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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Derrida: A Biographyby Jason Powell(Jan 15, 2007) 



 

번역자:  박현정(서울대학교 철학과)

 



서문




2003년, 내가 이 ‘평전’을 쓰기 시작한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자크 데리다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본래 자크 데리다가 사망했을 때쯤엔 그의 삶과 작업에 대한 글이 이미 완결되어 인쇄되어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 책은 데리다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 이와 함께 그의 글에 대한 평가와 데리다 철학에 대한 일람을 제공한다. 

이 전기의 집필에 착수할 때 내게 큰 도움이 된 책들이 있다. 나는 특히 제프리 베닝턴(Geoffrey Bennington)의 [자크 데리다(Bennignton 1999)]에 공을 돌리고 싶다. 이 책의 ‘약력’이라는 제목이 붙은 장에서 얻은 정보가 나의 연구에 기본적 골격이 되어주었다.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의 [데리다 따라 걷기(Counterpath): 자크 데리다와 함께 여행하기(Derrida 2004a)]에서도 유용한 전기적 세목들을 참고했다.

이 전기를 위한 나의 연구를 감수해 준 리버풀 대학의 칼 심스(Karl Simms) 박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또한 나의 아내, 멜리사(Melisa)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서언

자크 데리다는 동시대인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였고 실질적으로도 위대하며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글은 발표 당시부터 논쟁거리였고, 그의 글에서 발견되는 기본적으로 하이데거적인 ‘해체’에 대한 여러 혼재된 해석들은 아직도 깔끔히 정돈되지 못했다. 자크 데리다가 철학사와 문화를 해체한 비평가로 보는 것은 일반적인 관점이지만, 확립된 사실들과 관습들을 전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관점에 따라 정당한 것으로도 사악한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반(反) 서구적인 인물로 본다. 법률을 지역에 기초하지 않은 국제적인 계율 체계로 보는 그의 사유에는 실제로도 아랍적이고 알제리적인 요소가 있다. 반면 그의 세계시민주의는 미국인들이 가진 국가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최고의 범례이다. 마찬가지로 법에 대한 그의 시각은 세속적인 면도 보이지만 동시에 서구적 신앙에 근거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문학적인 글읽기 양식을 써서 철학을 공격한 일로, 일단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자자하다. 그는 단순한 문학 연구는 일찍이 넘어섰지만 여전히 정서를 중시하고 수사법에 주목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데리다를 학계의 철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복합적이고도 강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본다. 그들은 데리다를 정통적 교의와 그것에 종속되어 머무르는 지적 나태에 맞서 싸운 전사이자 학생들이 교육받는 방식을 바꾸는 데 몰두한 탈속적 견유학파의 하나라고 본다. 로저 스크루턴(Roger Scruton)(2005)과 다른 많은 앵글로 색슨 철학자들과 문화 평론가들이, 소수의 참된 초월론적 철학자들은 기억과 선조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면서 역사적 연속성에 주목해온 반면, 데리다는 이와는 반대로 새롭고 저급하며 대중적인 ‘부정의 문화’를 위해 작업했던 사람이었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데리다를 나치즘이나 소련 공산주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편협한 방식으로 읽는 극단적 엘리트주의적 해석가로 본다. 그의 글에는 민족주의적 감정과 유물이 된 백인 남성 유럽인들에 대한 우상화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내내 그는 ‘독일인 하이데거’라는 혐의를 받았다. 데리다에 좀 더 공감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해체를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낡은 전통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대체할 수 있는 글들을 적절하게 생산해내는, 진보적 유형의 철학사 비평으로 본다. 이처럼, 학계의 평판 속에서 데리다는 상반된 경향들을 동시에 보이는 철학자다. 그의 글들은 장난기 가득한 국외자의 글인 동시에 니체의 ‘귀족적 급진주의’의 계열에 속하는 강력한 지도자이자 탁월한 교사인 사람의 글이기도 하다. 그는 학자연했으며 보수적이었지만 그의 삶과 글은 확실히, 그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든 (그리고 어쩌면 논쟁 그 자체가 그의 글을 마땅히 읽었어야 할 사람들이 실제로는 주의와 신중함을 결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데리다는 파리에서는 1960년대 중반에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1966년 존스 홉킨스 학회1)에서 폴 드만이 그에게 찬탄을 보낸 일을 예외로 한다면) 미국과 영국에서는 197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논문들은 처음부터 수가 많았다. 당시에는 아직 실질적 주장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었고 그의 ‘그라마톨로지’ 외에는 어떤 적극적 학설들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할 만한 작가에게는 비정상적일 정도였다. ‘해체’라는 것에 대한 주목이 증가함과 동시에 데리다는 과대평가된2)사람의 이미지 혹은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 시기의 ‘해체’ 학파는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무언가를 분명히 해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해체에는 시대에 맞고 가치 있는 점이 있었다. 데리다는 살아있는 프랑스와 독일 ‘이론가’들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복합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그러니까 그가 독서를 통해 피부로 호흡했던 범(凡)유럽의 전통으로부터 태어났다. 구조주의에서 출발했지만 파리에 머물지 않았고 나아가 미국이나 심지어 어떤 대학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데리다에게는, 우리가 그를 주목하고 연구하도록 만드는 어떤 비밀스런 열망이 있었다. 그가 철학적 연구들과 고급문화 속에 깃든 사상을 개괄하여 대학 교육의 근간으로 삼았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처음부터 결코 단순한 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시대의 조망에 요구되는, 묻고 배우고 세상을 개괄하는 어떤 방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새로운 ‘주의(主義)’였다. 그러나 그의 파악하기 어렵고 극도로 조심스러운 학설은 많은 이들을 좌절에 빠트리고 그의 ‘학설’ 내부에서조차 그는 모순적으로 보였다. 말하자면 실제로는 학설이나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데리다는 의심할 바 없이 텍스트를 어떤 의향을 가지고 읽었지만, 그러나 하나의 방법 또는 하나의 구체적이고 현실화 가능한 목표를 가지고 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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