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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guardia in Congress by Howard Zinn (Paperback - Jan. 14, 2010) 

 


차 례


1. 맨해튼에서 온 신참 의원: 1917년


2. 두 곳의 전투: 의회와 전선


3. 평화라는 문제: 1919년


4. 쓰라린 막간: 1920-1922년


5. “번영”의 시대에 의회에 복귀하다.


6. 라과디아, 라 폴레트, 그리고 진보주의: 1922-1924년


7. 토착주의와의 싸움: 쿨리지 시대


8. 빨갱이 사냥이란 유산


9. 새로운 외교정책을 지향하다.


10. 20년대의 전력국유화를 위한 싸움


11. 새로운 도금시대의 “나머지 절반”


12. 라과디아와 진보정치: 1924-1929


13. 굶주림 대 민간기업


14. 제2 라운드: 구호, 공공사업, 그리고 최루탄


15. “먹이를 노리는 비열한 독수리”: 자본가들


16. 두 전선에서의 승리: 세금과 파업금지명령


17. 공산주의, 토착주의, 그리고 외교정책


18. 정치적 패배와 도덕적 승리: 1932-1933년


19.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의회활동: 평가




이 책은 하워드 진(Howard Zinn)의 “LaGuardia in Congress"(1959년 코넬대학 출판부 간행, 2010년 복간)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과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는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저자의 생애를 조감해보는 것이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 생각된다. 그만큼 저자는 실제 생황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했고 생애 자체가 또한 극적이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대표작이라고 할 『민중의 미국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1980년에 출간 된 이후 지금까지 2백여만부가 팔렸지만 초판은 겨우 4천부가 인쇄되었다. 이것은 그의 역사관이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적 호응을 얻어갔음을 증명한다. 학계에서는 그의 사관을 수정주의라고 하지만 그 한마디로 그의 사관을 종합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전통적 사학자들은 그가 콜럼부스를 학살자로,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냉혹한 제국주의자로, 링컨은 인종통합에 실패한 정치가로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런 평가가 그의 사관을 오히려 더 적절하게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그는 빈곤한 농민들, 페미니스트, 반전운동가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했다. 하워드 진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가 저지른 많은 추악한 행적들을―월남전, 민권운동, 워터게이트 등―교과서에서는 미국의 영광이라고 미화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관점에서 보다 더 정직한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 뉴욕타임스의 서평에서 역사학자 에릭 포우너(Eric Foner)는 하워드 진의 저서가 “일관성 있고 새로운 미국사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혀놓았다”고 평했지만 프린스턴 대학 역사학교수 숀 윌렌츠(Sean Wilentz)는 하워드 진이 “역사연구를 아카데미 밖으로 끌고 나와 노골적인 편향된 관점으로 역사서술을 망쳐 놓았다. 역사를 대중화한다는 명분을 내새워 옛 악당을 영웅으로 둔갑시켰다”고 평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진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내 저서가 편향된 관점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학살당하고 손발이 잘리는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사는 다른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상아탑의 장막을 걷어내고 역사를 대중문화의 한 분야로 끌어들이는데 하워드 진 만큼 성공한 역사학자는 드물다는 점이다.

하워드 진은 1922년 8월 뉴욕에서 태어났고 부모는 유대인 이민이었다. 진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가족은 지주들에게 쫓겨 수없이 이사 다녔다. 브룩클린의 슬럼가운데서 우리 가족이 살아보지 않은 곳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브룩클린의 해군 조선소에서 배관공으로 일했고 이곳에서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어린 시절에는 찰스 디킨즈의 작품을 통해 세상과 만났고 청년 시절에는 칼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었으며 노동자 집회를 조직하다가 경찰에게 구타당하기를 되풀이 했다. 1943년에 파시스트와 싸우겠다는 열정 때문에 군에 입대하여 B-17 폭격기의 폭탄투하수로 참전했다. 그는 베를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폭격작전에 참가하여 자신이 투하하는 폭탄이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려가는 광경을 지켜보았고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는 군에서 받은 훈장을 봉투에 담아 처박아 놓고 꺼내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봉투에 이렇게 썼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하워드 진의 반전사상은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하워드 진은 “전쟁이 일종의 도덕적 명분을 갖고 있었음은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그 때문에 미국은 이후의 모든 전쟁을 영웅시하는데 익숙해졌고 모든 적은 히틀러가 되었다”고 말했다.

