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황금
로버트 A. 존슨 저/ 박종일 역
목 차
제 1 장 내면의 황금
제 2 장 외로움
제 3 장 러브 스토리
제 4 장 왕의 귀환
저자에 관하여
나눔을 자각하라.
매일 매일 얼마나 많은 황금의 이전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지켜보면서 나는 경이를 느낀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강연을 할 때면 나는 누군가를 특별히 지목하여 그에게 말함으로써 황금을 그의 무릎위에 올려놓는다. 이것은 나 자신을 고양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늘 자신을 얼치기 강연자가 아닌가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융 박사의 수제자인 마리 루이스 폰 프란츠가 나와 함께 강연하러 가면서 내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강연을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찾아내어 그 사람에게 대화하듯 말하는 것이에요.” 나는 그녀의 말에서 큰 위안을 찾았다. 이따금씩 나는 그녀의 방식을 따라 강연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황금을 교환하는 일에 서툴고, 우리의 우울함과 외로움은 이 교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되풀이 된다. 우리는 죄책감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실패작이야. 이 방법으로는 안 되잖아.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나 황금을 전달하는 일을 이해하게 되면 그 일을 귀하게 여기고 죄책감은 느끼지 않게 된다. 그때 당신은 무언가 간접적인 변화가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느낄 수는 있지만 분명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누군가가 당신의 황금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명심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알면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어떤 긍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기가 힘든 까닭은—자식이 집을 떠나건 가까운 이들이 세상을 떠나건—떠나는 그들에게 우리의 황금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속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우리의 황금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황금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들 곁을 맴돌며 그들이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당신이 어떤 여자에게 매달려 그 여자가 곁에 없이는—또는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는—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의 황금을 그 여자에게 맡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떠나보냄을 아쉬워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당신의 투사 대상을 바꾸고 그 여자를 떠나보내야 한다.
교회에 맡김
예전에는 사람들이 영적인 황금을 교회에 맡겼다. 오늘날 그런 일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교회는 당신의 황금을 맡겨두기에 이상적인 곳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시도하기란 쉽지 않음을 나는 안다. 나도 시도해본 적이 있으니까.
30여 년 전, 다음날이면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에게 나의 황금을 맡기는 일에 나는 지쳐갔다. 나는 늘 가톨릭교회에 끌렸다. 가톨릭신자로 성장한 것도 아니고 교회에 가본 적도 없었지만 나는 교회에 대해 호의적인 정서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로스엔젤리스의 아름다운 가톨릭교회를 선택했다. 그곳은 스페인풍의 바로크양식을 그대로 본 따 지은 건물로서 뛰어난 조각 작품들이 많았다. 어느 날 오후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나는 교회로 들어가 동정녀 마리아 상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황금을 쏟아냈다. 황금을 쏟아 내는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런데 나는 마리아 상의 머리 위 후광이 네온관으로 밝힌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네온관을 보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고 이후로 나는 그 교회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우리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영적인 황금을 맡길 장소를 찾아야 한다.
갇힌 상자에서 나온 신
지금 하려는 얘기는 우스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진심이다. 신은 갇힌 상자에서 나왔다. 예전에 신은 가톨릭교회당의 제단 위 감실(龕室) 속에서 살았고 감실 문을 여는 열쇠는 신부가 갖고 있었다. 신은 안에 갇혀 있었고 밖에 있는 우리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전했다. 그러나 이제 상자는 부서졌고 신은 풀려났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100년 후에 역사가 지금부터 우리가 하려는 일들을 어떻게 기록해 놓을지 상상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놀라운 가능성이 있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신은 고압전류이다. 그래서 내가 캘커타에서 경험한 것처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갖게 됐을 때 지체 없이 도움을 청해야 한다. 우리는 신을 다시 가두어 둘 수는 없다. 신을 감실 속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예전에는 제일(祭日)이면 다섯 시에 가톨릭 신부가 성체강복식(聖體降福式)을 거행했다. 신부는 양쪽에 거울이 붙어 있고 손잡이가 달린 만다라 모양의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를 들고 나온다. 성체는 두 장의 거울 사이에 안치되며 신부는 성체현시대를 들 때 손이 직접 닿지 않도록 영대(領帶)로 손잡이를 감싸서 잡는다. 그런 다음에 신부는 성체현시대를 를 돌려 신자들에게 신을 보여준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신은 감실 속에 있지도 않고 성체현시대 속에 있지도 않다. 신은 밖으로 나와 모든 곳을 비추고 있다. 내면의 연금술로 만들어진 황금이 분출되고 있는 것이 그 중요한 표징의 하나이다. 내면의 황금은 당신의 최상일 수도 있고 최악일 수도 있다.
인도에서는 신은 아직 상자 속에 갇혀 있다. 이런 면에서 인도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다.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모든 일에는 법칙이 있고 승려는 아직도 상자를 여는 열쇠를 쥐고 있다. 무언가를 알고 싶다면 고대의 신화에서 찾든지 구루나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된다. 신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에게서 답을 구할 수 있다. 이전 가톨릭세계에서도 그랬다. 옳은 방식이 정해져 있었고 신부가 옳은 방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그런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을 다시 상자 속에 모실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신이 상자 밖에 나와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을지도 분명하지 않다. 갑자기 몇 만 볼트로 높아진 전압이 흘러들어와 집안의 전기 선로가 불타버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요컨대 절망적인 상황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방식, 자신만의 차별화된 대응책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예수가 우리에게 “이제부터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잠시는 기쁠지 모르나 이내 무거운 바위에 짓눌린 느낌이 된다. 이 무거움은 이전에도 지금에도 우리 자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짊어 질 수가 없다.
신이 상자 밖으로 나온 지금 그가 머물 장소가 어디 있을까? 모든 정신적 힘은 성역, 금지된 경계, 담을 용기(容器)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그 용기가 권위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권위를 분해해 버렸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비난의 밀물과 피를 요구하는 외침이 우리 자신의 황금을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 하며 그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제 신비한 힘이 머물 장소는 우리 자신의 의식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신을 객관적이고 집합적인 거처로부터 끌어내어 우리의 심리학 속으로 흡수하였다. 이제는 우리의 의식이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해법을 찾는데 성공하지 못했다.