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제)
영화 우화
저자: 자크 랑시에르
목차
프롤로그
I. 가시성의 우화들
연극 시대와 TV 시대 사이에서
- 에이젠슈테인의 광기
- 무성의 타르튀프
- 두 가지 인간 사냥: 두 시대 사이의 프리츠 랑
- 소년감독
II. 고전주의적 서사, 낭만주의적 서사
- 해야 되는 어떤 것: 안소니 만의 시학
- 누락된 장면: 니콜라스 레이의 시학
III 영화의 모더니티는 존재하는가?
- 하나의 이미지에서 또 하나의 이미지로? 들뢰즈와 영화 시대들
- 신체의 추락: 로셀리니의 물리학
- <중국여자>의 붉음: 고다르의 정치
IV. 영화 우화, 한 세기의 이야기들
- 다큐멘터리와 허구: 마르케르와 기억의 허구
- 도덕 없는 우화: 고다르, 영화, 이야기들
저지된 우화
“일반적으로 영화는 에피소드(이야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극적 사건”은 여기에서 하나의 오류이다. 관객이 보고 있는 드라마는 벌써 반쯤은 해결됐으며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치유의 경사면을 달리고 있다. 끔찍한 비극은 서스펜스 상태에 빠진다. 비극은 모든 것을 위협한다. 비극은 창 커튼과 문고리 속에 있다. 펜촉에서 묻어나는 잉크 방울에서 비극이 꽃필 수 있다. 비극은 물잔 속에서 용해된다. 방 전체가 구석구석을 채우는 드라마로 포화상태가 된다. 엽궐련이 재떨이 홈에서 위협하듯이 연기를 품어낸다. 배신의 분말. 융단은 독성을 품은 아라베스크 문양을 펼치며 안락의자의 팔은 흔들거린다. 고통은 이제 폭발 직전이다. 기다림. 아직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플롯의 요체가 될 비극적 크리스털이 어디엔가 떨어졌다. 그 파장이 앞으로 나가면서 동심원을 그린다. 파장은 꼬리를 물고 확장된다. 몇 초가 흐른다.”
“전화벨이 울린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아니, 당신은 그 인물들이 영화의 결말에서 결혼하게 되는지…. 그것이 그토록 궁금하단 말이오! 좋지 않게 끝나는 영화는 없다.1) 관객들은 시간표에 적혀진 시간에 행복을 맛볼 것이다.”
“영화는 진실이며 이야기는 거짓이다.”2)
쟝 엡스탱(Jean Epstein)이 쓴 이 글은 영화 우화3)라는 개념이 제기하는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21년 24살의 젊은 청년은 「안녕하세요, 영화여!」(Bonjour cinéma)라는 제목의 글에서 영화가 선도한다고 생각하는 예술 혁명을 예찬하고 있다. 쟝 엡스탱은 이 책의 주제—진실이 기만으로 귀속되는 것처럼 영화는 이야기 기법(l'art des histoires)으로 귀속된다—를 무효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을 통해 이 예술 혁명을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영화가 배제하는 것은 단지 결혼의 성사 여부, 자식 수 따위를 알려주는 동화의 결말과 같은 유치한 기다림뿐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우화(fable), 예컨대 급변과 대단원을 통해 등장인물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또는 그 반대로 이행하는 필연적인 또는 진실임직한 사건들의 결합이다. 배치된 사건들의 이러한 원칙은 비극시뿐만 아니라 예술적 표현이라는 관념 자체를 규정했었다. 그런데 젊은 엡스탱은 이 원칙이 적절치 않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 원칙은 그것이 모방한다고 주장하는 삶을 부정하고 있다. 삶은 이야기들, 하나의 결말로 향한 사건들이 아닌, 오로지 제 방향으로 열린 상황들로 구성된다. 삶은 극적인 진전이 아닌 수많은 미시 사건들로 이루어진 긴 연속적 운동이다. 삶의 이러한 진실이 표현될 수 있는 예술이 마침내 발견된 것이다. 이 예술 속에서 변화무쌍한 운명의 부침(浮沈)과 의지들의 갈등을 창조하는 지성은 또 하나의 지성, 즉 기계의 지성에 예속된다. 그 자체로 충만해 하는 기계의 지성은 어떤 이야기들도 만들지 못하지만 극적 운명의 부침보다 훨씬 강렬한 드라마를 만드는 무한한 운동들을 기록한다. “철저하게 정직한” 예술가가 영화의 시원에 있다. 이 예술가는 속임수를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기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기록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기록은 보들레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동일한 사태의 재생산과는 전혀 무관하다. 영화의 자동운동은 “현실”의 지위 자체를 변화시키면서 기술과 예술 사이의 분쟁을 종결한다. 영화의 자동운동은 사태가 우리의 시선에 제시된 대로 그것을 재생산하는 않는다. 영화의 자동운동은 그 묘사적․서사적 특성을 통해 식별 가능한 대상들, 인물들 또는 사건들로서 사태들이 규정되기 전에, 인간 눈이 포착하지 못하는 사태들을 있는 그대로, 파동과 진동의 상태로 존재하는 대로 사태들을 기록한다.
바로 이런 연유로 움직이는(mobile) 이미지 예술이 뮈토스(muthos)—플롯의 합리성—를 강조하면서 오프시스(opsis)—스펙터클의 감각적 효과—를 등한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의 낡은 위계를 전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이미지 예술은 그 운동성 덕분에 서사 능력을 합병한 육안으로 보는 예술이 아니며, 가시적 형태들을 모방하는 예술을 대체한 육안으로 보는 기술도 아니다. 움직이는 이미지 예술은 ‘예술과 의미 중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하느냐’라는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감각(le sensible)의 내적 진리에 다가가는 통로를 제공한다. 이미지 예술은 무엇보다도 사유와 감성의 중요한 분쟁을 종결짓는다. 만일 영화가 낡은 미메시스(mimesis) 질서를 폐기한다면, 그것은 미메시스의 물음을 그 뿌리로부터 해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이미지에 대한 플라톤의 불신, 감각적인 모사와 지성적인 모델의 대립을 해결한다. 기계 눈이 보고 전사(轉寫)하는 것은 정신과 동등한 질료, 파동과 미립자들이 만드는 비물질적인 감각적 질료라고 엡스탱은 말한다. 이 질료는 기만적인 외양과 실체적 현실 사이의 대립을 폐기한다. 세계의 스펙터클을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눈과 손, 신비스런 영혼의 영역을 탐험했던 드라마는 낡은 예술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낡은 과학에 속하기 때문이다. 빛에 의한 운동의 글쓰기는 허구적인 질료를 감각적 질료로 이동시킨다. 빛에 의한 이 운동의 글쓰기는 배신의 악랄함, 범죄를 위한 독약이나 멜로드라마의 애통함을 부유하는 미세한 먼지가루, 담배연기나 융단의 아라베스크 문양을 통해 나타낸다. 그리고 이 글쓰기는 모든 것을 비물질적 질료의 내적 운동으로 환원시킨다. 이것이 영화를 통해 예술가가 발견한 새로운 드라마이다. 영화에서는 사유와 사태, 외부와 내부가 무차별하게 동일한 조직 속에서 포착된다. 사유는 “암페어의 방출”을 통해 관객의 이마에 새겨지고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사랑은 어떠한 사랑도 지금까지 함유하지 않았던 “적정한 지분의 자외선”4)을 함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