폭격에 참가하고 나서 9년이 지나 진은 박사 후 연구과정에서 프랑스 보르도 근처 로양이란 해변 휴양지로 가 그곳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지역 도서관에서 전쟁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읽었다. 이곳에서의 연구 결과는 1966년에 『역사의 정치학』(Politics of History)이란 저서로 나왔다. 진은 자신이 참가했던 폭격으로 이 지역에 숨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독일군뿐만 아니라 프랑스 민간인도 천명 이상 사망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폭격이 작지만 오래된 마을 하나를 지도 위에서 사라지게 만든 “비극적 실수이며 그곳의 주민들은 공식적으로 적이 아니라 우군”이었다고 표현했다. 이 책에서 진은 장교들이 전쟁이 끝나기 불과 몇 주 전에 전공을 세울 욕심에서 폭격을 명령한 과정을 밝혀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필젠의 스코다 자동차공장 폭격사례도 열거하고 있다. 미 공군의 공식보고서에는 “사전에 폭격을 경고했고 정확히 조준하여 폭탄을 투하하였으므로 공장 노동자가운데서 희생된 숫자는 5명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진은 이 책에서 “나 자신이 부폭격수로 참가했던 이 작전에서 우리는 스코다 공장만을 특별히 겨냥하여 폭탄을 투하하지 않았고 그냥 필젠시 상공에서 폭탄을 쏟아 부었다. 당시 필젠에 살았던 두 사람을 최근에 만나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때의 공습으로 모두가 체코인인 공장 노동자 수백 명이 죽었다고 한다. 필젠은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폭격 목표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진은 직접 경험한 바와 이후의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2차 대전시 연합군의 드레스덴, 로양, 토쿄, 히로시마, 나가사키 폭격과 미군의 월남전 폭격, 이라크전에서 바그다드 폭격, 아프가니스칸 폭격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1995년에 펴낸 『히로시마: 침묵을 깨고』(Hiroshima: Breaking the Silence)란 소책자에서 무모한 폭격이 수많은 민간인을 희생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는 최근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난하면서 “폭격의 역사는 끝이 없는 잔혹행위의 역사이며 미국만큼 타국을 폭격한 나라는 없다. 그런데도 모두들 태연하게 ‘사고’였다거나 ‘군사목표’를 폭격했다거나 ‘부수적인 손실’이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워드 진은 결혼 후 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 쥐가 들끓는 아파트 지하층에서 살았다. 제대 후 참전병사에게 주는 학자금 지원 혜택(G. I. bill)을 받아 뉴욕대학을 졸업하였고(1951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역사학으로 석사학위(1952년)와 박사학위(1958년)를 받았다.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1914년의 콜로라도 광부파업이며 박사학위 논문은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의회활동을 다룬 『라과디아의 의회활동』(LaGuardia in Congress)이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이듬해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바로 이 역서의 원전이기도 하다. 진의 최초의 저작이자 이후의 사회운동과 학문연구의 방향을 짐작케 하는 『라과디아의 의회활동』에서 그는 흔히 “번영의 시대”, “황금의 시대”로 불리는 미국의 1920년대에 부가 소수에게 편중되고 노동자와 농민이 독점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치밀하게 그려 내었으며 이런 시대에 전력사업의 국유화, 노동자파업권의 보장, 누진세제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위해 싸운 라과디아를 “20년대의 양심”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라과디아가 “입법 활동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뉴딜」을 예고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이 책은 미국역사학회가 영어로 쓰인 뛰어난 미국 역사저작을 대상으로 매년 수여하는 앨버트 비브리지 상(Albert J. Beveridge Award)의 후보저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진에게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은 『미국의 정치전통』(The American Political Tradition)을 쓴 호프스타터(Richard Hopfstadter)였다. 진은 『라과디아의 의회활동』에서 『미국의 정치전통』을 여러 차례 인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호프스타터 교수는 『미국의 정치전통』에서 대통령을 소속 정당에 관계없이 ‘보수적’인 대통령과 ‘진보적’인 대통령 두 부류로 나누었는데, 만약 그분이 살아 계셔서 여기에 덧붙여 미국체제의 두 가지 핵심적 특성을 정의하신다면 미국우선주의와 자본주의일 것이다. 오바마도 이 도식을 충실히 답습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바마의 개혁정책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워드 진은 1956년에 흑인 여자대학인 스펠만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강단에 섰다. 그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민권의식을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직접 시위를 조직하고 참가했다. 스펠만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전국적인 학생 민권운동단체인 SNCC(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Student Nonviolent Coordination Committee)의 고문을 맡았었고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민권운동의 지도적 인물들이 다수 나왔다. 이런 활동 때문에 학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명령불복종”으로 해임되었다. 41년이 지난 2005년에 그는 스펠만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절망하지 말아야 하며 옳다고 생각되면 굽히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1964년에 보스턴대학으로 옮겨간 후에는 월남전 반대 운동에 뛰어들어 『월남: 철수해야하는 이유』(Vietnam: The Logic of Withdrawal)(1967년 출간)와 『불복종과 민주주의』(Disobedience and Democracy)(1968년 출간)를 저술했다. 1968년에는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반대하는 의지를 표시하기 위해 진보적인 목사 대니얼 베리건(Daniel Barrigan)과 함께 하노이에 갔고 이때 월맹은 격추된 미군 조종사 3명을 석방했다. 당시 미국의 조야를 혼란에 빠트렸던 국방성 직원 대니얼 엘스버그가 미국의 월남전 개입의 과정을 담은 이른 바 “펜타곤 문서” 유출한 사건이 일어났다. 엘스버그는 신뢰하던 하워드 진과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에게 이 문서를 전달했고 하워드 진이 이를 세상에 공개했다. 국가기밀 누설혐의로 기소된 엘스버그 재판에서 하워드 진은 “누설된 기밀은 정치가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먼 나라의 주석과 고무와 석유를 가져오려는 기업들의 이익을 저해하지만 이 나라와 민중의 안위를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진은 전쟁의 목적이 석유이익이며 월남전과 마찬가지로 이라크전쟁도 병사들의 반발 때문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이라크전을 비난하는 글에서 “아무리 큰 성조기라도 달성할 수 없는 목표 때문에 무고한 시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수치를 가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보수적 성향의 보스턴 대학 총장 존 실버(John Silber)와 대립하였던 진은 세 차례나 총장불신임 교수투표를 주도했다. 실버는 그를 “학문의 우물에 독을 푸는 자”라고 혹평했다.

