 통치수단을 독점하고, 통치와 통치 대상을 나눈다는 점에서 똑같은 과두정이다. 예컨대 현재 몸살을 앓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인준 문제가 그렇다. 노무현 정권이 시작하고 이명박 정권이 마무리하려는 이 문제는 발단에서 결론까지, 한 줌의 정치 엘리트와 전문 관료 그리고 그들과 동체인 자본가의 손에 결정날 것이다. 법과 제도로 한정된 민주주의는 이 대목에서 할 역할이 없다. 게다가 온갖 선거(민주주의)에 참여해 온 시민(경제적 주체) 역시 공공의 의제를 언제라도 사적 이익에 취합할 자세가 되어 있는 한,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정치도 아니다.



 

» 소설가 장정일
 
냉소적이게도 경제 용어인 ‘낙수효과’(trickle down)는, 경제보다 오늘의 민주주의를 더 잘 설명한다. 시민 후보가 시장에 당선되어 선거의 덕을 보게 되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그 주변의 정치 엘리트들이다. 그리고 차츰 시민에게까지 은전이 내려가지만, 그 효과는 채 시민이 되지 못한 사람, 랑시에르가 말하는 ‘벌거벗은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시민들이 추대한 시민 후보 박원순이 자신을 시민으로 생각하는 한, 민주주의는 진척한 것이 아니다. 지은이에게 민주주의란 제도와 법을 전복하는 불순성이고 무한성 자체다. 민주주의란 ‘정치적 주체’인 나를 대의제에 내맡기고 구경꾼이 되는 게 아니라, 공공영역을 사유화하려는 과두정치와 자본의 영향력을 끈질기게 뿌리뽑으려는 행동으로서만 나타난다. 소설가



출처: 한겨례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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