보스턴 대학에서 24년을 가르친 후 1988년에 은퇴한 하워드 진은 은퇴 후에도 활발한 저술과 강연을 통해 사회적인 발언을 계속했다. 진은 자신을 “부분적으로는 아나키스트이고 부분적으로는 사회주의자이지만 한마디로 하자면 민주사회주의자”라고 하였다. 그는 2009년의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세기 말, 소비에트연방에 의해 이름을 더럽히기 전의 사회주의로 돌아가 사회주의의 이상을 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근본적으로 말해 사회주의란 보다 인간적이며 보다 고상한 사회를 추구하는 이념이다. 나누어 가지자. 특정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제품을 생산하는 경제체제를 만들자.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면 사회주의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사상을 전방위로 실천에 옮겼던 진은 핵무기 폐기를 주제로 한 “비너스의 딸”(Daughter of Venus)(1985년 출간), 마르크스의 생애를 극화한 일인극 “소호의 마르크스”(Marx in Soho)(1999년 출간),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생애를 극화한 “엠마”(Emma)(1976년 출간) 등 세 편의 희곡을 썼고 이 작품들은 모두 상연되었다.

정보자유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따라 미연방수사국(FBI)은 2010년 7월에 423쪽에 이르는 하워드 진 관련 파일을 공개했다. 연방수사국은 메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1949년부터 진을 감시했고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면 즉시 체포해야할 대상으로 분류했었다.

하워드 진은 2010년 1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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